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리 편지 (양장)
배유안 지음, 홍선주 그림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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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을 물리고 장운이 얼른 설거지를 했다. 난이가 그릇을 닦아 살강에 얹었다.
"장운아, 이리 앉아라."
장운이 방으로 들어서자 아버지가 옆자리를 가리켰다.
오복과 난이도 나란히 앉았다. 장운은 어리둥절했다. 어째 좀 이상한 분위기였다.
"장운아, 한양 가거라."
"예?"
"한양, 가거라."
"아버지, 그걸 어떻게.."
"낮에 점밭이 다녀갔다."
"점밭 아저씨가요?"
"그래, 정 어려운 형편인가 와 봤다고. 참 고마운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점심 먹고 나서 일터에 점밭 아저씨가 내내 안 보였던 것 같았다.
'우리 집엘 왔었구나.'
"좋은 기회라고 하더라. 갔다 오면 여기서도 석수로 인정해 주고. 네가 손이 매워서 한 재목 할 것 같다면서 웬만하면 한양엘 데려가고 싶다더구나. 내가 그 말을 듣고 어찌나 고맙고 마음이 뿌듯하던지..."
아버지는 거의 눈물이 글썽한 얼굴이었다.-147쪽

장운은 다시 돌 앞에 반듯하게 앉았다. 이 큰 돌 안에 꽃이 가득 들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안에 감춰진 연꽃을 피어나게 하려면 꽃을 덮고 있는 돌을 깨 내야 한다. 장운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가슴에 두 손을 모았다가 조심조심 불필요한 부분을 깨 나가기 시작했다.
돌이 한 점 한 점 떨어져 나가자 천천히 꽃잎 형태가 드러났다. 둥글불룩하게 꽃잎을 다듬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딱딱한 돌로 그저 꽃 모양을 낸다는 생각은 말고 정말 꽃잎을 피운다고 생각해야 된다. 마음속에 꽃잎이 하늘하늘 흔들리는 느낌을 가지고 있어야 그런 꽃잎을 다듬을 수 있어."(판돌이 아저씨)-171쪽

"누가 그랬는지 찾으려 하지 마라. 너를 해코지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네 책임이다. 미움을 못 풀어 준 건 너일테니까."-179쪽

(누이의 편지) 장운아, 일 잘하고 있지? 집사 아저씨가 주인어른 심부름으로 한양에 간다기에 급히 몇 자 적는다. 한 달 전에 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유언으로 그동안 정성스럽게 수발한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라 하셨다. 그래서 사십구재 지내고 이달 스무날에 집으로 돌아간다. 아버지께는 봉구 아저씨 편에 벌써 일러두었다. 마음은 벌써 집에 가 있는 것 같다. 어서 만나고 싶구나.-181쪽

"걸어오는 너를 보고 알았느니라. 장운아, 그새 많이 컸구나. 그런데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고?"
"서, 석수들을 따라와서 돌을 깨고 있습니다."
"그래, 네 아비가 석수라 했지. 아비가 아프다고 했는데 요즘은 어떠하냐?"
"예, 전보다 많이 낫습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종이 책이 네 것이란 말이지?"
"예, 배운 것을 이, 잊지 않으려고 적어 두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 책을 천천히 뒤적였다. 종이 책에서 뭔가 툭 떨어졌다. 편지 두 통이었다. 장운이 얼른 주웠다. 할아버지가 손을 내밀자 장운이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건넸다.
"무엇인고?"
"누이가 쓴 편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할아버지가 펴서 읽었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뜨고 장운을 보았다.
"이, 이게..."
"빚 때문에 누이가 어떤 집에 종살이를 하러 갔습니다. 그동안 누이와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습니다."
"편지를? 새 글자로 편지를 주고받았단 말이지? 그랬구나. 그래, 그동안 누이 때문에 애가 많이 탔겠구나."

(중략)

"이런, 이런. 이건 내가 초정에서 쓴 편지 아니냐?"-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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