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최하림 시인(기사제공: 계간 시인세계)
(김광일=조선일보 문화부장) 오후는 문학적이다. 햇살이 적당하게 힘을 잃어가는 시간이다. 역사상 어떤 악당도 이런 오후에는 선전포고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에너지가 많은 역동적인 것들조차 평화롭게 비껴 있을 것만 같은 그 시각쯤 최하림 시인을 찾아가니 그곳엔 시인이 다섯이나 살고 있었다.
최하림 시인은 물론이지만, 그의 부인도 시인이었고, 그가 키우고 있는 세 마리 포유류도 시인이었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서 그는 언덕 위에 흰색 이층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지붕은 담홍색으로 이국적이었다.
그날은 조금 불안한 마음이었다. 꼭 그렇기 때문은 아니었지만 김요일 시인과 필자는 부지런히 서울을 빠져 나갔다. 점심 때쯤 북한이 핵실험 실시를 발표한 날이라 도심은 뒤숭숭했다. 그런 날일수록 국가와 민족의 명운이 경각에 달리는 일들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다는 중압감에서 탈출하는 방편의 하나로 산속에 묻힌 시인을 찾아가는 일이 제격이기는 했다.
최하림 시인이 서 있는 마당에 자동차가 들어서니 그가 천천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지나고 보면 이 세상은 그 무엇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달은 게 틀림없다. 그는 매우 천천히 걸었다. “건강은 이 정도겠죠”라고 담담히 말하다가, 그리고 김종해 시인과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회사 일을 깐깐하고 야무지게 할 거야.”
물론 ‘회사 일’이란 김종해 시인이 주간으로 있는 문학세계사 출판 일을 두고 한 말이다. 김종해 시인의 맏아들이자 같은 출판사에서 이사로 일을 하고 있는 김요일 시인과 옛이야기꽃이 피어올랐다. 최하림 시인도 한때 ‘날리는 출판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출판에 관계된 몇 마디가 인터뷰의 꼭지를 따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70년대는 머리가 돌아갔으나, 80년대 지나면서 못하겠습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추억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최 시인은 “속도가 들어오니까 못하겠더라”고 말했다.
기획을 세우면, 기획을 검토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취합하면서 그것을 다시 음미하고, 독자들에게 진정 도움이 될지를 되새기고, 원래 출판을 시작했을 때의 철학과 맞는지를 확인하고, 그렇게 해서 기다리던 원고가 들어오면 있는 힘을 다해 편집과 디자인을 진행하는 일들을 짧게는 6개월에서 길면 몇 년씩 진행하던, ‘에둘러 가는’ 출판이었다. 그런데 H출판사에서 선도했듯이 어제 기획으로 꺼낸 이야기가 불과 며칠 만에 책으로 나오는 판국이 전개되는 출판의 현기증을 최 시인은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대화는 다시 집 짓는 이야기로 돌아갔고, 문호리의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최 시인은 집 짓는 데 설계비로 얼마가 들어갔고, 건축비로 얼마를 치렀으며, 대지가 몇 평이고 건평이 몇 평이라는 이야기까지 자세히 곁들였다. 그는 별로 자랑할 게 못 된다고 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면서 결국은 자랑을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빼어난 경치는 시인에게는 안 좋습니다. 화가에게는 좋을지 몰라도요. 시인에게 풍경은 조금은 빈 곳이 있어야지요. 여기는 완벽할 정도로 아름다워요. 서종면(양평군)에 바치는 헌사지요.”
가만 두면 아마도 밤새도록 경치와 인근 친구들과 집에 대한 자랑으로 줄줄이 이어져갈 것 같았다. 그래서 이야기 허리를 끊고 준비해간 질문으로 돌입했다. 김요일 시인도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최하림 시인을 찾아가니 그곳엔 시인이 다섯이나 살고 있었다. 최하림 시인은 물론이지만, 그의 부인도 시인이었고, 그가 키우고 있는 세 마리 포유류도 시인이었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서 그는 언덕 위에 흰색 이층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지붕은 담홍색으로 이국적이었다.최하림 시인이 서 있는 마당에 자동차가 들어서니 그가 천천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지나고 보면 이 세상은 그 무엇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달은 게 틀림없다. 그는 매우 천천히 걸었다. (김광일) ⓒ계간 시인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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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배를 타고 어렵게 살아온 유·청년 시절
▶ 목포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산이 기울고 엄청 고생을 많이 하신 것으로 돼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떤 일을 하시던 분이셨습니까.
“농사도 하고 장사도 하고 그랬습니다. 아버지 말고 큰아버지께서는 광주학생운동을 하셨지요. 큰아버지는 중학교를 못 가셨지만 머리가 뛰어나셨어요. 큰아버지의 절친한 친구 중에 권수동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가 광주학생운동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독서회 회원이었지요. 두 분이 목포 서부지역 섬들을 조직했습니다. 나중에 그분은 집안이 사촌 육촌까지 싹쓸이하다시피 다 죽어 나갔는데, 우리 집은 아버지가 해방 후 3년 만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하시던 말씀이 ‘사상 하지 마라’는 당부였습니다. 나중에 권수동이란 분의 부인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광주학생운동의 지방조직이 여파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지요. 목포 인근의 섬들뿐만 아니라, 제주까지 뒤져보고 싶은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만 우리 어머니도 6·25가 일어나니 먹고 살 수가 없어서 무진 고생을 하셨습니다. 나도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공장 직공이 돼 있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공장 노동자가 되지 않고 여기까지 오려니 아주 힘들었지요.”
건강했던 80년대 초 시인의 모습.
ⓒ계간 시인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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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목포와 광주 사이의 밤이면 캄캄할 뿐인 국도에 그 생생한 꿈을 묻어두었던 아름다운 청년 최하림”이라고 황현산 교수가 쓴 적이 있습니다.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신문배달 같은 고학으로 점철된 유청년 시절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의 고생은 어떤 내용입니까.
“신문 배달 같은 아르바이트지요. 여름 방학이면 목포에서 생산되는 소금배를 타고 전국 해안을 돌기도 했습니다. 6·25 뒤로는 목포가 소금 집산지였거든요. 광양만 소금이 목포 부근으로 옮아온 것입니다. 고향 간척지에 소금을 해서 소금 부자들도 생겨났습니다. LST 같은 해군 배를 이용해서 소금을 싣고 마산, 삼천포나 주문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소금 가마니를 부리면서 숫자를 세는 역할을 했지요. 지금 떠오르는 장면은, 소금 실은 배를 타고 가는데 낮에 고기들이 따라오더라고요.”
▶ 목포고 시절 교유했던 원동석, 김병곤, 김중식, 윤종석, 정일진 같은 분들이 있다는 기록이 있던데요, 지금 생각나시는 그 시절 친구들이 있습니까?
“미술평론도 하고 시, 소설을 썼던 친구들입니다. 고교 문예반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군대에 갔다 와서 그 시달렸던 경험 때문에 글을, 시를 못 쓰게 된 친구도 봤습니다. 친구 정일진의 집에는 문학 책이 참 많았습니다. 양철지붕 밑 다락방에 누워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같은 책들을 다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때 김요일 시인이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햇살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 옥외 사진을 찍으면 근사할 것 같기도 했다. 마당에는 양몰이 개 콜리종인 세 살배기 올가, 그리고 마르티즈 계통의 잡종견인 다섯 살배기 똘똘이가 놀고 있었다. 눈빛들이 선했다. 최 시인은 특히 키가 작은 똘똘이 자랑이 대단했다.
“어디를 가든 따라옵니다. 내가 차를 타고 속력을 내서 그 녀석을 떨어뜨리면 그 다음 마을을 찾아다닙니다. 산보할 때면 꼭 앞장서서 다니지요. 산보를 안 나서면 거실 창가에 와서 짖습니다. 아침에는 마누라가 산보를 가고 나는 오후 3시쯤 나갑니다.”
《산문시대》 동인지와 김현
1964년 동인지 《산문시대》를 펴내고. 뒷줄 왼쪽부터 최하림, 김현. 앞줄 왼쪽부터 김치수, 이준재, 김승옥. ⓒ계간 시인세계 |
▶ 시인 최하림의 1960년대를 말하면서 김현과 김승옥, 김치수, 곽광수, 염무웅, 강호무 같은 《산문시대》 동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 최하림에게 평론가 김현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김현을 말하자면 동인지 《산문시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겠지요. 처음 《산문시대》는 김현, 김승옥, 김치수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하기로 했던 동인지였습니다. 타이프를 쳐서 내기로 했는데, 그 일을 할 여성까지 구해 놓았습니다. 김현 집이 부자였거든요. 그런데 내가 타이프로는 세상에 내밀기가 좀 그럴 것 같으니 전주에 있는 출판사에서 인쇄로 찍자고 했지요. 그 출판사 이름이 가림출판사였습니다.
김현은 무슨 말인지 금세 알아듣고 동조했습니다. 김현은 참 독특한 능력을 가진 친구였습니다. 세계문학전집에 끼어 있는 명작들도 우리가 이틀 동안 읽어야 할 두꺼운 페이지를 3,4시간이면 다 읽어냈습니다. 밤새 술을 먹어도 새벽이면 일어나 책을 읽었습니다.
그는 생각과 몸이 똑같이 나갔던 친구였습니다. 우리가 발상 정도의 수준에서 얘기를 하고 있으면 그는 벌써 움직이면서 실행에 옮기고 있었으니까요. 김현은 글쓰기로서의 문학과 운동으로서의 문학을 함께 하면서 한국문학을 개신하자는 것이었지요. 문제는 김치수였습니다. 그는 학생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동인지를 인쇄하는 것은 상업성에 물드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빠져 나갔기 때문에 첫 동인지는 김현, 김승옥, 최하림, 이렇게 셋이서 했습니다.”
▶ 전주에 있었다던 가림출판사의 사장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전주에 갔더니 키가 자그마한 김종배 사장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그 분 말씀이 ‘내가 인쇄를 공짜로 해줄 터이니 제본은 너희들끼리 해라’ 하시는 겁니다. 제본까지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산문시대》 4집까지를 공짜로 냈습니다.”
▶ 지방에 있는 출판사라 인쇄가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겠습니다.
“정반대입니다. 그때 전국적으로 서울에 있는 삼화당과 평화출판사의 활자가 제일 좋았는데, 새 활자가 나오니 그 출판사에서 쓰던 것을 전주에 있는 가림출판사에 주었던 겁니다. 그분들이 같은 전주분이었던 거지요. 그래서 가림출판사의 활자는 전국적인 수준으로 봤을 때도 어디에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습니다. 한 번 낼 때마다 300~500부 정도 찍었던 것 같습니다. 책이 팔려 나가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광주에 학원서림이란 책방이 있었는데, 광주 가는 길에 우연히 들렀더니 20부씩 세 번 보낸 책값을 전부 지불해주더라고요.”
▶ 어떤 내용들이 실렸습니까.
“처음에는 소설을 6편 정도 실었습니다. 각광은 김승옥에게 돌아갔죠. 종로통에서 우연히 백철 선생을 만났는데, 승옥이를 불러서 ‘소설 굉장히 좋았다. 단지 경력 때문에 동인문학상에서 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술자리마다 김승옥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내가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던 1964년 시상식 자리에 가니 선우휘 선생이 임중빈 선생과 대화를 나누면서 ‘산문시대가 뭐냐?’고 묻자 임 선생이 ‘내가 얘기할 자리가 아니고 여기 최하림 씨가 있다’고 대답하더라고요. 그러자 선우 선생 말씀이 ‘만나는 사람마다 산문시대 얘기를 하더라’고 합디다.”
▶ 나머지 동인들은 언제 합류했습니까.
“김치수, 염무웅, 곽광수, 강호무는 2집 때부터, 그리고 서정인은 4집 때 합류했습니다.”
▶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는 시집을 보면, 「김현을 보내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별은 멀고/ 밤은 어둡고/ 얼굴은 붉었다”로 이어지는 시입니다. “양수리 물가에 너를 묻어두고/ 고속버스를 타고 캄캄한 길을 달려/ 광주로 일하러 갔다 바람이/ 소리치며 창밖으로 달리고 반고비/ 나그네길이라고 했던 네 책표지가/ 유리창에 나타났다 사라졌다”고 돼 있습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셨습니까.
“김현은 대학 때부터 달랐습니다. 다방에 들어오는 모습조차 달랐습니다. 톱밥을 때는 난로 옆에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얘기하고 있었는데 김현이 끼어들었어요. 그러다가 이야기가 『비극의 탄생』으로 넘어갔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를 따라오지 못하는 측면이 있길래 그 다방을 나와서 옆에 있는 다른 다방으로 갔지요.
우리는 한창 문학에 취해 있었습니다. 발레리를 말하고, 베게트를 토론했지요. 그날부터 만나고 또 만나고 며칠 동안 서로를 끌고 다니다 헤어졌는데 어느날 서울에서 김현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함께 동인지를 하자구요. 그래서 동인을 시작한 겁니다.
김현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후반기 15년 정도는 소원한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김현은 계속해서 문학의 중심에 머물러 있었고, 나는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90년대 말까지는 프로다운 시인은 못됐던 셈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훨씬 화급한 문제였습니다. 사실 시를 본격적으로 다시 쓴 것은 광주에서 직장(《전남일보》 논설고문직) 그만두고 충북 영동으로 이사한 후로 오늘까지입니다.
김현이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만도 했지요. 공개적으로 나를 비난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김현이 내 맘에서 떠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떠난 뒤에도 나는 그의 꿈을 여러 번 꾸었습니다. 김병익에게 그 꿈 이야기를 했더니 김현의 꿈을 꾸었다는 사람이 더러 있더라고 하더군요. 김현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저 평범한 시골 문사로 그쳤을지 모릅니다. 이후의 내 문학은 김현의 추동력에 의해 빚어진 것이라 해도 됩니다.”
나에게 ‘창비적’ 요소가 많았던 것은 사실
▶ 그런데 광주에 있다가 왜 충북 영동으로 이사를 가셨습니까.
“광주에 함께 살자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5·18 이후 많이 거칠어져서, 나는 앞으로 시를 쓴다는 생각은 안 하고 그냥 조용히 숨어 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 가는 것이 내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를 조금씩 쓰게 됐고, 청탁 오면 용돈 벌려고 또 시를 쓰고 하게 됐지요.”
▶ 평론가 김치수는 말했습니다. 두 번째 시집 『작은 마을에서』의 해설을 통해서입니다.
“최하림은 우리 시단을 주도해왔던 두 경향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순수와 참여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시의 완성이라는 목표에 연결시키려 했다.”고 말입니다.
최하림 시인은 우리 시대의 다난한 역사의 현장을 크게 벗어난 적이 없지만, ‘논의의 중심’에 들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시의 중심’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황현산 선생도 다시 인용했더군요. 최 선생님께서 이 말에 동의한다면, 이 경우 논의의 중심과 시의 중심은 어떻게 다른 겁니까.
“논의의 중심은 생각 안 해 봤는데, 시의 중심은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와 현실은 ‘창비적’ 요소가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발레리로부터 시작했지만 발레리적인 것이 내 목소리일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 나는 발레리의 「젊은 빠르크」와 「해변의 묘지」 등을 읽다가 한계를 느끼고 발레리의 초기시인 「구시첩」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희’라든지 ‘내면’ 같은 이미지를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말’이라는 명제에 처음 부딪친 것입니다. 우리 말은 우리 현실과 우리 문화와 우리 역사를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나의 시는 가난한 내 현실의 목소리로 말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발레리의 역반응으로 눈을 뜬 셈입니다. 시가 어려워서는 안 되겠다, 지금껏 내가 쓰던 것들을 지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내 개신 작업과 더불어 우리 역사를 굉장히 열심히 읽었습니다. 역사책이라면 죄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창비>에서 첫시집을 냈습니다. 「60년대 시인의식」과 「시와 정신」을 발표한 뒤, 어느날 백낙청 씨가 내게 말하더군요.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됐다구요. 내가 <창비>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창비와 내 거리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런 작업이 내 ‘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논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 그러면서도 최하림 시인의 작품에는 또 다른 요소, 그러니까 좀더 근대적 서정으로 진전해 들어가는 요소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창비에서 시집을 내고 70년대 말까지는 동행을 했던 셈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내 시세계가 살아 있었던 거죠. 김규동 시인이 한번은 내게 와서 ‘최형 시에는 모더니티한 면이 많다. 그 점이 좋다’고 말씀하십디다.”
▶ 90년대 후반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라는 시집을 보면 「시를 태우며」라는 시가 나옵니다.
“밀면 돌멩이가 되어/ 가는 불빛에도 흔들릴/ 석불로나 돌아가 웃을까/ 동서로 떠돌며 노래부를까// 나는 시 써서 시인이고 싶었건만/ 오늘은 느티나무 아래 시들을 모아/ 불태우네 점점이 날아가는 새들과/ 아직 체온이 남은 기억들 그리고/ 지평선에 떠도는 그림자들…”이라고 돼 있습니다.
또 뒷표지에 적은 글에는 “나는 사라지는 내 시의 그림자들을 꿈결인듯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이만쯤에서 나는 내 시의 로프줄을 끊어버리고 싶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때 심정은 마치 문학적 잠적이나 소멸 혹은 절필을 결심하려는 듯한 심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심중 자체를 시의 소재로 삼는 방식으로 가늘디가는 시 정신의 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내부 외부 풍경을 다시 좀 떠올려 주시지요.
풍경이라는 것에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통로가 있어
“충북으로 갈 때 시 쓴다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시로부터 떠난다,고 생각했고, 발레리를 떠나서 ‘현실’로 건너가는 과정에는, 그 ‘현실’과 마주서야 한다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긴장이 점점 흐려져 갔습니다. (최 시인은 1991년 고혈압으로 쓰러졌었다)
내게 아무런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 나다운 생각들, 그러니까 역사가 발전하는가, 역사도 후퇴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그런 생각들이 다 날아가 버리더라고요. 실제로 너무 피곤하고, 이름도 없이 숨어 살고 싶었습니다. 머리카락도 내밀기 싫었지요. 절절한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보니 시를 쓰고 싶다, 는 염원이 가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유리창 너머 풍경을 보았습니다. 풍경은 살아 있었습니다.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풍경은 배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배후는 시간으로 말하자면 과거 같은 것이고, 고향 같은 것이고, 그림자 같은 것이고, 여백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 마음도 몸도 풍경 속으로 나아갔습니다. 가면 갈수록 풍경의 진폭은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 평론가 김수이는 최 선생님의 최근 시집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를 읽고 나서 「겨울 언어의 시, 시간과 사유의 평행/대립 구조」라는 글을 썼습니다. 결론은 이 시집을 보면 사유의 고정점이 이동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담백한 풍경화를 그려내는 듯하지만, 그곳에는 세계를 차지하려는 시인 자신과, 또는 그 세계 속에 함몰되려는 시인 자신이 충돌하면서 일종의 고정점이 생기고, 그 고정점이 이동하고 있는 현상이 읽혀진다는 것입니다. 극도로 각성된 정신을 가지고 수릉리와 서후리의 풍경을 무심하게 담아내는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니면 치밀하게 의도한 것입니까.
“풍경이 폭을 늘려간다는 것은 사유를 늘려간다는 것입니다. 충북 영동에 살 때 유리창을 열면 금강 건너 산들이 보였습니다. 하루 풍경을 내내 보고 있는데,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이라는 것이 서로 움직이고, 서로 작용하고, ‘그러함’으로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앞산 너머로 아침해가 떠오르면 햇빛은 나무 이파리를 타고 내려와 바람과 그늘을 끌어옵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풍경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시간의 작용을 받아들입니다. 움직이는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것도, 생각이 점점 날아가 버리고 빈 몸이 되어 보고 있는 슬픈 시선이지요. 비극적 시선에 이른 것이지요. 빈다는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슬픈 것 아닙니까. 빈 공空이라는 한자는 차갑다는, 식었다는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특히 가을 깊어 나무 이파리들이 거느리던 풍경의 배후가 훤히 보일 때는 나는 그 배후에서 내가 끌고 온 검은 그림자와 내 고향을 봅니다. 나와 풍경이 하나로 겹쳐집니다. 시간의 ‘이동’이라는 것이 내 시에서 중요한 면을 갖게 되는 과정입니다. 풍경에 시간이 개입되면서 긴장을 띠게 된 것입니다. 동양의 시들은 ‘찰나’를 굉장히 중시하는 면이 있습니다. 나도 그러합니다.”
시는 내게 기도입니다
▶ 최 시인께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역사 동화를 많이 쓰고 계십니다. 그토록 역사에 강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역사 동화라기보다는 민화 동화입니다. 출판을 하면서 보면 어느 나라든 전래 동화는 뛰어난 시인들이 씁니다. 그림 동화, 안델센 동화도 시인이 새로 썼습니다. 새로 쓸 때는 재창작을 하는 면이 많습니다. 일본에서도 폴란드에서도 그런 일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줄거리만 갖고 계속 반복해서 새로 쓰는 겁니다. 새롭게 읽을 수 있는 그 수준의 감성으로 끌어올려야만 합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위해 그러한 작업이 있어야 합니다.”
▶ 지금까지 이사 다닌 행적을 조금 말씀해 주십시오. 서울, 광주, 호탄리, 양수리 등등요.
“서울에서 살다가 1988년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전남일보》 창간에 간여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 충북 영동의 호탄리로 이사를 했습니다. 거기서 4년을 살고, 2001년에 이곳 양수리로 온 겁니다.”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멀어져 간다, 라는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멀어져 가면 안 됩니까. 시는 꼭 사랑해야만 합니까. 시를 미워하면 안 됩니까.
“시라고 하는 것이 진정성의 회복이니 그 작업이 멀어져 간다고 할 때, 세상이 탁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 시는 왜 쓰십니까.
“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예요. 우리 잘 살게 해주십시오,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인간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는…….”
▶ 최 선생님께서는 어느 인터뷰(《연합신문》, 2005년 6월 9일자)에선가 “시란 삶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잖습니까(김요일).
“(슬쩍 당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듯했다.) 아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어요.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나의 아이들보다 중요치 않다는 뜻으로 얘기했겠지요. 혹은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였겠죠.”
▶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었을 것 같습니까.
“옛날 어렸을 때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외에는 별로 되고 싶은 게 없습니다. 요즘에는 간간이 건축가나 식물학자가 되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식물학자가 더 적성에 좋겠네요. 나라는 인간이 워낙 식물적인 인간이잖습니까.
집에서 하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런데 정원 일을 할 때는 엄청 부지런합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그랬습니다. 1학년 때 아버지에게서 받은 노트 한 묶음과 연필 한 다스를 꽃하고 바꿔 와 화단을 꾸몄던 적이 있습니다.”
▶ 오늘 아침에 북한의 핵실험이 공식 발표됐습니다. 시인으로서 북한 핵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한반도의 주민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시하고 가장 먼 곳에 있는 물건이 아마 핵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민족의 재앙이겠죠. 그런 큰 문제에 대해서는 개개인이 반응하기보다는, 상황 진행 속도에 따라 깊이 생각해야 되겠지요.”
풍경 속에 녹아 있는 시인의 눈
▶ 정치와 시, 혹은 민족과 시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에는 그 문제를 함께 생각했습니다. 현실의 장에서는 특히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시라는 것은 정치적 상상력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국경선이 시에는 없는 것이지요. 시의 본질적인 상상력은 그 국경을 초월해야 합니다.”
▶ 팔의 근력이 떨어지고,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맑은 기운이 떨어져 나가기 전에 반드시 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있으십니까.
“없어요. 근력이 소진되는 만큼 내 생각도 소진되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죠. 죽는 연습이 이루어져야 하니까.”
▶ 하루 일과를 말씀해 주십시오. 일주일 단위로 해도 좋고요.
2005년, 마당에서 키우는 개 올가와 함께. ⓒ계간 시인세계 |
“아침 6시 정도에 일어납니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거실 창을 바라봅니다. 문호리는 안개가 참 많아요. 풍경이 안개 속에 담겨 있습니다. 새 소리도 듣고, 7시 반쯤 아내가 개를 데리고 산보 갑니다. 아내와 개들의 뒷모습을 봅니다. 8시쯤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마당으로 나갑니다. 새 소리를 듣습니다. 개들을 데리고 아내가 돌아오면 차를 한 잔 마시고, 아침 먹고 2층으로 다시 올라갑니다.
그리고 책을, 음, 지금은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책을 보는 편인데, 책을 좀 봅니다. 다시 내려와 마당을 돌아다니면 한낮이 갑니다. 저녁 어스름이 올 때면 불을 안 켭니다. 불을 안 켜면 눈이 피로하지가 않습니다. 그 시간에는 우리가 보든 안 보든 불덩어리 같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갑니다.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어쩌다가…… 어려서는 엄청 고생했는데…… 말년에 이런 풍경이 내게 오다니…… 너무 좋습니다…… 내 침실에는 눈썹 같은 긴 창이 있는데 밤이면 달을 보고 별을 봅니다. 하느님이 너 고생 많이 했으니 말년에 좋은 풍경을 보고 살아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요새는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없습니다.”
▶ 이렇게 좋은 집을 지으셨으니 이걸로 끝입니까.
“내가 5년만 젊으면 이런 집을 하나 더 짓고 싶습니다. 이곳 풍경만큼 좋은 곳이 있으면 하나 더 짓고 싶습니다.”
양평군 서호면에 자리잡은 최하림 시인의 집. ⓒ계간 시인세계 |
▶ 가족들은 어떻게 되십니까.
“딸 둘에 아들 하나 있어요. 큰딸 승구는 음악 관계 회사에 다니고, 둘째딸 승린이는 웹사이트 관련 회사에 다닙니다. 둘 다 서울 살아요. 그리고 큰사위는 작곡하는 사람이고, 둘째사위는 ‘적절한 부자’입니다. 아들 승집이는 제일모직 다닙니다. 그 밑에 세 살배기 손녀 최명서가 있습니다. 마누라는 장숙희입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지요.”
▶ 결국은 건강을 돌보는 것이 삶을 근본적으로 영위하는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말입니다.
“나는 내 붉은 얼굴을 보면서 죽고 싶습니다.”
주섬주섬 펜 뚜껑을 닫고, 노트를 접고, 저고리를 집어들었다. “저, 선생님, 어디 근처에 밥 맛있는 집으로 가서 소주나 한잔 하시지요.”라고 청을 넣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는 이미 졌다. 부인에게 같이 가시자고 권했으나 한사코 집에 남겠다고 했다. 바로 이웃에는 그녀의 여동생이 들어올 예정인 새집이 완공 단계에 있었다. 부인을 남겨 놓고 우리는 인근에 있는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녁 자리에서 최 시인은 눈매와 목소리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한 20년은 젊어진 듯 활기찼다. 그는 술병을 쥔 사람이 겁이 날 정도로 경쾌하게 잔을 비웠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의 산골짜기에 묻힌 최하림 시인은 점차 다른 경계를 설정하고 사는 듯했다.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과 다른 체온과 다른 눈과 다른 귀와 다른 입을 달고, 이 세상을 매섭게 응시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얼마나 큰 일들을 꿈꾸고 있길래 “요즘 아무 일도 안 하고 살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김요일 시인과 옆자리의 동승자(필자)는 최하림 시인의 그 꿈들을 염탐하는 데 실패한 스파이들처럼 괜히 쓰잘데기 없는 정치 이야기나 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김광일 서울대 불어교육과 졸업.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 논설위원, 문화부장 역임. 현재 편집국 부국장. 저서 『우리가 만난 작가들』 『책을 읽은 다음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간지럽고 싶다, 한없이』『시보다 매혹적인 시인들』.
문화로 하나되는 세상, 대한민국 NO.1 문화예술언론 <문화저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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