9. 트랜스 마더, 유모

 

 


젖의 경제학, 유모의 세상살이
 


   
 

대동군(大同郡) 부산면에 자기의 손자 딸을 살해한 일로 그의 할머니 되는 여자가 소관 대동서(大同署)에서 취조를 받는 중이라. (……) 이 씨(44세)는 작년 4월에 자기의 며느리가 죽자 젖 때문에 손녀 김증숙(2세)을 매달 4원씩 주기로 하고 유모를 두었던 중 생활 곤란으로 그 돈 4원을 매달 줄 수가 없자 지난 1일 오후 2시 경에 자기의 손녀를 유모의 집으로부터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오다가 미리 준비한 양잿물을 물에 타 먹여 죽인 후에 부근 공동묘지에 파묻어버렸다.
― “생활난으로 손녀를 독살”, 〈동아일보〉, 1927년 7월 10일

 
   

 

부잣집의 경우 유모가 상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유모들은 자신이 젖을 먹일 아이의 집에 출근을 하는 식이었고, 부모가 유모의 집에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과거에 ‘젖동냥’이라는 ‘훈훈한’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은 다양한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젖’이야말로 사업의 밑천이었고, 그 밑천을 ‘기부’하기 위해서는 큰 결단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유모의 젖이 친모의 젖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유모를 구하는 집이 줄지는 않았다. 유모를 구하는 광고를 내고, 직업소개소를 통해 유모를 구했지만 유모들은 공급보다 수요가 훨씬 더 많았다. 

 

   
 

경서부립 인사 상답소(京城府立人事相談所)에는 최근 유모를 구해달라고 의뢰하는 사람이 많아서 현재의 의뢰받은 것만 하여도 40여 명이 부족하다는데 유모가 되고자 희망하는 사람은 인사상담소에 신청함이 좋겠다더라.
― “유모가 부족”, 〈동아일보〉, 1929년 9월 28일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유모를 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자본’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 ‘부업’으로 유모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의 노동자 가정에서도 남아도는 자신의 ‘젖’을 밑천 삼아 유모일을 하는 경우가 흔했다. 유모의 남편들도 자신의 부족한 수입을 보충해주는 아내의 ‘부업’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부업이 아닌 ‘전업’으로 유모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정말 삶의 밑천이 오직 ‘젖’ 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죽은 자식의 일을 생각하니 살려고 발버둥치는 나의 앞에는 눈물이 앞서지 않을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하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씻으며 침착한 어조로 자기의 지난 일을 추억에 넘치어 이야기 하였습니다. (……) 삼년 전 일인데 아들 낳은 지 석 달 만에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사랑스러운 자기의 어린 아기는 남편에게 맡겨서 암죽[곡식이 밤 가루로 쓴 죽]으로 기르게 하고 돈을 벌어 남편 살리기 위하여 유모가 되었는데 젖을 빼앗긴 자기의 어린 것은 난지 다섯 달 만에 참혹한 형상으로 죽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집에 잠시 다녀온다고 하고 틈틈이 가서 뼈만 남은 어린 것을 품에 안고 눈물 섞인 젖을 마음 졸여가며 먹이던 것이 말이 어찌하여 주인의 귀에 들어갔는지 하루는 불러놓고 하는 말이 “우리 집 아기 젖을 유모 마음대로 하려거든 일 없으니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쫓겨나면 세 식구가 굶어 죽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형편이니, 에라 지식은 또 낳으면 있거니와 남편이나 살려 보자하고 주인에게 다시 가서 다시는 그러지 않기를 맹세한 후, 그 후로는 그 짓도 계속하지 못하고 그와 같이 죽어버렸답니다.
― “돈벌이 하는 여성의 이면과 표면-어머니 대신으로 젖을 먹이는 인자한 젖어머니 살이”, 〈동아일보〉, 1928년 3월 6일

 
   



더 이상 ‘봉보부인’이라든지, 유모가 아이의 첫 스승이라든지 하는 사고방식은 통하지 않았다. 유모의 제사를 챙기고, 유모 또한 어머니라는 식의 사고방식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근대 초기 유모의 위상은 조선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유모는 더 이상 아이의 첫 스승도 아니었고, 또 한 명의 어머니도 아니었다. 한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유전적 어머니’였고, 유모는 ‘젖어멈’으로서 기능적인 존재에 불과했으며, ‘젖’은 일종의 상품이자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유모를 고용한 집에서는 유모의 ‘젖’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사회는 유모의 젖을 단순히 ‘돈으로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었고, 일부 여성들 또한 유모의 젖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했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위치, 즉 ‘어머니’라는 위치를 더욱 강고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스스로가 유모의 젖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할수록, ‘모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할수록,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인간이 아닌 ‘어머니’의 이름으로 자신을 가둘 수밖에 없었다. 

 



  
*덧붙이는 말 
이것으로 <사라진 직업의 역사> 연재를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마실 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쁜 마음 오래도록 간직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전자책’에 밀려 ‘사라질지’ 모르는 ‘종이책’의 형태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랜 시간 제 글의 ‘첫 독자’였던 ‘자음과모음’ 편집부 인문팀 식구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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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san83 2011-03-04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정말 축하드립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여쁜 단행본으로 묶여져 나오면 꼭 사보겠습니다. 멋진 글 감사드립니다. ^^*

둥이 2011-03-04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종이책은 사라지지....음..
단행본으로 나오는 책 기대하겠습니다.

비로그인 2011-04-11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도에서는 유럽 불임부부를 위한 대리모가 성업이라는군요.
그동안 재미있었습니다. 또다른 테마가 기다려지네요.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9. 트랜스 마더, 유모

 

 


비타민A, 양질의 모유를 생산하기 위한 영양소

 

근대 국가가 바라는 완벽한 ‘수퍼맘’이 될 수 없었던 어머니들은 어쩔 수 없이 유모를 구했다. 유모를 구했던 어머니들이라고 해서 당시 사회에서 말하는 ‘모성’이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어머니들은 어쩔 수 없이 부족한 ‘모성’을 보충해줄 유모를 찾아야 했다. 그렇기에 유모를 고르는 기준은 까다로웠다. 신문에 구인광고를 냈을 뿐 아니라 직업소개소를 통하기도 했다. ‘적절한’ 유모를 구하는 기준은 매우 엄격했다. 

 

   
 

어떤 유모를 구하는 게 좋은지, 그 필요한 조건은,
첫째로 유모의 건강입니다. 화류병, 결핵, 문둥병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안 됩니다. 또는 각기신장병, 당뇨병, 전염성 피부병 같은 것이 있는 사람은 부적당합니다.
유모를 구하여 드릴 때는 반드시 의사의 진찰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와 동시에 유모 자신의 아이도 건강한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음주는 물론이요 담배도 피지 않는 사람이 좋습니다.
둘째는 유모의 성질입니다. 무엇보다도 선량하고 정직하고 그리고 신경질이거나 보통의 이해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안 됩니다.
셋째는 젖의 분량이 충분한가 어떤가를 확실히 보아야 합니다.
― “유모를 선택할 때 세 조건을 잊지 마라”, 〈동아일보〉, 1932년 3월 9일

 
   



젖이 나온다고 해서 모두가 유모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모를 들일 때에는 유모의 나이, 건강, 덕성, 젖의 상태 등을 확인했다. 만약 산모와 나이가 같고 같은 날에 출산을 했으며, 건강 상태가 양호할뿐더러, 성격까지 좋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물론 유모 선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유모의 건강이었다. 이는 젖을 통해 다양한 질병이 아이에게 감염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평양부 김성녀[金姓女, 35세, 김씨 성을 가진 여자]는 (……) 기생 한×성(20세)을 상대로 평양경찰서에 고소를 제기하였는데, 그 내용은 원고는 작년 말 피고의 어린 딸을 1개월에 7원의 보수로 젖을 먹여 왔는데, 자기 어머니의 매독을 유전 받은 그 아이 때문에 젖을 통하여 결국 원고도 악성 매독이 전염되었다는 것이다.
― “신체엔 손을 안 대도 상해죄가 성립될까”, 〈조선중앙일보〉, 1935년 8월 4일

 
   



기생의 딸로 태어난 아기는 어머니로부터 매독이 전염되었다. 매독균이 전염된 아이는 다시 유모에게 매독을 옮겼다. 산모나 유모의 젖을 통해 질병이 아이에게로 전염되는 경우는 있지만, 그 반대로 아이가 유모에게 질병을 옮기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 사건을 보도한 기자에게는 ‘상해죄’의 성립 여부가 중요했겠지만, 그보다는 ‘어머니-아이-유모’가 ‘젖’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의 건강에 간섭하고 있는 사실이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젖이 아이에게 가장 좋다는 의견이 팽배해져만 갔다. 아이에게 혹시 모를 질병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책은 우선 모유를 수유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건강한 유모의 젖을 수유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앞서 살펴보았던 유럽의 경우처럼 식민지 조선에도 ‘사악한 유방’의 논리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어머니의 몸이 몹시 약하다든가 또 젖이 잘 나오지 않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하는 수 없이 가정 형편에 따라 유모를 쓴다든지 우유를 먹일 수밖에 없겠습니다마는 어머니 젖이 아닌 딴 젖은 아기의 발육 상 결코 좋지 못합니다. 우유나 모유나 자랄 애는 자란다고 하지만 그것은 예외를 들어서 하는 말이지 정당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프랑스나 미국 같은 곳에서는 그 어머니들이 자기의 미(美)를 보존하려고 인공영양(人工營養)으로 키우는 일이 많으나 그 영양은 여간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외국의 한 예지만 여기서도 그와 비슷한 실례가 있습니다. 돈 있는 집안에서는 그 어머니의 몸을 위한다고 해서 의례히 유모를 대는 집들이 있는데 이것은 여간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인공모유로 기른 아이와 모유로 기른 아이의 발육의 결과를 비교해본 결과 모유로 자라지 못한 아이는 10센티나 신장이 적을 뿐 아니라 특히 우유로 키우는 데는 여러 가지로 위험성이 따릅니다. 또 영양상에서 오는 해뿐 아니라 어머니와 자식의 그 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정(情)이란 젖을 먹이는데서 우러나는 것이니 이것을 생각할 때 이는 일층 중대한 일인 줄 압니다.
― “애기에게는 어머니 젖이 제일”, 〈조선중앙일보〉, 1936년 2월 24일

 
   



어머니의 일차적인 ‘의무’는 ‘자식’의 양육이지, 자신의 ‘몸’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의 몸이 망가질지라도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모성’이라는 식으로 선전되었다. 내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모유 수유였다. 만약 산모가 모유를 수유하지 못할 경우 유모를 구했는데, 건강한 유모를 구한다고 해도 그 ‘젖의 품질’이 좋지 않다면 허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젖의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머니이건 유모이건 간에 아이를 위해서는 양질의 젖을 ‘생산’해야 됐는데, 이를 위해서는 어머니나 유모나 양질의 영양분을 섭취해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비타민A가 중요한 영양소로 등장한다. 

 

   
 

종래의 영양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단백, 지방, 탄수화물의 삼대 영양소와 무기염류라는 성분을 적당히 배합하여 필요한 열량을 섭취하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 이상의 영양소만으로는 동물이 생장하며 건강을 보전할 수가 업고, 또 다른 무슨 영양소의 부족이 잇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로 고심 연구한 결과, 드디어 발명한 것이 오늘날 세상에서 떠드는 비타민이란 것입니다. (……) 영양상 가장 중요한 것은 비타민A라고 하는데 우리 인류는 비타민A가 없이는 도저히 성장할 수도 없고 생존을 계속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 비타민의 결핍은 생식력에도 많은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젖 먹이는 어머니의 유즙(乳汁) 부족에도 한 원인이 됩니다. 그럼으로 부인의 임신 시기와 젖 먹이는 시기에 있어서는 비타민이 많이 함유된 음식을 먹는 것이 필요합니다.
― D·T·K, “상식 강좌”, 〈별건곤〉, 1928년 2월

 
   



비타민이 만병을 예방하는 일종의 ‘만병통치약’으로 군림한 지는 오래된 일이다. 산모나 유모에게 중요한 영양소, 즉 좋은 젖을 생산하기 위해서 비타민A가 풍부한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어머니이건 유모이건 아이이건 똑같은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생명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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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마 2011-02-28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수퍼맘 컴플렉스야말로 나쁜 환상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두 가지 다 잘하라는 건지, 에휴 ~~ ㅠㅠ

비로그인 2011-04-11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너무 많이 알아버린 영양소들의 과잉섭취가 문제인 세상입니다.

박혜연 2013-01-1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맞아요! 슈퍼맘 컴플렉스 고쳐야죠!
 

 

9. 트랜스 마더, 유모

 

 


젖은 하늘이 주신 음식이요, 젖 먹이는 것은 어머니의 천직이다?! 

 


   
 

사람의 젖으로 양육하는 법을 말하건대 어린 아이에 제일 적당한 식물(食物)은 그 아이 어머니의 젖이다. 이것은 하늘이 주신 식물이다. 어린 아이가 일찍 죽는 이유는 제 어머니의 젖으로 양육되지 못하는데 큰 관계가 있다. 그 증거는 서양과 우리나라의 어린 아이 죽는 수효를 비교하면 서양이 더욱 많다. 서양 사람은 젖을 오래 먹이지 못하므로 우유로 기르는 까닭이다. 서양에도 유모를 대서 기르는 나라는 어린 아이 사망률이 적으나 유모로 기르는 것이 제 어머니 젖으로 기르는 것만 같지 못하다. 우리나라 상등사회의 소아 사망이 하등사회보다 많으니 상등 사람은 아이 어머니가 편안한 것을 취하여 유모를 대서 기르는 까닭이다. 제 어머니 젖을 먹이면 어린 아이만 유익할 뿐 아니라 아이 어머니도 유익하니 음식을 잘 먹으며, 자궁을 오므라지게 하며, 이슬을 속히 거두어 산후에 몸이 속히 회복된다. 산모가 대단한 병이 없으면 친히 젖 먹일 것이다.
― 변옥, “어린 아이 기르는 법”, 〈자선부인회잡지〉, 1908년 8월

 
   

  

모유를 수유하는 것이 아이와 산모 모두에게 좋다는 것은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젖이야말로 하늘이 주신 최고의 음식이라는 것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상류층에서 유모를 고용하는 것은 단지 어머니의 심신이 편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유모를 두는 것은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한 일종의 풍속이었다. 그렇지만 근대 초에 이르러서는 유모를 두는 것이 오히려 육아 환경을 해칠 수 있는 병폐로 지적된 것이다. 산모가 건강하지 못해서 아이에게 젖을 물릴 수 없을 때만 어쩔 수 없이 유모를 두는 것이지, 산모의 건강 상태가 좋은데도 불구하고 유모를 두는 행위는 진정 아이를 위한 길이 아니라는 게 당시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아이에게 어머니의 젖이 최고의 음식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었지만, 모유 수유를 하지 않아서  ‘유아 사망률’이 높다는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근대 초기 계몽 지식인들이 ‘유아 사망률’에 집착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근대 국가가 출산, 출산율, 사망률 등을 따지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한 개인의 탄생이나 죽음 보다 전체 인구의 출산율과 사망률의 관리야 말로 근대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유아 사망률’이 높다는 것은 사회 전체가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다름 아닌 집단적 노동력의 손실이었다. 

 

   
 

아이에게 젖 먹이는 것은 어머니의 젖과 유모의 전과 짐승의 젖과 유분(乳粉) 등이라. 더욱이 생모의 젖을 최고 좋은 것으로 삼나니 하늘이 사람을 만들어 자성(資性)이 온순하고 자혜한 부인의 손에 위탁하고 또 아름답고 좋은 식품을 베푸는 고로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은 실로 천부(天賦)의 직분이라. 이 직분을 다하는 사람은 그 신체가 반드시 강건하고 이 직분은 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신체가 반드시 허약할지라. (……) 어린 아이에게 자신의 젖을 먹이지 않으면 애정이 반드시 부족하여 덕육(德育)  상에 결점이 많을지라. 어머니 된 사람이 어찌 유의치 아니하리오. 천명(天命)의 직책이자 의무로써 이를 방기하지 말지어다. (……) 생모가 만약 부득이한 이유로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못할 때면 마땅히 유모의 체격과 혈통과 연령 등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반드시 신체가 건강하며 성질이 온량(溫良)하며 혈통은 전염될 수 있는 각종 질병이 없으며, 연령은 20세로부터 34, 5세로 정하며 생모의 나이 및 출산한 날과 가급적 차이가 없어야 할지라.
― 김명준, “가정학역술(家政學譯述)”, 〈서우〉, 1907년 3월

 
   



당시 어머니의 ‘천직’이란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일이었다. 만약 자신의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않는 어머니가 있다면 그녀는 천직을 내팽개친 ‘나쁜 어머니’일 뿐이었다. 특히 아이가 친모의 젖을 먹지 못하면 성장 발달이나 덕성에 문제가 생기고, 더 크게는 애정결핍에 빠질 것이라는 논리는 그 전 시대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것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아이의 성장 발달을 위해, 더불어 아이의 최초 ‘스승’의 역할을 위해 유모를 들였다. 그러나 근대 초기에 들어서면 유모의 역할은 축소되어 단순히 ‘젖어멈’에 불과하게 됐으며, 아이의 양육에서 중요한 것은 ‘모성’이었다.

사농공상이란 계급이 타파되고 과부의 개가가 허용되었다고 해서 근대 사회가 전 시대보다 더 좋은 사회라고는 말하기 힘든 일이었다. 근대 사회가 됨으로써 규방으로부터 여성이 해방될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 또한 더 활짝 열렸다고는 하지만, 결혼한 여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근대 사회는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일 뿐이었다. 근대 사회는 여성에게 ‘모성’이라는 ‘천부’의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여성을 더욱더 가정의 울타리 안으로 가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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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na 2011-02-28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진이 너무 슬프네요....

비로그인 2011-04-1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는 요즘 다시 유모가 성행하는 건 아니겠죠?
 

 

9. 트랜스 마더, 유모

 

 


사악한 유방 vs 선한 유방? 

 

1700년대 영국에서 모유 수유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모유를 먹고 자란 아이는 전체 인구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대부분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혹은 보모가 주는 유동식을 먹으며 성장해갔다. 프랑스의 상황은 더했다. 16세기만 해도 유모를 두는 것은 귀족 계층만의 특권이자 관행이었다. 이는 조선 시대와도 비슷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7세기에 이르면 신흥 계급인 부르주아들도 유모를 고용하여 자신들의 자녀를 양육케 했으며,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풍습이 서민 계층까지 퍼져나갔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여성들이 유모를 고용하는 이유는 조선적 풍습과는 조금 달랐다. 조선 시대에 유모를 둔 것은 철저하게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유럽의 여성들 역시 아이를 ‘사랑’했지만, 그들이 유모를 둔 이유는 아이의 건강보다는 자신의 ‘성취욕’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특히 일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직업에 전념하기 위해 유모를 두었으며, 상류층 여성들은 사회적 활동을 좀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 즉 ‘바쁜 사교활동’을 위해 유모를 고용하는 경우가 흔했다. 프랑스의 경우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신생아의 90퍼센트가 유모나 보모의 손에 자랐고, 친모의 손에 양육되는 아이들은 10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유모라는 직업은 때아닌 특수를 누렸다. 1769년 파리에서는 ‘유모국’을 신설하여 유모들이 보수를 ‘선불’로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방안들을 강구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유모의 ‘천국’이었다면, 네덜란드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네덜란드는 17세기 이후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는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부를 획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유모를 배척했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의 의학계와 종교적 권위자들이 모유를 적극 권장했고, ‘젖’은 ‘피’와 같다는 생각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모의 젖’은 ‘이질적인 피’이기에 잘못하면 자녀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보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기질’에서 찾을 수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청결하고 검소하기로 유명했다. 검약한 생활을 중시했던 네덜란드 가정에서 어머니의 남아도는 젖을 아이에게 먹이지 않고 굳이 돈을 들여 유모의 젖을 먹이는 것은 일종의 ‘낭비’였다.

18세기의 끝 무렵에 들어서면 유럽 전역에서 모유 수유를 강조했고, 유모의 양육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들끓는다. 영국의 엄격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젖을 먹이려 하지 않는 어머니는 신의 눈에 가증스러운 존재로 비춰질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유아 사망률의 증가도 유모를 반대하는 원인이 되었다. 나아가 어머니의 유방에서 ‘정치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도 등장했다. 어머니의 유방, 그 유방에서 나오는 ‘건강한 젖’을 통해서 ‘건강한 국민’을 양성할 수 있다는 의견이 등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유방도 두 종류로 분류되었다. 유모의 유방은 ‘부패하고 타락한 유방’으로, 건강한 국가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가족에 존재하는 어머니의 유방은 ‘신성한 유방’으로.

어머니의 모유 수유와 유모의 수유는 아이에게 젖을 먹인다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인 행위를 뛰어 넘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로까지 확산되었다. 이제 여성의 ‘유방’과 ‘젖’은 양육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유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다시 근대 조선의 육아 문제로 넘어가 보자.
  


아이들에게 함부로 뽀뽀하지 말라!

 

1906년 〈가정잡지〉가 창간되었다. 잡지의 제목처럼 ‘가정’의 계몽을 위해 창간된 잡지였지만, 여기서 ‘가정’의 계몽이란 ‘여성’의 계몽과 같은 말이었다. 1908년에는 (고종의 마지막 여인이기도 했던) ‘엄비’가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자선부인회’가 설립되었고 자선부인회에서는 〈자선부인회잡지〉를 내놓았다. 이 두 잡지는 ‘여성의 국민 되기 프로젝트’와 ‘여성의 계몽’에 초점을 두었다. 여성이 해야 할 일이란 ‘가정’을 화목하고 건강하게 지켜내는 일이었다. 지아비를 잘 받들고 자녀를 건강하게 양육하는 것이 여성의 몫이었는데, 이는 조선시대와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정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여성이 근대적인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 즉 서구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국가의 최소 단위인 가정부터 문명화를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정잡지〉의 편집인은 신채호와 주시경이었으며, 〈자선부인회잡지〉의 편집 겸 발행인은 최찬식이었다. 모두 ‘남성들’이 관여한 잡지였지만, 그래도 전보다 많은 여성들이 필자로 참여했다. 이 잡지들에 실린 주요 기사의 내용은 여성교육, 남녀평등, 가정관리, 출산과 육아, 가정 미담 등이었다. 근대를 맞이하여 여성도 이제는 국가와 사회의 주체로서 활동해야 한다는 논조의 내용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음에도 ‘가정 미담’에 실린 내용을 보면 당시 여성의 교육이나 활동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남성들이 바라는 새로운 ‘여성상’이란 어떤 것이었는지도 엿볼 수 있다.     

 

   
 

삼남 최 씨의 아내가 그 시어머니를 봉양할 때, 대단히 늙어 치아가 하나도 없고 근력이 쇠하여 능히 식물(食物)을 먹지 못하는지라. 날마다 그 시어머니 침소에 들어가서 절하고 문안한 후에 어린 아이 젖 먹이듯 하여 하루 몇 번씩이던지 조금도 게으르지 아니하니 노인이 근력이 점점 강녕하여 식물 먹을 때 보다 더 나은지라.
― “시어머니 젖 먹여 봉양한 일”, 〈가정잡지〉, 1906년 8월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젖을 먹여 봉양한다는 것! 이런 상황은 요즘 같아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 남편을 먹여 살렸다는 옛 이야기들은 아름다운 이야기라기보다, 또 여성을 삶의 주체로 파악하기보다는 가정이나 남편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존재로 국한시키는 가부장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미담’일 뿐이다. 시어머니에 대한 ‘효’와 ‘봉양’이 결혼한 여성들의 절대적이고 숭고한 임무라니.

효(孝) 그리고 봉양하는 일 외에도 결혼한 여성에게는 더 많은 의무들이 요구되었다. 남편에게는 온순한 아내이면서, 어머니로서 자혜롭고 ‘충군애국’의 정신을 갖춘 자식을 양육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조선이 근대적인 문명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여성도 근대식 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문명국가의 지식을 습득해야만 했다. 그들이 받은 교육과 습득한 지식이 사용될 곳은 뻔한 곳, 즉 ‘자녀교육’이었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이 귀하다고 흔히 입 맞추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생에 해로운 일이로다. 대저 가래침이란 것은 정결치 못한 것이라. 미균(黴菌)이라 하는 벌레 있기가 쉽고 해소하는 노인은 더욱 이 미균이 많아 어린 아이에게 미균이 전하여 병의 뿌리가 되기 쉬우니 집안의 노인들은 자손이 귀하다고 입을 맞추지 마시오.
― “아이들을 입 맞추지 말 일”, 〈가정잡지〉, 1906년 10월

 
   



어린 아이들에게 충치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가 부모의 충치균이 뽀뽀를 통해 전염된다는 얘기는 오늘날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다. 그런데 뽀뽀를 통해 전염되는 것은 충치균만이 아니었다. ‘미균’은 ‘세균’을 말한다. 뽀뽀를 통해 어른들의 침에 포함된 각종 세균이 아이들에게로 전염될 수 있다는 계몽 지식인들의 위생에 대한 강박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감정은 아니었다. 계몽 지식인들의 입장에서는 사랑한다고 해서, 귀엽다고 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함부로 뽀뽀를 하는 것은 사랑도 애정도 그 무엇도 아닌, ‘위생관념에 반하는 행위’였다. 그것은 무지하고 무식하고 야만적인 행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서구를 통해 들어온 ‘과학’의 ‘객관성’ 앞에 사랑과 애정이 들어설 자리는 턱없이 부족했다. 

 

   
 

오늘은 우리가 또 조선 사람들을 위하여 몸가짐 법을 말하노라. 조선 사람은 항상 길에 다닐 때에 입을 벌리고 다니니 이것은 남이 보기에 매우 어리석어 보이고 또 사람의 몸에 대단히 해로운 것이다. 숨을 입으로 쉬면 공기가 바로 부화[허파]로 들어간즉 여름에는 공기에 각종 먼지와 눈에 보이지 않는 독한 물건이 바로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니 대단히 해롭고, 겨울에는 일기가 차가운즉 공기 속에 독한 생물은 적으나 먼지와 찬 기운이 바로 들어가니 부화에 매우 좋지 않다. (……) 코로 숨을 쉬면 사람의 위생에 대단히 도움이 된다. 첫째 입을 닫으니 보기에 병신처럼 보이지 않는지라. 누구든지 야만국에 가서 보면 야만들은 다 입을 벌리고 다니며, 문명개화한 사람들은 평상시에 입 벌리는 법이 없으니 조선 사람들은 아무쪼록 입을 벌리고 다니지 않기를 바라노라.

길에서 손으로 코를 푸는 것은 대단히 천해 보이니 사람마다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마땅하다. 손가락이나 소매나 옷에다가 코 닦는 것은 세계에서 천한 일이다. 길에서 걸음 걸을 때 조선 사람처럼 갈지자로 걷는 것은 남이 대단히 흉보는 일이다. 부디 갈지자걸음을 걷지 말고, 길에서 침 뱉을 때는 소리 내지 말고 뱉으며, 다닐 때에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어깨를 꼿꼿이 펴며 팔을 자연스럽게 흔들고 조선 활개 치는 법을 없애야 한다. 더구나 관인들이 부축을 받고 다니는 것은 성한 사람이 남에게 병신같이 보이는 것이다. 진짜 병이 없는 사람이 병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첫째 거짓말이니 좋지 않고, 또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목욕을 자주 할수록 몸이 튼튼해지며, 머리는 자주 감을수록 신병이 적은 법이니 조금만 부지런하면 아무라도 이런 것 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를 깨끗이 닦아 입에서 냄새가 나지 않아야 이가 쉽게 상하지 않고, 밤에 잘 때에는 아무리 추운 밤이라도 고개를 내 놓고 있어야 몸에 병이 나지 않는 법이다. 사람마다 매일 무슨 운동을 하든지 적어도 두 시간 동안은 사지를 움직이는 운동을 해야 기혈이 통하여 신체가 강건해지고 생각이 활발하고 정밀해지며 무슨 일이든지 좁고 어리석고 옹색하지 않는 법이다. 오늘 우리가 한 말을 자세히 읽고 주의하여 이대로 실행하면 실행하는 사람에게 큰 이익이 얼마 있지 않아 있을 터이다. 남이 하지 않으니까 하지 않는다든지 남이 하니까 한다는 생각은 영영 없애는 것이 조선이 진보해갈 기초니 우리가 말한 것처럼 몸가짐을 배우는 사람이 장차 생기기를 바라노라.
― “논설”, 〈독립신문〉, 1896년 12월 12일

 
   



문명인이 되는 길은 참으로 쉽지 않다. 현대인은 태어날 때부터 문명인의 교육을 자연스럽게 받으며 자라나지만, 근대 초기 조선 사람들에게 〈독립신문〉의 편집진들이 제시한 ‘행동강령’은 너무나 낯선 방식임에 분명했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아무렇지도 않았던 삶의 습속을 어느 날 갑자기 ‘문명개화’의 슬로건 아래 모두 뜯어 고치라는 계몽 지식인들의 주장에 수긍을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수긍한 사람들이야 자신들이 ‘야만인’으로 불리지 않기 위해서였을 터이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은 계몽 지식인들은 그저 서구의 풍속이 좋은 것으로 선전하는 사대주의자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문명개화’의 당위적 목표 하에 조선인들의 생활 습관은 개혁되어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일종의 ‘문명화 과정’ 속에서 여성들, 특히 ‘어머니’들은 더 큰 부담을 떠안아야만 했다. 어린 아이는 조선의 미래를 이끌어갈 주체였기에, 어린 아이의 교육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미래의 일꾼인 어린 아이들의 생활태도나 건강 상태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역할이 어머니들에게 전적으로 부과된 것이다. 물론 학교 교육을 통해서도 어린이들의 ‘문명화 과정’은 진행되었지만, 일상적 차원에서의 ‘교육’은 당연히 어머니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근대 초기 국가로부터 호명된 ‘어머니’라는 이름이 지니는 무게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도, 여성도 아닌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머니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 아이들의 ‘양육’이었고, 그 중에서도 ‘모유’의 ‘수유’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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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ma 2011-02-20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들에게 뽀뽀하지말라! 재미있네요^^

자음과모음 2011-02-21 17:01   좋아요 0 | URL
충치 많은 아이가 어려서 사랑받은 아이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썪은 이가 애정의 증거라니, 아이러니합니다 :)

비로그인 2011-04-11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서양에서는 모유를 정기적으로 마셔서 암을 치료한다네요.

박혜연 2011-09-23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8세기중반만해도 유럽권에서 태어난 아기들 가운데 유모손에서 자란 아기들은 무려 90%나 되었고 친모손에서 자란 아기들은 고작 10%였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할수밖에요!

박혜연 2013-01-19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나라도 20세기전반까지는 부유층일 경우 유모를 반드시 고용했고 교육이나 양육도 유모가 다 했어요! 뭐 현재도 정재계인사집안의 자녀들 역시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으니깐요!
 

 

9. 트랜스 마더, 유모

 

 


요적(妖賊) 유모를 처단하시옵소서
 


정조가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린 것은 1787년 2월 21일이었다. 상소를 올린 사람은 유생 황득중(黃得中)이었다. 그러나 황득중 혼자만의 상소는 아니었다. 황득중은 소두(疏頭: 연명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였으며, 연명한 선비만 921명에 이르렀다. 그러니 이 상소는 922명의 한결같은 의견인 셈이었다. 이 922명이 힘을 모아 정조에게 상소를 올린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난 임인년(1782년 정조 6년) 가을 문효세자(文孝世子)가 탄생한 이후로 영원히 이어질 나라의 무궁한 아름다움을 맡길 곳이 있음을 기뻐하였는데, 홍역을 순하게 치러 경사를 반포한 끝에 갑자기 훙서(薨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피 울었으나, 밤낮으로 간절히 빌었던 것은 오히려 후사(後嗣)의 탄생에 있었습니다. 9월에 의빈(宜嬪)이 졸한 상변(喪變)은 또 어찌 그리 가혹하단 말입니까. 중외(中外)가 놀라 통곡하고 모두의 말이 시끄럽게 들끓으면서 약을 잘못 쓴 역적 의관(醫官)과 젖을 끊은 요적(妖賊) 유모(乳母)에게 죄를 돌리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궐의 일은 비밀스럽고 초야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자세한 내막을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삼가 자전의 전교 가운데 ‘전후의 상변은 증상이 괴이했다.[前後喪變 症形怪底]’는 여덟 자를 본 뒤에야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두들 눈물을 훔치고 이를 갈며 큰소리로 외치며 일어나 말하기를, ‘애통하다. 우리 세자의 상변은 진실로 하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의 짓이다. 앞으로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을 거의 시원하게 씻을 수 있겠구나.’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록 시간만 끌어 끝내 한 번도 조사해 밝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극악한 역적들이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가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아, 의관으로 하여금 약을 잘못 쓰게 하고 유모로 하여금 젖을 끊게 한 자는 자연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용렬한 의원에게 맡기는 것도 오히려 불효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역적 의관에게 맡긴 자야 말할 것이 있겠으며, 약을 맛보지 않은 것도 오히려 임금을 시해했다고 하는데 더구나 독약을 투여한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여기에 있고 조사할 만한 자취도 여기에 있습니다. 심지어 ‘후일을 고려했다.’는 공초와 ‘나라의 경사를 칭송하지 않았다.’는 말은 모두 국문할 만하고 조사할 만한 증안(證案)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전하께서는 매번 ‘확실한 것이 없다.[無的]’는 두 글자로, 조사하여 밝히기 어렵다고 핑계를 대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삼사(三司)의 청을 윤허하시어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풀어 주소서.
―〈일성록〉, 정조 11년 2월 21일.

 
   



문효세자는 1782년 9월 7일에 태어나 1786년 5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짧은 생애였다.  

  

 

정치권력을 좇는 사람들에게 왕세자의 죽음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왕세자의 죽음이 요절일 경우에는 언제나 ‘음모론’이 횡횡한다. 문효세자의 공식 사인은 홍역이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왕세자의 사인을 홍역이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언가 음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함부로 발설하지는 못하지만 왕세자의 죽음 뒤에는 정순왕후가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허나 진실은 알 수가 없었다. 진실을 알 수 없기에 언관들과 유생들은 의관과 유모를 심문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상소를 올렸다. 유생들의 상소는 왕세자가 죽은 이후부터 1790년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언관들과 유생들의 들끓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대답은 매번 단호했다. 정조가 말하길, “번거롭게 하지 말고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왕세자가 죽었으니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런데 유생들은 왜 하필이면 의관과 유모를 지목했을까. 유생들이 의관을 왕세자의 죽음에 연루시킨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의관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왕세자의 몸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약을 처방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누군가의 사주가 아니라 단순한 ‘의료 사고’였을 수도 있다. 의관이 왕세자의 주치의였으니, 왕세자의 죽음과 의관의 치료 행위가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유모는 무슨 죄인가?

유모의 죄는 왕세자에게 ‘충분히’ 젖을 먹이지 않은 것이었다. 젖을 먹이긴 먹였는데, 너무 일찍 젖을 끊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보통 궁중의 법도나 일반 사대부가에서 어린 아이는 무려 일곱 살 까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란다. 문효세자의 경우 다섯 살에 요절했으니 그 기간이 짧기도 했지만, 죽기 직전에도 유모의 젖을 먹지 못했다. 물론 이는 의관들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유생들은 이를 문제 삼았다. 왜 유모는 왕세자에게 젖을 주지 않았던 것이며, 의관들은 유모가 왕세자에게 젖을 물리는 것을 금지했을까. 왜 유생들은 ‘젖어멈’ 유모가 왕세자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왜 정조는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유모를 감쌌던 것일까.

 

어린 왕세자가 술에 취하다


세손의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영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리디어린 세손이 벌써 술을 마시는 것일까.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술을 배우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리는 없었다.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세손이 설마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문제는 유모였다. 세손의 유모는 술을 즐겼다. 요새 말로 하면 세손의 유모는 ‘알코올중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유모의 젖을 먹은 세손의 옷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가와 사대부가에서는 유모를 고를 때 매우 신중했다. 친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거나 젖이 부족해서 유모를 들이는 것이 아니라 유모에 의한 아이의 양육은 상류 계급의 풍습이자 문화였다. 유모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인품 또한 후덕해야만 했다. 아이는 젖을 물리는 ‘젖어멈’을 친어머니처럼 여기며, 아이는 젖어멈의 품성을 그대로 닮는다는 게 당시 사람들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때문에 유모를 선발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을 길이 보전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유모는 아이의 젖어멈이자 최초의 스승이었다. 그래서 왕가의 유모 선발 기준은 더욱 엄격하고 까다로웠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조의 유모는 술을 너무 즐겼다. 건강 상태가 좋고 인품이 후덕함을 인정받아 뽑힌 유모가 알고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술을 즐긴다는 것이 영조로서는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유모가 술을 즐긴다면 유모를 바꾸면 그만인데 영조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 번 선택된 유모를 바꾸는 것이 아이의 건강과 인성 발달에 좋지 않다는 믿음이 강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모는 결코 하찮은 ‘직업’이 아니었다. 유모를 바꾸는 것은 곧 아이의 운명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일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의 유모는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는 종1품 벼슬을 받았다. 왕비가 왕자를 낳기는 했지만, 왕자를 기르는 것은 유모의 책임이었다. 즉 훗날 ‘왕’이 될 사람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것이 유모였고, 왕자가 건강하게 자라서 왕이 된다면 그 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그만큼 유모의 지위는 높았고, 왕자의 보양과 장래를 위해 유모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영조 역시 유모가 술을 즐기는 것을 언짢아하면서도 차마 유모를 내치지 못했다. 오히려 영조는 유모가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참조하여 왕자의 건강을 면밀히 진단하라고 의관들에게 명을 내렸다. 이를 보면 유모의 지위와 유모가 누린 권위를 짐작할 만하다.

유모가 아이의 건강과 보양에 직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물론 그들의 일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유모가 ‘젖’을 먹이는 것만으로 유모의 역할을 다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얘기했지만 유모의 품성을 통한 아이의 교육 또한 중요한 임무였다. 아이의 보양과 함께 아이의 교육도 중요했지만, 유모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유모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병에 걸린 아이를 ‘치료’하는 임무였다. 그렇다고 유모가 ‘의사’ 노릇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상이 수정전(修政殿)에 나갔다. 약방이 입진하였다. 이때 입시한 도제조 홍순목, 제조 이호준, 부제조 민영목, 직각 김영철, 가주서 조충희, 기사관 이명재ㆍ김우균이 차례로 나아가 엎드리고, 의관 이경년ㆍ최성협ㆍ이기철ㆍ정즙(鄭楫)이 차례로 기둥 밖에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홍순목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첫겨울의 날씨가 많이 음산한데 이런 때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
홍순목이 아뢰기를,
“중궁전의 기후는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순하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신이 의관의 말을 들으니, 세자께서 요즈음 설사 증세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태평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은 쾌차하지 않았다.”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기름기가 있는 음식을 먹으면 체하게 되고, 유도(乳度)가 혹 조화되지 못하면 이런 증세가 쉽게 생기게 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증세에 따른 투약(投藥)을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대개 이런 병은 설사가 그치면 낫게 마련이니 약을 많이 써서는 안 되며, 아무리 좋은 보제(補劑)라도 갑자기 써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증세에 따른 약은 이미 2첩을 썼다.”
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
“가장 좋은 것은 유도를 잘 조화시키는 것입니다. 유모에게 만약 습냉(濕冷) 등의 잡병(雜病)이 있으면 약을 먹여 치료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래서 근래에 유모에게 약을 먹게 하고 있다.”
하였다.
― 〈국역승정원일기〉, 고종 12년(1875년) 10월 10일.

 
   



유모의 잔병이 아이에게로 전염되지 않기 위해서 유모의 건강을 체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가 병에 걸리면 유모의 역할은 더욱 막중했는데,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아이에게 약을 직접 투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병에 걸리면 그 치료약을 유모에게 먹인다. 그러면 아이는 유모의 젖을 통해 치료약을 간접적으로 복용하게 되었다. 유모의 유두와 젖은 일종의 의료 기구이자 의약품이 되는 셈이었다. 문효세자의 병치레 때문에 정조가 근심했던 것은 자신의 귀한 아들의 병만이 아니었다. 정조는 ‘유모’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세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유모가 건강해야만 했는데, 유모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왕세자의 치료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문효세자의 유모가 의관들의 명에 따라 세자에게 젖을 먹이지 않은 것은 그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를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무수한 상소에도 불구하고 유모를 심문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가나 사대부가나 유모는 왕실과 가문을 지탱해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왕가의 유모일 경우에는 유모의 자식이나 남편을 면천(免賤)해 주는 경우도 많았으며, 많은 은사(恩賜)를 하사하기도 했다. 또한 사대부가에서는 신부의 예단 품목에 유모의 예단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문신이자 당대의 이름난 학자였던 택당 이식(李植)은 유훈을 남겼다. 그 중 하나가 유모의 묘에 1년에 두 번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유모는 왕가나 사대부가에서는 꼭 필요한 존재이자 특별 대우를 받았던 직업이었다. 전문적인 유모는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현상도, 한국만의 풍습도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유모를 통한 아이 양육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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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ciel 2011-02-20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술에 취한 왕세자와 알콜 중독 유모! 흥미진진합니다 ㅋㅋ

자음과모음 2011-02-21 17:03   좋아요 0 | URL
알코올 중독이라니, 정말 간 큰(?) 유모ㅎ

비로그인 2011-04-11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미 젖이 중요하다면서 천한 신분의 사람의 젖을 먹이다니, 소젖을 먹이는 것 보다 조금 낫다.

박혜연 2011-08-10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맞아요! 근대이전의 아기들은 어머니보다는 젖어머니로 불러진 유모들의 손에서 자라는건 당연시 할정도였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