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구판절판


우수영에서 내 군사는 120명이었고 내 전선은 12척이었다. 그것이 내가 그 위에 입각해야 할 사실이었다. 그것은 많거나 적은 것이 아니고 다만 사실일 뿐이었다. 다른 아무 것도 없었고 그 밖에는 말할 것이 없었다. 수졸들은 내가 연안을 돌면서 한두 명씩 끌어모은 자들이거나 칠천량 패전에서 흩어졌던 자들을 불러모은 무리들이었다.-70쪽

김수철은 곡성의 문관이었는데 임진년에는 의병장 김성일의 막하에 들어가 금오산에서 이겼다. 예민하고 담대한 청년이었다. 문장이 반듯하고 행동이 민첩했다. 입이 무겁고 눈썰미가 매서웠으며, 움직임에 소리가 나지 않았다. 김수철은 졸음을 참고 반듯이 앉아서 핥듯이 마셨다.
- 수철아, 읍진이 다 무너지는 것이냐?
- 본래 무너져 있던 세상입니다.
- 수철아, 죽지 마라. 명령이다.
- 네 나으리, 읍진에 무 싹이 올라오고 있으니.. 이제 주무실 시간입니다.
김수철을 내 방에서 재웠다. 보름 만에 귀임한 김수철은 눕자마자 코를 골았다. 새벽에 김수철이 이불을 걷어찼다. 나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동틀 무렵에 코피를 쏟았다. 뒷골이 당기면서 더운 피가 쏟아졌다. 종을 불러 피를 닦게 했다. 구들이 식어 불을 더 때게 했다. 바다는 새벽까지 길길이 뛰었다.-132쪽

목수들이 배를 만들어내는 일은 사람의 몸을 빚어내는 일과 흡사했다. 싸우는 바닷가에서 싸움배를 만들 때도, 목수들의 대패와 톱은 연장으로서 평화로워 보였다. 우수영 통합 조선소에서 연장과 무기 사이의 거리가 먼 것인지 혹은 가까운 것인지 나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전선 7척을 진수시키던 날도 나는 그 거리를 가늠하지 못했다. 진수하던 날 새 배에서는 송진 향기가 났다. 목수들이 뱃전에서 시루떡을 바다에 던졌다. 군관들이 새 배를 끌고 나가 연안을 한 바퀴 돌며 총통을 쏘아댔고, 장졸들이 배 위에서 함성을 질렀다. 나는 우수영 쪽 물가에 앉아 있었다.-158쪽

군관들이 항해의 목적을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다만 '연안 시찰'이라고만 대답해 주었다. 물러설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나는 다시 우수영으로 돌아왔다. 엿새간의 뱃길이었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 나는 우수영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서해에는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나는 우수영을 버리고 남해의 서쪽 끝 언저리로 가기로 했다. 거기가 나의 자리였다. 거기서 다시 경상 해안 쪽으로 밀고 나갈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거기가 나의 자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마침내 적의 전체를 맞아야 하는 날은 정확하고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수영으로 돌아온 날 밤에 나는 모처럼 깊이 잠들었다. -165쪽

섬 너머로 지는 해의 노을이 방안에까지 스몄다. 토담의 틈새에서 빈대들이 기어내려 왔다. 칼이 아베의 목을 지날 때 내 오른팔에 와 닿던 진동을 생각했다. 아베를 심문할 때 내 마음속에서 울어지지 않던 두 개의 울음이 동시에 울어졌다. 아베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울음과 아베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울음이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눈물이 메말라서 겨우 눈을 적셨다. 산 쪽에서 목재를 나르는 수졸들으 발맞추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190쪽

서울에서 도원수부를 오가는 관리들 편에 나는 명 수군의 출병 소식을 들었다. 전함 5백 척의 군세가 어떠한 것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명의 육군은 내륙의 적을 바다로 내몰지 않고, 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창끝을 똑바로 겨누지 않은 군대였다. 백성들이 건초를 베어서 명군의 말을 먹였고 겨울에는 언 개울을 뒤져 개구리를 잡아다 바쳤다. 명군의 출병 의도는 군사 작전이 아니라 강화 협상인 것처럼 보였다. 강화 협상이 일본과 명 사이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는 남해안 수영에서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조선 조정이 그 협상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204쪽

조정은 서울에서 강화까지 명 수군의 군량을 실어다 주었다. 임금은 정상품 접반사를 강화에 상주시키면서 명 수군 지휘부의 주색과 풍류를 뒷바라지했다. 명군은 남해의 싸움터로 내려오지 않았고, 진린으로부터는 한 번의 전령도 오지 않았다. 진린은 남해의 물길이며 적의 정황을 물어오지 않았다. 선발대도 전령도 오지 않았다. 조정의 침묵은 길었다. 겨울이 다 가도록 선전관은 오지 않았다. 조정이 나의 수군와 명의 수군을 어떻게 접속시킬 것이며, 전쟁의 국면을 어떻게 전환시키려는 것인지에 관하여 나는 조정의 전략을 알 수 없었다. -305쪽

명군 지휘부가 조선 조정을 경유하지 않고 조선 수군에게 군대 해산과 적대행위 종료와 귀향을 명령하고 있는 사태를 시급히 조정에 알려야 했다. 멀리서, 긴 꼬리를 끌며 우는 임금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명과 일본이 강화하는 날, 다시 서울 의금부에 끌려가 베어지는 내 머리의 환영이 떠올랐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나의 자연사로서 적의 칼에 죽기를 원했다.
(중략)
(명나라 진린에게 보내는 장계 내용) 적들이 진을 친 거제, 웅천, 김해, 동래가 모두 우리 땅이어늘 적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하심은 무슨 말씀이며, 이제 우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시나 우리는 이에 돌아갈 고향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적이 바닷가 육상 기지에 성을 쌓고 해가 바뀌어도 돌아가지 아니하고 살육과 약탈이 날로 자심해 가고 있으니 적이 돌아갈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대인의 뜻과 저의 뜻을 삼가 우리 임금께 알릴 것이오니 대인은 그리 아소서.-313쪽

나는 적의 인후에 바싹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적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나는 전쟁 전체에 관한 정보가 없었다. 조정도 그랬고 도원수부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소문대로 일본이 명과 조선반도를 분할하는 조건으로 강화하고 조선에서 철수하는 것이라면, 그때 내가 살 길은 돌아가는 적을 바다에서 부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때 그 바다가 나의 살 자리인지 죽을 자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마지막 바다는 그 두 개의 국면이 포개진 자리일 것이다.-319쪽

그(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철병을 명령하고 죽었다는 것인데,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시는 이러했다는 것이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술 취한 명의 하급 지휘관들이 히데요시의 유언시를 노래로 부르며 춤을 추었다. 술 취한 이국 군대들이 부르는 노래가 칼처럼 내 마음을 그었다. 그날 나는 취했다. 내 마음 속에서 내 칼이 징징징 울면서 춤을 추었다. 저러한 노래, 저러한 시구를 이 세상에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진실로 이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붉게 물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내 술 취한 칼은 마구 울었다.
-339쪽

- 조선 수군이 천병을 염탐하는가?
진린의 부관들이 내 쪽으로 접근했다.
- 부관들을 물리쳐주시오.
진린이 한참 후에 부관들을 물리쳤다.
- 적선들이 장군께 다녀갔다고 들었소이다.
- 그렇소. 고니시가 사람을 보내왔소. 적들은 전쟁을 포기했소. 통제공, 이미 끝난 전쟁이오. 고니시가 나에게 선물로 수급 2천 개를 주겠다고 합디다. 내가 조선에 와서 약간의 공을 취한들 조선에 누 될 일이 없지 않소?
- 장군 막하에 많은 수급이 쌓이기를 바라오. 저도 장군께 수급을 몰아드리리다. 그래 적들이 수급을 실어왔소?
- 아니오. 남해도에 쌓아놓고 있다고 합디다. 남해도에 연락선을 보내 수급을 실어올 터이니, 배를 한 척 통과시켜 달라고 했소.
... 이 자를 여기서 베어야 하나, 허리에 찬 칼이 천근의 무게로 늘어졌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임진년에 총 맞은 어깻죽지가 쑤셨다. 정유년에 형장에 으스러지던 아랫도리가 결려왔다. 나는 진린의 선실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서 이 자를 베어버리면, 아마도 사직은 끝장이 나고, 전쟁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었다. 아마도 그때, 나는 이 세계 전체를 적으로 맞아야 할 것이었다.-376쪽

싸움터를 빠져나가 먼바다로 달아나는 적선 몇 척이 선창 너머로 보였다. 밀물이 썰물로 바뀌는 와류 속에서 적병들의 시체가 소용돌이쳤다. 부서진 적선의 파편들이 뱃전에 부딪혔다. 나는 심한 졸음을 느꼈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 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쪽으로...-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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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역사적인 날’을 기억하자 / 정석구
 
 
 
한겨레 정석구 기자
 








 

» 정석구 선임논설위원
 

 

벌써 까마득한 옛일이 돼버린 것 같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정초부터 내린 폭설 속에 모든 게 묻혀버렸다. 눈보라를 뚫고 어렵사리 출근한 직장인들도 새해 덕담 나누기에 바쁘다. 하지만 기억할 건 기억하자. 비록 그것이 짜증나는 일이고, 내 밥벌이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잊고 사는 게 능사는 아니다. 망각은 인간을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지만 때로는 닥쳐올 미래의 불행에 눈멀게 한다.

불과 4~5일 전의 일이다. 김형오 국회의장 말대로 올 새해 첫날은 우리 의정사상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만하다. “지금 단잠에 빠져 계신 국민 여러분, 일어나셔야 합니다”라는 김상희 민주당 의원의 울부짖음이 새해 벽두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을 메웠다.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시내에 울려 퍼졌던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라는 애절한 거리방송을 연상케 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노동관계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김 의원의 절규에 야유와 조소를 보냈다. 야당 의원들의 얼굴은 통곡과 눈물로 얼룩졌지만 여당 의원들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희망찬 새해를 맞았다.

그날 국회에서는 온갖 편법과 변칙이 난무했다. 법을 만드는 국회가 어떻게 법을 위반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한나라당은 예산안 날치기 통과를 막기 위해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예결위 회의장 변경 금지’ 조항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팽개쳤다. 한나라당 의원총회 장소를 예결위 회의장으로 바꾼 뒤 자기들끼리 292조원에 이르는 예산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야당이 “국회법 절차를 무시한 예산안 통과는 무효”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규정도 절차도 깡그리 무시됐다. 이제 여당에 민주주의적 절차를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돼버렸다.

그 예산안에는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 예산도 포함돼 있다. 이제 예산도 뒷받침됐으니 정부는 4대강 사업을 더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이례적으로 새해 첫날 열린 국무회의에서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은 “국회에서 예산이 통과된 만큼 올해는 확실하게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장담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앞으로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면 ‘공무집행 방해죄’로 잡아 가둘지도 모르겠다.

국회에서의 변칙은 노동관계법 처리 과정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민주당 소속인 추미애 환경노동위원장이 야당 의원들의 출입을 막은 채 여당 의원들과 손잡고 상임위에서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이어 국회의장은 직권상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모두가 곤히 잠들어 있던 1월1일 새벽 2시께 노동관계법을 통과시켰다. 야당 의원들이 “국회는 죽었다” “대한민국 국회의장이 사기꾼이 돼버렸다”고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노동운동에 한평생을 바쳤던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노동자들을 잡아 고문했던 이들이 오히려 국회에서 큰소리 치는” 현실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야 했다.

그렇게 새해 첫날 새벽이 지나고 다시 일상이 시작됐다. 이 정권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희망찬 내일을 얘기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어제 국정연설에서 “대한민국의 국운이 열리고 있다”며 자신감을 한껏 과시했다. 하지만 새해 벽두의 그 ‘역사적인 날’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망각은 또다른 오만과 독선을 불러온다. 그게 어디 하루이틀 된 일이냐며 외면해서도 안 된다. 무관심이 깊어지면 우리 일상이 서서히 파괴된다. 오늘의 절망을 내일의 희망으로 바꾸려면 이 정권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망각하는 자에겐 굴욕과 절망이 되풀이될 뿐이다.

정석구 선임논설위원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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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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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복음서를 읽는 건 예수의 절절한 삶을,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읽는 이유나 가치를 내팽캐치는 일이다. 복음서는 '한 평범한 시골 청년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되었는가'를 증언한 책이지 '하느님 아들의 인간 흉내 쇼'를 적은 책이 아니다.(63쪽) 

(방편)  

* 제자들은 제 스승을 사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가로막았다는 것을 예수에게 유세하듯 말한다.(149)... 예수는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해체할 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나에게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150) 

* 제자들의 바람대로 예수가 인민들의 힘을 모아 외세와 괴뢰 세력을 물리치고 왕이 된다면, 인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선정을 베푼다면 얼마나 좋을까? 잡혀 수난 받고 죽어버린다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지 않은가? 부활해서 인류의 구세주가 된다? 그건 세월이 지나 예수의 죽음이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교리가 되었을 때 나오는 이야기다.(172) 

* 우리는 예수가 자본주의라는 마몬(물질적 부)의 체제 속에서 물질적 탐욕과 이기심의 덩어리가 되어 살아가는 우리와는 비할 바 없이 청정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되새겨야 한다.(199) 

* 또한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일'은 왕의 즉위식을 뜻한다. 호화로운 궁궐이 아니라 세상에서 버림받은 나병 환자의 집에서 열린 왕의 즉위식. 예수는 왕이다. 인민들에게 군림하는 기존의 왕과는 정반대의 자리에 선 왕,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함께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먼저 실천하고 보여 주는 왕이다.(220) 

* 모든 해석이나 의견을 존중하더라도 절대 생략되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지배체제에 의해 사형당했다'는 사실이다. 예수와 관련한 모든 해석과 의견들은 예수가 '왜 사형당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254) 

강조한 두 문장을 깊히 생각해볼 때, 기독교라는 거대한 외형 속에 존재하는,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할 때, 우리는 종교의 도그마에 빠지기 쉽다. 많은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에서 예수 스스로가 항상 타파하고자 했던 그 도그마. 책을 덮으며 생각컨대, 도올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에 접근한 저자의 정연한 분석을 통해 '진정한 예수'를 묵상해볼 수 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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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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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息日의 본디 의미) 쉬는 날은 그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제대로 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날 너희는 어떠한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소와 나귀와 그 밖의 모든 가축과 집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야 네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신명 5:13~15) 그런데 바리사이인들은 안식일에도 일하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의 조건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안식일을 어기니 죄인이라 말했다. 안식일은 '쉴 수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중략)
예수에게서 뭔가 꼬투리를 잡을 기회를 노리던 바리사이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에게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 따졌다. 예수는 그들에게 정면으로 반박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 않았습니다."(사람을 괴롭히고 옥죄는 율법은 더 이상 하느님의 율법이 아니다)-55쪽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복음서를 읽는 건 예수의 절절한 삶을,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읽는 이유나 가치를 내팽캐치는 일이다. 복음서는 '한 평범한 시골 청년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되었는가'를 증언한 책이지 '하느님 아들의 인간 흉내 쇼'를 적은 책이 아니다.-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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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정리 편지 (양장)
배유안 지음, 홍선주 그림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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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을 물리고 장운이 얼른 설거지를 했다. 난이가 그릇을 닦아 살강에 얹었다.
"장운아, 이리 앉아라."
장운이 방으로 들어서자 아버지가 옆자리를 가리켰다.
오복과 난이도 나란히 앉았다. 장운은 어리둥절했다. 어째 좀 이상한 분위기였다.
"장운아, 한양 가거라."
"예?"
"한양, 가거라."
"아버지, 그걸 어떻게.."
"낮에 점밭이 다녀갔다."
"점밭 아저씨가요?"
"그래, 정 어려운 형편인가 와 봤다고. 참 고마운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점심 먹고 나서 일터에 점밭 아저씨가 내내 안 보였던 것 같았다.
'우리 집엘 왔었구나.'
"좋은 기회라고 하더라. 갔다 오면 여기서도 석수로 인정해 주고. 네가 손이 매워서 한 재목 할 것 같다면서 웬만하면 한양엘 데려가고 싶다더구나. 내가 그 말을 듣고 어찌나 고맙고 마음이 뿌듯하던지..."
아버지는 거의 눈물이 글썽한 얼굴이었다.-147쪽

장운은 다시 돌 앞에 반듯하게 앉았다. 이 큰 돌 안에 꽃이 가득 들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안에 감춰진 연꽃을 피어나게 하려면 꽃을 덮고 있는 돌을 깨 내야 한다. 장운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가슴에 두 손을 모았다가 조심조심 불필요한 부분을 깨 나가기 시작했다.
돌이 한 점 한 점 떨어져 나가자 천천히 꽃잎 형태가 드러났다. 둥글불룩하게 꽃잎을 다듬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딱딱한 돌로 그저 꽃 모양을 낸다는 생각은 말고 정말 꽃잎을 피운다고 생각해야 된다. 마음속에 꽃잎이 하늘하늘 흔들리는 느낌을 가지고 있어야 그런 꽃잎을 다듬을 수 있어."(판돌이 아저씨)-171쪽

"누가 그랬는지 찾으려 하지 마라. 너를 해코지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네 책임이다. 미움을 못 풀어 준 건 너일테니까."-179쪽

(누이의 편지) 장운아, 일 잘하고 있지? 집사 아저씨가 주인어른 심부름으로 한양에 간다기에 급히 몇 자 적는다. 한 달 전에 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유언으로 그동안 정성스럽게 수발한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라 하셨다. 그래서 사십구재 지내고 이달 스무날에 집으로 돌아간다. 아버지께는 봉구 아저씨 편에 벌써 일러두었다. 마음은 벌써 집에 가 있는 것 같다. 어서 만나고 싶구나.-181쪽

"걸어오는 너를 보고 알았느니라. 장운아, 그새 많이 컸구나. 그런데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고?"
"서, 석수들을 따라와서 돌을 깨고 있습니다."
"그래, 네 아비가 석수라 했지. 아비가 아프다고 했는데 요즘은 어떠하냐?"
"예, 전보다 많이 낫습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종이 책이 네 것이란 말이지?"
"예, 배운 것을 이, 잊지 않으려고 적어 두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 책을 천천히 뒤적였다. 종이 책에서 뭔가 툭 떨어졌다. 편지 두 통이었다. 장운이 얼른 주웠다. 할아버지가 손을 내밀자 장운이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건넸다.
"무엇인고?"
"누이가 쓴 편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할아버지가 펴서 읽었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뜨고 장운을 보았다.
"이, 이게..."
"빚 때문에 누이가 어떤 집에 종살이를 하러 갔습니다. 그동안 누이와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습니다."
"편지를? 새 글자로 편지를 주고받았단 말이지? 그랬구나. 그래, 그동안 누이 때문에 애가 많이 탔겠구나."

(중략)

"이런, 이런. 이건 내가 초정에서 쓴 편지 아니냐?"-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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