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만약 백만 원이 생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누구에게는 한 달 월급이며, 누구에게는 가까운 외국을 여행할 수 있는 여행 자금이자, 누구에게는 하룻밤에 탕진할 만한 유흥비이고, 누구에게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금액일 수 있는 ‘백만 원’. 아무리 ‘백만 원’의 가치가 떨어진 오늘날이래도 백만 원이 생긴다면 어떻게 써야 할지 머뭇거리게 된다. 최신식 노트북? 아니면 동남아 여행? 우리는 어떻게 돈을 쓸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돈을 벌고, 절약하고, 모을까에 집착하기 일쑤다.
1933년 6월 〈별건곤〉에서 설문 조사를 시행했다. 제목은 “백만 원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쓸까?―백만 원 모르는 그들”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과연 어떤 대답을 내놓았을까. 나처럼 쉽게 답을 하지 못했을까. 그렇다. 그들도 백만 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인들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은 백만 원이란 돈이 어정쩡한 액수여서가 아니었다. 1930년대 백만 원은 지금 우리가 아는 백만 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백만 원이면 지금 돈으로 약 ‘백억’에 육박하는 액수였다. 요즘이야 하도 ‘억, 억’ 하니 그래도 들어는 보았을 돈이지만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백만 원(백억)’이란 돈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액수였다. 그러니 기사 제목도 ‘백만 원 모르는 그들’이라고 했지 않았겠는가.

기자의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었을까.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돈, 상상만이라도 해보라는 뜻에서였을까. 하필이면 당시 최하층민이었던 ‘인력거꾼’ ‘이 서방’에게도 같은 질문이 던져진다. 기자의 질문에 이 서방은 어이가 없었다. 이 서방은 기자가 분명 미친놈이거나 정신병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자가, 진짜 돈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만약 있다면 어디에 쓸 거냐고 자꾸 채근하자 그때서야 이 서방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과연 인력거꾼 이 서방은 백만 원을 어디에 쓸 것인가.
기상천외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 서방은 백만 원이 생기면 경성에 있는 자동차를 모두 사들인 다음 그 자동차를 부숴버리겠다고 말했다. 자동차를 죄다 사겠다는 것이야 이해를 할 만하지만, 그것을 산 뒤 모두 부숴버리겠다는 인력거꾼 이 서방의 대답에 기자는 당혹스러웠다. 인력거꾼 이 서방은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당시 백만 원이면 팔자를 수십 번 고치고도 남을 만한 돈인데, 하필이면 이 서방은 왜 그렇게 대답을 해야만 했을까?
‘우리’에겐 인력거가 있다!
교통 기관의 발달은 곧 그 나라의 경제적 수준을 알 수 있는 지표다. 고속도로가 깔리고 KTX, 신칸센, 테제베 같은 고속철도가 놓인 나라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않은 나라는 드물다. 철도와 자동차와 같은 교통 기관의 발달은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는 근대의 발명품이자 근대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조선보다 몇십 년 앞서 서구식 근대화를 받아들였던 일본은 서구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야말로 근대화의 핵심이라고 여겼다. 서구에서 발명한 철도와 군함, 전등과 같은 신문물을 들여와 이를 바탕으로 기술력을 키워나간 일본은 또한 벽돌 거리를 조성하는 등 도시의 도로망을 정비해가면서 서구 따라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일본의 서구 문명에 대한 콤플렉스는 깊어만 갔다.
일본은 자국을 서구와 같은 문명개화한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변화의 원동력은 모두 서구에서 수입한 선진 기술이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서구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본 스스로 개발한 ‘근대 최대의 발명품’이 생겨났다. 바로 인력거였다. 인력거는 일본 메이지 시대(1868∼1912)에 등장한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일본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일본의 자랑거리였다.

메이지 초기만 해도 아직까지 교통망과 통신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일본은 도로를 정비하고 주택을 개량하는 등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편리한’ 도시 정비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프랑스의 파리나 영국의 런던과 같은 도시를 그들도 건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도시 정비 사업을 시행했지만 그 속도가 아주 빠르지는 않아 여전히 좁은 골목들이 많았다. 일본 사람들은 이 좁은 길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으며,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인력거를 개발한 것에 엄청난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1870년부터 상용화하기 시작한 인력거의 종류는 다양했다. 일인승과 이인승이 있었으며, 바퀴에 따라 두 바퀴 인력거, 세 바퀴 인력거, 네 바퀴 인력거가 있었다. 인력거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부의 상징이었다. 부자들은 금가루와 은가루 및 칠기로 화려하게 장식한 인력거를 주문 제작했는데, 이는 인력거의 ‘위용’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인력거는 일본 내에서만 사용된 교통수단은 아니었다. 1885년 일본인 최대의 발명품인 인력거는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유럽 지역에 근대의 후발 주자이자, 한때 ‘야만인’으로 불렸던 일본인이 만든 교통수단이 수출된 것이다. 이후 인력거는 아시아 및 아프리카 등지에도 수출되었으며, 일본인이 만들어낸 이 발명품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인력거가 등장하자 ‘차부(車夫)’, 즉 인력거꾼이 생겼다. 일본의 발명품인 인력거는 조선에도 수출되었고, 대한제국 정부의 고위 관료나 부자들이 이용했다. 1890년대 조선 사람들은 인력거를 개화된 세상을 상징하는 ‘모던’한 교통수단으로 받아들였다. 인력거가 조선에 처음 유입되었을 때 조선인들은 이를 사람의 힘으로 끈다고 해서 완차(腕車) 또는 만차(挽車)라고 불렀다. 1894년 일본인 하나야마(花山帳場)가 영락정(永樂町)에 인력거 회사를 차리고 영업을 시작했는데, 운행된 인력거는 10대였으며 인력거꾼은 일본인이었다.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일본의 발명품을 반겼다. 그들은 ‘구시대’의 유물인 가마를 버리고 인력거를 선택했다.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인력거를 애용했고, ‘개화풍’을 맞은 사람들이라면 으레 인력거를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선택했다. 인력거의 수요가 증가하자 조선에서도 마침내 자체적으로 인력거를 제작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07년 ‘동창사’라는 회사에서 일본의 인력거에 맞서 ‘조선 인력거’를 제작하겠다고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