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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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문학이 참 좋다. 책만 봐도 내 마음을 들어 올렸다 내려놨다 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단련시키면서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청소년 성장소설로 분류된 책인 줄 모르고 읽었는데, 책을 읽고 난 후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지만 아직 완전한 인간이라고 부르기에는 미성숙한 청소년기의 학생들. 사랑을 갈구하고, (요새 아이들 말로는 관종이라고 하는)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고, 자기 자신 밖에 모르기도 하고, 그럼에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 내 주변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어른일까, 그 아이들이 성장하는데 도움을 줄까, 상처를 줄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혹시 부작용이 있는 것은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성장소설이라고 해서 청소년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분명 인간은 어른이 되어도 성장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을 통해 윤재와 곤이처럼 나도 성장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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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 넘어진 듯 보여도 천천히 걸어가는 중
송은정 지음 / 효형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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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닮은 책
나에게

회사 그만두고 유학을 갑니다
<정유진>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송은정>



  책 제목이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회사 그만두고 유학을 갑니다」 사람 사이의 만남뿐만 아니라 책과 사람 사이에도 타이밍과 궁합이 있다고 믿는 나. 나의 희망사항을 어쩜 이리 제목으로 잘 뽑았을까 싶었다. 깔끔한 제목처럼 책의 외관도, 내용도 담백했다. (이하 회사)


  그리고 우연히 눈에 띈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운명처럼 두 책을 동시에 만났다.(고 생각한다.) (이하 책방) '회사' 책을 덮자마자 '책방' 책을 열었다. 공교롭게도 두 책은 나에게 묘하게 닮은 책으로 다가왔다.


  묘하게 닮았다고 느낀 점,

1. 무겁지 않은 질감의 속지, 이름은 모르겠다.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보면 '고급스러운 갱지'랄까.

2. '회사' 책을 읽으며 독특하다고 느낀 '왼쪽 정렬', 그런데 '책방' 책도 '왼쪽 정렬', 그래서 나도 따라 해본다. 이 포스팅도 '왼쪽 정렬'

3. 월급을 거부한 용기,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이전과는 다른 경제적 압박, 그럼에도 불구하고......

4. 누군가는 동경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

5. 그리고 계속 진행 중인 그들의 선택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나는 10년째 진로 고민 중이다. 중고등학생이던 시절보다 더 심각한 진로 고민이다. 정확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잘 알지만, 선뜻 선택을 하지 못했다. 두 저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속된 말로 지르지 못한 것이다. 무언가 준비가 되어야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여전히 행동이 따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고민 중이다.

  오늘 나는 하루 종일 직장에서 에너지를 1도 쓰지 않았다. 오전에는 잠이 깨지 않아 커피를 마셔야 했고, 영혼 없이 나의 할 일을 마쳤다. 점심시간은 입맛에 맞지 않은 밥을 깨작깨작 먹었다. 오후는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퇴근 직전 있었던 회의 역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회의가 길어질까 봐 필요한 말만 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퇴근을 하는데 마치 하루 종일 헬멧을 쓰고 있었던 것처럼 머리가 무거웠다. 지끈거렸다. 집에 와서 눕고 싶었는데 오늘 시작하는 취미 생활이 있어서 비를 뚫고,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 저녁 시간 틈틈이 '책방' 책을 읽었다. 하루 종일 헬멧을 쓰고 있다가 퇴근 후 벗어던졌다면, 자정을 넘긴 지금 이 시간, 곯아떨어져야 하는데. 나는 맑은 정신과 초롱초롱한 눈으로 러시아 월드컵 경기도 보고, 두 권의 책에 대해 사색도 하고, 이렇게 독후감도 쓰고 있다. 


  두 사람의 선택이 내가 원하는 삶과 똑같이 닮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답게 사는 법'을 고민하고, 선택하고, 또 선택하는 행동은 막연하게 행복하게 사는 게 삶의 목표였던 나를 깨우쳐 준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일까? 나에게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가장 좋아하는 대한민국 헌법 조항이 '행복추구권'  제10조라고 잘난 척했던 나였는데,

행복이라는 종착지는 없구나. 인생 자체가 선택의 연속일 뿐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해야만 하는 과제는 처음부터 없었다. 행복을 위해 투자한 게 많다고 느낄수록 기준은 올라가고 만족도는 떨어졌다.
<회사, 99쪽>

나를 꿈에 부풀게 한 이 모든 풍경이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의 시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디에도 영원한 저곳은 없었다. 지금의 이 흥분도 시간과 함께 퇴색할 예정이었다. 저곳은 다시 '이곳'이 되어 나를 낙담케 하겠지.
<책방, 126쪽>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은 기어코 나를 코너에 몰아세웠다.
<책방, 160쪽>

 

 

정확히 하고 싶은 것을 실행하지 않으면서 행복을 꿈꾸던 나. 최선이 아니라면 차악이라도 선택하는 삶은 어떨까. <회사>에서 말하는 '감당할만한 고통을 선택하는 삶', <책방>에서 말하는 '오답을 걸러내는 삶' 나에게 묘하게 닮았다고 다가오는 지점이다.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책이 조금 다른 점은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회사>와 <책방>은 1차로 퇴사 후 독립을 했고, <책방>은 2차로 폐업(잠정적 휴식기)을 결정했다는 점이 책의 마무리에서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인생에서 선택과 선택을 거듭하고 있는 것 같다. 감당할만한 고통을 선택하고, 선택한 인생의 오답을 걸러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회사>와 <책방> 이후의 삶이 궁금해진다. 대리만족일 수도 있다. 아니면 지금 이후의 내 삶이 궁금해지는 선택을 할 용기가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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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그만두고 유학을 갑니다 - 퇴사하고 떠나는 서른 살의 미술 유학
정유진 지음 / 북노마드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묘하게 닮은 책
나에게

회사 그만두고 유학을 갑니다
<정유진>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송은정>



  책 제목이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회사 그만두고 유학을 갑니다」 사람 사이의 만남뿐만 아니라 책과 사람 사이에도 타이밍과 궁합이 있다고 믿는 나. 나의 희망사항을 어쩜 이리 제목으로 잘 뽑았을까 싶었다. 깔끔한 제목처럼 책의 외관도, 내용도 담백했다. (이하 회사)


  그리고 우연히 눈에 띈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운명처럼 두 책을 동시에 만났다.(고 생각한다.) (이하 책방) '회사' 책을 덮자마자 '책방' 책을 열었다. 공교롭게도 두 책은 나에게 묘하게 닮은 책으로 다가왔다.


  묘하게 닮았다고 느낀 점,

1. 무겁지 않은 질감의 속지, 이름은 모르겠다.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보면 '고급스러운 갱지'랄까.

2. '회사' 책을 읽으며 독특하다고 느낀 '왼쪽 정렬', 그런데 '책방' 책도 '왼쪽 정렬', 그래서 나도 따라 해본다. 이 포스팅도 '왼쪽 정렬'

3. 월급을 거부한 용기,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이전과는 다른 경제적 압박, 그럼에도 불구하고......

4. 누군가는 동경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

5. 그리고 계속 진행 중인 그들의 선택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나는 10년째 진로 고민 중이다. 중고등학생이던 시절보다 더 심각한 진로 고민이다. 정확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잘 알지만, 선뜻 선택을 하지 못했다. 두 저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속된 말로 지르지 못한 것이다. 무언가 준비가 되어야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여전히 행동이 따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고민 중이다.

  오늘 나는 하루 종일 직장에서 에너지를 1도 쓰지 않았다. 오전에는 잠이 깨지 않아 커피를 마셔야 했고, 영혼 없이 나의 할 일을 마쳤다. 점심시간은 입맛에 맞지 않은 밥을 깨작깨작 먹었다. 오후는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퇴근 직전 있었던 회의 역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회의가 길어질까 봐 필요한 말만 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퇴근을 하는데 마치 하루 종일 헬멧을 쓰고 있었던 것처럼 머리가 무거웠다. 지끈거렸다. 집에 와서 눕고 싶었는데 오늘 시작하는 취미 생활이 있어서 비를 뚫고,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 저녁 시간 틈틈이 '책방' 책을 읽었다. 하루 종일 헬멧을 쓰고 있다가 퇴근 후 벗어던졌다면, 자정을 넘긴 지금 이 시간, 곯아떨어져야 하는데. 나는 맑은 정신과 초롱초롱한 눈으로 러시아 월드컵 경기도 보고, 두 권의 책에 대해 사색도 하고, 이렇게 독후감도 쓰고 있다. 


  두 사람의 선택이 내가 원하는 삶과 똑같이 닮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답게 사는 법'을 고민하고, 선택하고, 또 선택하는 행동은 막연하게 행복하게 사는 게 삶의 목표였던 나를 깨우쳐 준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일까? 나에게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가장 좋아하는 대한민국 헌법 조항이 '행복추구권'  제10조라고 잘난 척했던 나였는데,

행복이라는 종착지는 없구나. 인생 자체가 선택의 연속일 뿐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해야만 하는 과제는 처음부터 없었다. 행복을 위해 투자한 게 많다고 느낄수록 기준은 올라가고 만족도는 떨어졌다.
<회사, 99쪽>

나를 꿈에 부풀게 한 이 모든 풍경이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의 시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디에도 영원한 저곳은 없었다. 지금의 이 흥분도 시간과 함께 퇴색할 예정이었다. 저곳은 다시 '이곳'이 되어 나를 낙담케 하겠지.
<책방, 126쪽>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은 기어코 나를 코너에 몰아세웠다.
<책방, 160쪽>

 

 

정확히 하고 싶은 것을 실행하지 않으면서 행복을 꿈꾸던 나. 최선이 아니라면 차악이라도 선택하는 삶은 어떨까. <회사>에서 말하는 '감당할만한 고통을 선택하는 삶', <책방>에서 말하는 '오답을 걸러내는 삶' 나에게 묘하게 닮았다고 다가오는 지점이다.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책이 조금 다른 점은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회사>와 <책방>은 1차로 퇴사 후 독립을 했고, <책방>은 2차로 폐업(잠정적 휴식기)을 결정했다는 점이 책의 마무리에서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인생에서 선택과 선택을 거듭하고 있는 것 같다. 감당할만한 고통을 선택하고, 선택한 인생의 오답을 걸러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회사>와 <책방> 이후의 삶이 궁금해진다. 대리만족일 수도 있다. 아니면 지금 이후의 내 삶이 궁금해지는 선택을 할 용기가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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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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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태어나야지 하고 태어난 사람 손들어봐요.
우리가 남자로 할지 여자로 할지 자기가 결정한 사람 손들어봐요.
우리가 죽고 싶을 때 맘대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 위가 지금 음식물을 왜 소화시키지 못하는지, 왜 생리가 시작되는지, 왜 설사가 나오고 배가 아픈지, 왜 심장이 뛰고 있는지, 생물 시간에 배우는 호르몬들이 왜 그 시기가 되면 나오다가 어느 시기가 되면 사라지는지 나는 아는 게 없었다. 무엇보다 내 생명을 내가 만든 게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대뇌보다 작은영역을 지배하는 인간. 데카르트의 말대로 사고하는 것 외에 내가 나를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니까 그런 내가 나를 죽인다면 그 게 살인이다. 나는 나를 죽인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 죽는 날까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에게도 자기가 위선자라는 걸 들키지 않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생각해. 고모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실은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는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래. 그리고 고모가 그것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아무 기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남들은 남들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물론 그럴 때도 많지만 한 가지만은 안돼. 사람의 생명은 소중한 거라는 걸, 그 걸 놓치면 우리 모두 함께 죽어. 그리고 그게 뭐라도 죽음은 좋지 않은 거야. 살고자 하는 건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에 새겨진 어쩔 수 없는 본능과 같은 건데, 죽고 싶다는 말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거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다시 거꾸로 뒺비으면 잘 살고 싶다는 거고. 그러니까 우리는 죽고 싶다는 말 대신 잘 살고 싶다고 말해야 돼. 죽음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하는 건, 생명이라는 말의 뜻이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이야.
 
신문 기사에는 사실은 있는데 사실을 만들어낸 사실은 없어요. 사실을 만들어낸 게 진짜 사실인데 사람들은 거기에는 관심이 없어요. 사실은 행위 전에 이미 행위의 의미가 생겨난 것인데. 세상은 행위만을 판단하니까요. 생각은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도 없고 들여다볼 수도 없는 거니까, 죄와 벌이라는 게 과연 그렇게나 타당한 것일까. 행위는 사실일 뿐, 진실은 늘 그 행위 이전에 들어 있는 거라는 거, 그래서 우리가 혹여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거.
 
사형제도는 그 벌을 당하는 자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제도이다. 정신적으로 수개월 내지 수년 동안 육체적으로 생명이 다하지 않은 제 몸뚱이가 둘로 잘리는 절망적이고도 잔인한 시간 동안 그 형벌을 당하는 사형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품위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진실이라는 품위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이 형벌을 제 이름으로 불러 그것이 본질적으로 어떤지 인정하자.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것을. <단두대에 대한 성찰-알베르 카뮈>
 
내가 그 자식은 인간쓰레기니까,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그 자식 목을 매달아놓으면 그건 살인이고, 그렇게 살인한 나를 데려다 살인자라고 목을 매달면 그건 정의인가? 똑같이 인간이 인간을 죽어 마땅하다고 판단하고 똑같이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데, 그래 오빠 말대로 하나는 살인이 되고 하나는 집행이 되고, 하나는 살인자가 되어 그 죄값으로 죽고, 하나는 승진을 하는 거... 그게 정의인가?
 
미국의 유타주에서 끝내 사형당했던 게리 길모어처럼 끝까지 모두를 조롱하며 죽었으면 했다. 게리 길모어... 여론 조사 결과 전 국민 과반수가 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테랑 대통령이 사형제를 폐지시키고 나서도 프랑스는 오래도록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학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여서 빅토르 위고, 혹은 알베르 카뮈 같은 이들이 쓴 사형제에 대한 열려한 반대 책자들을 나도 그래서 읽어본 적이 있었다 .게리 길모어도 그 때 만났다. 그는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 시민 둘을 쏘아 죽였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태연하게, 나를 죽이면 당신들은 나의 마지막 살인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조소 띤 얼굴로 이야기했었다. 그는 한갓 제도가 인간을 처벌할 수 있는 범주 밖으로 이미 나가 있었다. 그는 살인 이전에 일어났던 모든 폭력의 신화를 살인 하나로 대치하는 제도의 무능과 모순을 생명을 바쳐 비웃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어렵게, 우연히 손에 넣었다. 그래서인지 더 단숨에 읽어버렸고, 단순 감동이나 전달하는 지식이 아니라서 더 빨리 읽힌 것 같다. (책 속의 표현대로라면 상투적이지 않아서.)
사형 제도. 난 궁극적으로 폐지론자에 속하지만 요 근래 너무나 극악무도해서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범죄자를 매스컴에서 접하고, 내가 그 피해자의 가족, 친구라면..?이란 상상을 하게 되면 내 생각이 많이 흔들리곤 했었다.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찬반토론 주제로 그리고 답으로 존치론자와 폐지론자의 각각 입장을 정리해서 익혀두었던 내용으로는 내 생각을 표현하기엔 많이 부족함을 느꼈었다. 그래서 내 생각도 많이 흔들리곤 했었던 것 같다.
흔히 사람들이 범죄자에게 무슨 인권이냐고 하면서 돌을 던질 때도 '그래도 인권은 인권인데, 인권은 누구나 공평하게 태어나면서 가지고 태어나는 건데... 인권은 누가 자격을 준다고 해서 갖게 되는 게 아닌데...'라고 밖으로는 대꾸하지 못했다.(것도 속으로..)
우리나라 인권 감수성이 낮아 '인권'이라는 단어 자체에서부터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잘 먹히지 않는걸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사형의 본질이 결국 '복수'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도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만들어낸 '진짜 사실'을 생각한다면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형벌은 복수가 아닌 교화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폐지해야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을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더군다나 인간으로서 못할 짓을 한 인간들을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정말정말 어려운 일이지..
어쨌든 무거운 얘기는 접어두고, '용서'에 대한 내 감성은 한 단계 성숙한 느낌이다.(이 책이랑 병행해서 읽고 읽는 책에도 그런 문구가 있었다. "사랑은 용서를 품고 자란다.")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 많이 메모해놓고도 모자라 다이어리에도 메모해 놓기는 처음인 것 같다. (그 것도 손으로 펜을 쥐고...--)
 
보태기>뚱딴지 같은 얘기지만, 종교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아서 아주 무관심했지만, 종교가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참, 그리고 읽는 내내 어찌나 강동원 얼굴이 떠오르는지...^^ 강동원 말고 다른 얼굴로 상상하며 읽으려고 해도 도저히 상상이 안됐다. 문유정 역할이 이나영이라서 더 맘에 든다.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는 다 별로여서 영화에 대한 기대보다도 소설과 배우가 좋아서 그냥 보고 싶은 영화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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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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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코는 내가 숨쉬는 공기에 녹아 가득가득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 공기는 한천처럼 딱딱해서 창문을 열어도 바깥 공기의 침식을 받지 않는다. 하나코가 없어도 내가 느끼는 방의 온도와 습도는 늘 일정하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받아들인 리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읽는 내내 하나코(완전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았던 하나코)가 더 궁금해졌다. 과연 이 소설은 어떻게 결말이 날까... 궁금증이 커졌을 때쯤, "하나코가 자살했다."란 문장으로 마치 실제 내 주위사람인냥 가슴이 다 철렁했다.

욕조에서 자살한 하나코.

왜 책 제목이 낙하하는 저녁일까 궁금했는데, 하나코가 자살했을 때 욕조가 빨갛게 물든 모습이 낙하하는 저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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