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역사적인 날’을 기억하자 / 정석구
 
 
 
한겨레 정석구 기자
 








 

» 정석구 선임논설위원
 

 

벌써 까마득한 옛일이 돼버린 것 같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정초부터 내린 폭설 속에 모든 게 묻혀버렸다. 눈보라를 뚫고 어렵사리 출근한 직장인들도 새해 덕담 나누기에 바쁘다. 하지만 기억할 건 기억하자. 비록 그것이 짜증나는 일이고, 내 밥벌이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잊고 사는 게 능사는 아니다. 망각은 인간을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지만 때로는 닥쳐올 미래의 불행에 눈멀게 한다.

불과 4~5일 전의 일이다. 김형오 국회의장 말대로 올 새해 첫날은 우리 의정사상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만하다. “지금 단잠에 빠져 계신 국민 여러분, 일어나셔야 합니다”라는 김상희 민주당 의원의 울부짖음이 새해 벽두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을 메웠다.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시내에 울려 퍼졌던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라는 애절한 거리방송을 연상케 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노동관계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김 의원의 절규에 야유와 조소를 보냈다. 야당 의원들의 얼굴은 통곡과 눈물로 얼룩졌지만 여당 의원들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희망찬 새해를 맞았다.

그날 국회에서는 온갖 편법과 변칙이 난무했다. 법을 만드는 국회가 어떻게 법을 위반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한나라당은 예산안 날치기 통과를 막기 위해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예결위 회의장 변경 금지’ 조항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팽개쳤다. 한나라당 의원총회 장소를 예결위 회의장으로 바꾼 뒤 자기들끼리 292조원에 이르는 예산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야당이 “국회법 절차를 무시한 예산안 통과는 무효”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규정도 절차도 깡그리 무시됐다. 이제 여당에 민주주의적 절차를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돼버렸다.

그 예산안에는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 예산도 포함돼 있다. 이제 예산도 뒷받침됐으니 정부는 4대강 사업을 더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이례적으로 새해 첫날 열린 국무회의에서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은 “국회에서 예산이 통과된 만큼 올해는 확실하게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장담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앞으로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면 ‘공무집행 방해죄’로 잡아 가둘지도 모르겠다.

국회에서의 변칙은 노동관계법 처리 과정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민주당 소속인 추미애 환경노동위원장이 야당 의원들의 출입을 막은 채 여당 의원들과 손잡고 상임위에서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이어 국회의장은 직권상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모두가 곤히 잠들어 있던 1월1일 새벽 2시께 노동관계법을 통과시켰다. 야당 의원들이 “국회는 죽었다” “대한민국 국회의장이 사기꾼이 돼버렸다”고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노동운동에 한평생을 바쳤던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노동자들을 잡아 고문했던 이들이 오히려 국회에서 큰소리 치는” 현실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야 했다.

그렇게 새해 첫날 새벽이 지나고 다시 일상이 시작됐다. 이 정권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희망찬 내일을 얘기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어제 국정연설에서 “대한민국의 국운이 열리고 있다”며 자신감을 한껏 과시했다. 하지만 새해 벽두의 그 ‘역사적인 날’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망각은 또다른 오만과 독선을 불러온다. 그게 어디 하루이틀 된 일이냐며 외면해서도 안 된다. 무관심이 깊어지면 우리 일상이 서서히 파괴된다. 오늘의 절망을 내일의 희망으로 바꾸려면 이 정권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망각하는 자에겐 굴욕과 절망이 되풀이될 뿐이다.

정석구 선임논설위원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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