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유방 vs 선한 유방?
1700년대 영국에서 모유 수유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모유를 먹고 자란 아이는 전체 인구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대부분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혹은 보모가 주는 유동식을 먹으며 성장해갔다. 프랑스의 상황은 더했다. 16세기만 해도 유모를 두는 것은 귀족 계층만의 특권이자 관행이었다. 이는 조선 시대와도 비슷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7세기에 이르면 신흥 계급인 부르주아들도 유모를 고용하여 자신들의 자녀를 양육케 했으며,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풍습이 서민 계층까지 퍼져나갔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여성들이 유모를 고용하는 이유는 조선적 풍습과는 조금 달랐다. 조선 시대에 유모를 둔 것은 철저하게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유럽의 여성들 역시 아이를 ‘사랑’했지만, 그들이 유모를 둔 이유는 아이의 건강보다는 자신의 ‘성취욕’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특히 일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직업에 전념하기 위해 유모를 두었으며, 상류층 여성들은 사회적 활동을 좀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 즉 ‘바쁜 사교활동’을 위해 유모를 고용하는 경우가 흔했다. 프랑스의 경우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신생아의 90퍼센트가 유모나 보모의 손에 자랐고, 친모의 손에 양육되는 아이들은 10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유모라는 직업은 때아닌 특수를 누렸다. 1769년 파리에서는 ‘유모국’을 신설하여 유모들이 보수를 ‘선불’로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방안들을 강구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유모의 ‘천국’이었다면, 네덜란드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네덜란드는 17세기 이후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는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부를 획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유모를 배척했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의 의학계와 종교적 권위자들이 모유를 적극 권장했고, ‘젖’은 ‘피’와 같다는 생각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모의 젖’은 ‘이질적인 피’이기에 잘못하면 자녀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보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기질’에서 찾을 수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청결하고 검소하기로 유명했다. 검약한 생활을 중시했던 네덜란드 가정에서 어머니의 남아도는 젖을 아이에게 먹이지 않고 굳이 돈을 들여 유모의 젖을 먹이는 것은 일종의 ‘낭비’였다.
18세기의 끝 무렵에 들어서면 유럽 전역에서 모유 수유를 강조했고, 유모의 양육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들끓는다. 영국의 엄격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젖을 먹이려 하지 않는 어머니는 신의 눈에 가증스러운 존재로 비춰질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유아 사망률의 증가도 유모를 반대하는 원인이 되었다. 나아가 어머니의 유방에서 ‘정치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도 등장했다. 어머니의 유방, 그 유방에서 나오는 ‘건강한 젖’을 통해서 ‘건강한 국민’을 양성할 수 있다는 의견이 등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유방도 두 종류로 분류되었다. 유모의 유방은 ‘부패하고 타락한 유방’으로, 건강한 국가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가족에 존재하는 어머니의 유방은 ‘신성한 유방’으로.
어머니의 모유 수유와 유모의 수유는 아이에게 젖을 먹인다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인 행위를 뛰어 넘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로까지 확산되었다. 이제 여성의 ‘유방’과 ‘젖’은 양육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유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다시 근대 조선의 육아 문제로 넘어가 보자.
아이들에게 함부로 뽀뽀하지 말라!
1906년 〈가정잡지〉가 창간되었다. 잡지의 제목처럼 ‘가정’의 계몽을 위해 창간된 잡지였지만, 여기서 ‘가정’의 계몽이란 ‘여성’의 계몽과 같은 말이었다. 1908년에는 (고종의 마지막 여인이기도 했던) ‘엄비’가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자선부인회’가 설립되었고 자선부인회에서는 〈자선부인회잡지〉를 내놓았다. 이 두 잡지는 ‘여성의 국민 되기 프로젝트’와 ‘여성의 계몽’에 초점을 두었다. 여성이 해야 할 일이란 ‘가정’을 화목하고 건강하게 지켜내는 일이었다. 지아비를 잘 받들고 자녀를 건강하게 양육하는 것이 여성의 몫이었는데, 이는 조선시대와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정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여성이 근대적인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 즉 서구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국가의 최소 단위인 가정부터 문명화를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정잡지〉의 편집인은 신채호와 주시경이었으며, 〈자선부인회잡지〉의 편집 겸 발행인은 최찬식이었다. 모두 ‘남성들’이 관여한 잡지였지만, 그래도 전보다 많은 여성들이 필자로 참여했다. 이 잡지들에 실린 주요 기사의 내용은 여성교육, 남녀평등, 가정관리, 출산과 육아, 가정 미담 등이었다. 근대를 맞이하여 여성도 이제는 국가와 사회의 주체로서 활동해야 한다는 논조의 내용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음에도 ‘가정 미담’에 실린 내용을 보면 당시 여성의 교육이나 활동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남성들이 바라는 새로운 ‘여성상’이란 어떤 것이었는지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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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 최 씨의 아내가 그 시어머니를 봉양할 때, 대단히 늙어 치아가 하나도 없고 근력이 쇠하여 능히 식물(食物)을 먹지 못하는지라. 날마다 그 시어머니 침소에 들어가서 절하고 문안한 후에 어린 아이 젖 먹이듯 하여 하루 몇 번씩이던지 조금도 게으르지 아니하니 노인이 근력이 점점 강녕하여 식물 먹을 때 보다 더 나은지라.
― “시어머니 젖 먹여 봉양한 일”, 〈가정잡지〉, 19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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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젖을 먹여 봉양한다는 것! 이런 상황은 요즘 같아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 남편을 먹여 살렸다는 옛 이야기들은 아름다운 이야기라기보다, 또 여성을 삶의 주체로 파악하기보다는 가정이나 남편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존재로 국한시키는 가부장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미담’일 뿐이다. 시어머니에 대한 ‘효’와 ‘봉양’이 결혼한 여성들의 절대적이고 숭고한 임무라니.
효(孝) 그리고 봉양하는 일 외에도 결혼한 여성에게는 더 많은 의무들이 요구되었다. 남편에게는 온순한 아내이면서, 어머니로서 자혜롭고 ‘충군애국’의 정신을 갖춘 자식을 양육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조선이 근대적인 문명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여성도 근대식 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문명국가의 지식을 습득해야만 했다. 그들이 받은 교육과 습득한 지식이 사용될 곳은 뻔한 곳, 즉 ‘자녀교육’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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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이 귀하다고 흔히 입 맞추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생에 해로운 일이로다. 대저 가래침이란 것은 정결치 못한 것이라. 미균(黴菌)이라 하는 벌레 있기가 쉽고 해소하는 노인은 더욱 이 미균이 많아 어린 아이에게 미균이 전하여 병의 뿌리가 되기 쉬우니 집안의 노인들은 자손이 귀하다고 입을 맞추지 마시오.
― “아이들을 입 맞추지 말 일”, 〈가정잡지〉, 19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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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들에게 충치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가 부모의 충치균이 뽀뽀를 통해 전염된다는 얘기는 오늘날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다. 그런데 뽀뽀를 통해 전염되는 것은 충치균만이 아니었다. ‘미균’은 ‘세균’을 말한다. 뽀뽀를 통해 어른들의 침에 포함된 각종 세균이 아이들에게로 전염될 수 있다는 계몽 지식인들의 위생에 대한 강박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감정은 아니었다. 계몽 지식인들의 입장에서는 사랑한다고 해서, 귀엽다고 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함부로 뽀뽀를 하는 것은 사랑도 애정도 그 무엇도 아닌, ‘위생관념에 반하는 행위’였다. 그것은 무지하고 무식하고 야만적인 행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서구를 통해 들어온 ‘과학’의 ‘객관성’ 앞에 사랑과 애정이 들어설 자리는 턱없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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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가 또 조선 사람들을 위하여 몸가짐 법을 말하노라. 조선 사람은 항상 길에 다닐 때에 입을 벌리고 다니니 이것은 남이 보기에 매우 어리석어 보이고 또 사람의 몸에 대단히 해로운 것이다. 숨을 입으로 쉬면 공기가 바로 부화[허파]로 들어간즉 여름에는 공기에 각종 먼지와 눈에 보이지 않는 독한 물건이 바로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니 대단히 해롭고, 겨울에는 일기가 차가운즉 공기 속에 독한 생물은 적으나 먼지와 찬 기운이 바로 들어가니 부화에 매우 좋지 않다. (……) 코로 숨을 쉬면 사람의 위생에 대단히 도움이 된다. 첫째 입을 닫으니 보기에 병신처럼 보이지 않는지라. 누구든지 야만국에 가서 보면 야만들은 다 입을 벌리고 다니며, 문명개화한 사람들은 평상시에 입 벌리는 법이 없으니 조선 사람들은 아무쪼록 입을 벌리고 다니지 않기를 바라노라.
길에서 손으로 코를 푸는 것은 대단히 천해 보이니 사람마다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마땅하다. 손가락이나 소매나 옷에다가 코 닦는 것은 세계에서 천한 일이다. 길에서 걸음 걸을 때 조선 사람처럼 갈지자로 걷는 것은 남이 대단히 흉보는 일이다. 부디 갈지자걸음을 걷지 말고, 길에서 침 뱉을 때는 소리 내지 말고 뱉으며, 다닐 때에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어깨를 꼿꼿이 펴며 팔을 자연스럽게 흔들고 조선 활개 치는 법을 없애야 한다. 더구나 관인들이 부축을 받고 다니는 것은 성한 사람이 남에게 병신같이 보이는 것이다. 진짜 병이 없는 사람이 병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첫째 거짓말이니 좋지 않고, 또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목욕을 자주 할수록 몸이 튼튼해지며, 머리는 자주 감을수록 신병이 적은 법이니 조금만 부지런하면 아무라도 이런 것 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를 깨끗이 닦아 입에서 냄새가 나지 않아야 이가 쉽게 상하지 않고, 밤에 잘 때에는 아무리 추운 밤이라도 고개를 내 놓고 있어야 몸에 병이 나지 않는 법이다. 사람마다 매일 무슨 운동을 하든지 적어도 두 시간 동안은 사지를 움직이는 운동을 해야 기혈이 통하여 신체가 강건해지고 생각이 활발하고 정밀해지며 무슨 일이든지 좁고 어리석고 옹색하지 않는 법이다. 오늘 우리가 한 말을 자세히 읽고 주의하여 이대로 실행하면 실행하는 사람에게 큰 이익이 얼마 있지 않아 있을 터이다. 남이 하지 않으니까 하지 않는다든지 남이 하니까 한다는 생각은 영영 없애는 것이 조선이 진보해갈 기초니 우리가 말한 것처럼 몸가짐을 배우는 사람이 장차 생기기를 바라노라.
― “논설”, 〈독립신문〉, 1896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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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인이 되는 길은 참으로 쉽지 않다. 현대인은 태어날 때부터 문명인의 교육을 자연스럽게 받으며 자라나지만, 근대 초기 조선 사람들에게 〈독립신문〉의 편집진들이 제시한 ‘행동강령’은 너무나 낯선 방식임에 분명했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아무렇지도 않았던 삶의 습속을 어느 날 갑자기 ‘문명개화’의 슬로건 아래 모두 뜯어 고치라는 계몽 지식인들의 주장에 수긍을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수긍한 사람들이야 자신들이 ‘야만인’으로 불리지 않기 위해서였을 터이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은 계몽 지식인들은 그저 서구의 풍속이 좋은 것으로 선전하는 사대주의자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문명개화’의 당위적 목표 하에 조선인들의 생활 습관은 개혁되어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일종의 ‘문명화 과정’ 속에서 여성들, 특히 ‘어머니’들은 더 큰 부담을 떠안아야만 했다. 어린 아이는 조선의 미래를 이끌어갈 주체였기에, 어린 아이의 교육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미래의 일꾼인 어린 아이들의 생활태도나 건강 상태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역할이 어머니들에게 전적으로 부과된 것이다. 물론 학교 교육을 통해서도 어린이들의 ‘문명화 과정’은 진행되었지만, 일상적 차원에서의 ‘교육’은 당연히 어머니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근대 초기 국가로부터 호명된 ‘어머니’라는 이름이 지니는 무게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도, 여성도 아닌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머니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 아이들의 ‘양육’이었고, 그 중에서도 ‘모유’의 ‘수유’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