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구판절판


우수영에서 내 군사는 120명이었고 내 전선은 12척이었다. 그것이 내가 그 위에 입각해야 할 사실이었다. 그것은 많거나 적은 것이 아니고 다만 사실일 뿐이었다. 다른 아무 것도 없었고 그 밖에는 말할 것이 없었다. 수졸들은 내가 연안을 돌면서 한두 명씩 끌어모은 자들이거나 칠천량 패전에서 흩어졌던 자들을 불러모은 무리들이었다.-70쪽

김수철은 곡성의 문관이었는데 임진년에는 의병장 김성일의 막하에 들어가 금오산에서 이겼다. 예민하고 담대한 청년이었다. 문장이 반듯하고 행동이 민첩했다. 입이 무겁고 눈썰미가 매서웠으며, 움직임에 소리가 나지 않았다. 김수철은 졸음을 참고 반듯이 앉아서 핥듯이 마셨다.
- 수철아, 읍진이 다 무너지는 것이냐?
- 본래 무너져 있던 세상입니다.
- 수철아, 죽지 마라. 명령이다.
- 네 나으리, 읍진에 무 싹이 올라오고 있으니.. 이제 주무실 시간입니다.
김수철을 내 방에서 재웠다. 보름 만에 귀임한 김수철은 눕자마자 코를 골았다. 새벽에 김수철이 이불을 걷어찼다. 나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동틀 무렵에 코피를 쏟았다. 뒷골이 당기면서 더운 피가 쏟아졌다. 종을 불러 피를 닦게 했다. 구들이 식어 불을 더 때게 했다. 바다는 새벽까지 길길이 뛰었다.-132쪽

목수들이 배를 만들어내는 일은 사람의 몸을 빚어내는 일과 흡사했다. 싸우는 바닷가에서 싸움배를 만들 때도, 목수들의 대패와 톱은 연장으로서 평화로워 보였다. 우수영 통합 조선소에서 연장과 무기 사이의 거리가 먼 것인지 혹은 가까운 것인지 나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전선 7척을 진수시키던 날도 나는 그 거리를 가늠하지 못했다. 진수하던 날 새 배에서는 송진 향기가 났다. 목수들이 뱃전에서 시루떡을 바다에 던졌다. 군관들이 새 배를 끌고 나가 연안을 한 바퀴 돌며 총통을 쏘아댔고, 장졸들이 배 위에서 함성을 질렀다. 나는 우수영 쪽 물가에 앉아 있었다.-158쪽

군관들이 항해의 목적을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다만 '연안 시찰'이라고만 대답해 주었다. 물러설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나는 다시 우수영으로 돌아왔다. 엿새간의 뱃길이었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 나는 우수영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서해에는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나는 우수영을 버리고 남해의 서쪽 끝 언저리로 가기로 했다. 거기가 나의 자리였다. 거기서 다시 경상 해안 쪽으로 밀고 나갈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거기가 나의 자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마침내 적의 전체를 맞아야 하는 날은 정확하고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수영으로 돌아온 날 밤에 나는 모처럼 깊이 잠들었다. -165쪽

섬 너머로 지는 해의 노을이 방안에까지 스몄다. 토담의 틈새에서 빈대들이 기어내려 왔다. 칼이 아베의 목을 지날 때 내 오른팔에 와 닿던 진동을 생각했다. 아베를 심문할 때 내 마음속에서 울어지지 않던 두 개의 울음이 동시에 울어졌다. 아베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울음과 아베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울음이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눈물이 메말라서 겨우 눈을 적셨다. 산 쪽에서 목재를 나르는 수졸들으 발맞추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190쪽

서울에서 도원수부를 오가는 관리들 편에 나는 명 수군의 출병 소식을 들었다. 전함 5백 척의 군세가 어떠한 것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명의 육군은 내륙의 적을 바다로 내몰지 않고, 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창끝을 똑바로 겨누지 않은 군대였다. 백성들이 건초를 베어서 명군의 말을 먹였고 겨울에는 언 개울을 뒤져 개구리를 잡아다 바쳤다. 명군의 출병 의도는 군사 작전이 아니라 강화 협상인 것처럼 보였다. 강화 협상이 일본과 명 사이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는 남해안 수영에서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조선 조정이 그 협상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204쪽

조정은 서울에서 강화까지 명 수군의 군량을 실어다 주었다. 임금은 정상품 접반사를 강화에 상주시키면서 명 수군 지휘부의 주색과 풍류를 뒷바라지했다. 명군은 남해의 싸움터로 내려오지 않았고, 진린으로부터는 한 번의 전령도 오지 않았다. 진린은 남해의 물길이며 적의 정황을 물어오지 않았다. 선발대도 전령도 오지 않았다. 조정의 침묵은 길었다. 겨울이 다 가도록 선전관은 오지 않았다. 조정이 나의 수군와 명의 수군을 어떻게 접속시킬 것이며, 전쟁의 국면을 어떻게 전환시키려는 것인지에 관하여 나는 조정의 전략을 알 수 없었다. -305쪽

명군 지휘부가 조선 조정을 경유하지 않고 조선 수군에게 군대 해산과 적대행위 종료와 귀향을 명령하고 있는 사태를 시급히 조정에 알려야 했다. 멀리서, 긴 꼬리를 끌며 우는 임금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명과 일본이 강화하는 날, 다시 서울 의금부에 끌려가 베어지는 내 머리의 환영이 떠올랐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나의 자연사로서 적의 칼에 죽기를 원했다.
(중략)
(명나라 진린에게 보내는 장계 내용) 적들이 진을 친 거제, 웅천, 김해, 동래가 모두 우리 땅이어늘 적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하심은 무슨 말씀이며, 이제 우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시나 우리는 이에 돌아갈 고향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적이 바닷가 육상 기지에 성을 쌓고 해가 바뀌어도 돌아가지 아니하고 살육과 약탈이 날로 자심해 가고 있으니 적이 돌아갈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대인의 뜻과 저의 뜻을 삼가 우리 임금께 알릴 것이오니 대인은 그리 아소서.-313쪽

나는 적의 인후에 바싹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적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나는 전쟁 전체에 관한 정보가 없었다. 조정도 그랬고 도원수부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소문대로 일본이 명과 조선반도를 분할하는 조건으로 강화하고 조선에서 철수하는 것이라면, 그때 내가 살 길은 돌아가는 적을 바다에서 부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때 그 바다가 나의 살 자리인지 죽을 자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마지막 바다는 그 두 개의 국면이 포개진 자리일 것이다.-319쪽

그(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철병을 명령하고 죽었다는 것인데,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시는 이러했다는 것이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술 취한 명의 하급 지휘관들이 히데요시의 유언시를 노래로 부르며 춤을 추었다. 술 취한 이국 군대들이 부르는 노래가 칼처럼 내 마음을 그었다. 그날 나는 취했다. 내 마음 속에서 내 칼이 징징징 울면서 춤을 추었다. 저러한 노래, 저러한 시구를 이 세상에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진실로 이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붉게 물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내 술 취한 칼은 마구 울었다.
-339쪽

- 조선 수군이 천병을 염탐하는가?
진린의 부관들이 내 쪽으로 접근했다.
- 부관들을 물리쳐주시오.
진린이 한참 후에 부관들을 물리쳤다.
- 적선들이 장군께 다녀갔다고 들었소이다.
- 그렇소. 고니시가 사람을 보내왔소. 적들은 전쟁을 포기했소. 통제공, 이미 끝난 전쟁이오. 고니시가 나에게 선물로 수급 2천 개를 주겠다고 합디다. 내가 조선에 와서 약간의 공을 취한들 조선에 누 될 일이 없지 않소?
- 장군 막하에 많은 수급이 쌓이기를 바라오. 저도 장군께 수급을 몰아드리리다. 그래 적들이 수급을 실어왔소?
- 아니오. 남해도에 쌓아놓고 있다고 합디다. 남해도에 연락선을 보내 수급을 실어올 터이니, 배를 한 척 통과시켜 달라고 했소.
... 이 자를 여기서 베어야 하나, 허리에 찬 칼이 천근의 무게로 늘어졌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임진년에 총 맞은 어깻죽지가 쑤셨다. 정유년에 형장에 으스러지던 아랫도리가 결려왔다. 나는 진린의 선실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서 이 자를 베어버리면, 아마도 사직은 끝장이 나고, 전쟁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었다. 아마도 그때, 나는 이 세계 전체를 적으로 맞아야 할 것이었다.-376쪽

싸움터를 빠져나가 먼바다로 달아나는 적선 몇 척이 선창 너머로 보였다. 밀물이 썰물로 바뀌는 와류 속에서 적병들의 시체가 소용돌이쳤다. 부서진 적선의 파편들이 뱃전에 부딪혔다. 나는 심한 졸음을 느꼈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 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쪽으로...-38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