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도와 활 - 지한과 혐한 사이
채명석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6년 8월
품절


도조 히데키/세이난 전쟁(1877년)의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칠지도 명문 훼손/광개토대왕비문 날조/김지섭 의사와 박열 의사/일본의 성과 이름이 서양식으로 바뀌고 있음(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서양인들에게 준이치로 고이즈미로 표현되는 이유는...)/후쿠자와 유키치(탈아론의 주창자)/일본의 진보적 문화인 그룹 '9조회'(멤버 이노우에 하사시, 우메하라 다케시, 오에 겐자부로, 오쿠리하 야스히로, 오다 미노루, 가토 슈이치, 사와지 히사에, 쓰루미 šœ스케, 미키 무쓰코)/재일 코리언 청년연합(www.key-j.org)/보신 전쟁/요시다 쇼인/니토베 이나조의 <부시도>/하가쿠레 무사도(떡을 훔쳐먹었다는 누명을 쓴 아들의 배를 갈라 결백을 증명한 후 떡장수를 죽이고 자신도 배를 가른 사무라이의 일화. 셋푸쿠(할복))/미시마 유키오/-메모쪽

오에 시노부의 책 <야스쿠니 신사>(암파신서, 1984)에 따르면 일본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신앙은 전래의 토속신앙이었던 위령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령 신앙은 "생전에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역병을 비롯한 재해를 가져온다는 공포심에서 영혼의 활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위령제를 지내야 한다"는 신앙이다. 막부 정부를 무너뜨리고 1868년에 등장한 메이지 정부도 이 위령 신앙에 입각해 메이지 유신 전후의 내란에서 사망한 전몰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메이지 2년(1870년)에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 자리에 도쿄 초혼사를 지었다.(중략) 야스쿠니 신사가 국민 통합의 커다란 정신적 지주로 발전한 것은 러일전쟁 이후이다. 러일전쟁이 끝난 뒤 야스쿠니에는 전사한 일본군 약 8만 8천 명의 명단이 위령자 명부에 등재되었다. 따라서 러일전쟁에서 사망한 이들의 유가족들이 대거 야스쿠니를 참배하게 되었다.(중략)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죽으면 반딧불이 되어 야스쿠니 신사로 돌아간다는 야스쿠니 신앙을 굳게 믿고 육탄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 좋은 예이다.-52쪽

'신국(神國)'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이다. 즉 신공황후 섭정 전기에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자 신라왕이 동쪽에 신의 나라가 있어 일본이라고 하며, 성황이 있어 천황이라고 한다. 필경 여기에 온 군사들은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라며 복종을 맹세하고 보화를 실은 배 80척을 바쳤다."고 기술되면서 '신국', '신병'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다. 8세기 초에 날조된 이 신공황후의 '삼한정벌론' 또는 '신라정벌설'이 1천3백 년에 걸친 한반도 침략과 그들의 우월의식의 근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83쪽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한국 출신자는 모두 2만 1,181명에 이른다. 주로 태평양전쟁 때 군인, 군속으로 끌려갔다가 사망한 사람들이다.(중략) 야스쿠니에 한국인 전몰자가 합사되어 있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78년경이다. 그 후 일본 정부가 1991년에 통보해 온 태평양전쟁 사망자 명단이 단초가 되어 야스쿠니에 합사된 한국인들의 신원이 밝혀졌다.(중략) 일본 정부는 패전 후 A, B, C급 전범으로 몰려 처형된 일본인 유족들에게는 유족 연금을 지급하는 등 각종 혜택을 베풀었다. 반면,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았다. 게다가 B, C급 전범으로 몰려 사형 언도를 받았다가 운 좋게 풀려난 한국인들 중에는 친일파라고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두려워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일본에 그대로 눌러앉은 사람들이 많았다.

;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사람들...-91쪽

조몬 시대 후기(BC 3세기경)에 일본의 전체 인구가 약 16만 명, 야요이 시대(BC 2세기경)에는 약 59만 명이던 것이 나라 시대(752년)에는 45만 명, 헤이안 시대 말기(1150년)에는 약 683만 명으로 급격히 늘어난 것을 보면 "상상 이상으로 대량의 도래인이 유입되었으며, 그들이 왜 문화의 기초를 만들었다."는 주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유입설이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되지 않는 것은 입장과 관점의 문제일까? -225쪽

보신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나가오카 번이 처한 상황은 지금의 일본이 처한 상황과도 엇비슷하다. 방위비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교육비는 계속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이즈미 총리가 속해 있는 모리파 회장 모리 요시로 전 총리는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2004. 10. 16)에서 쌀 백 섬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이렇게 고이즈미 총리를 질타했다.
"어떻게든 (의무교육 국고 부담) 3조 엔을 삭감하겠다면 정부 전체에서 3조 엔을 각출하면 된다. 교육을 중시하고 다른 것은 인내하고 아픔을 나누자 하면 명재상이다.(중략) 총리는 오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와는 30년지기이지만, 나는 총리가 교육의 '교'자도 들먹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마 그 사람은 교육관계 회의나 부회에 나온 적도 없을 것이다."
- 고바야시 토라시부로를 추어올리면서 교육비를 깎으려는 고이즈미 총리의 이중성 비판-298쪽

정경숙은 잘 알려진 대로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자 마쓰시타 코노스케가 사재 70억 엔을 들여 만든 인재양성 학교이다. 1980년 4월에 제1기생 30명을 모집한 이래 약 3백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21세기 일본의 번영을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마쓰시타의 설립 철학이 1백여 년 전의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를 닮았다고 해서 정경숙은 '현대판 쇼카손주쿠'라고도 불린다.(중략) 마쓰시타가 주장하는 번영 철학의 최종 목표는 팍스아메리카나에 갈음하는 팍스 자포니카의 달성이다.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의 정치가들이 바로 팍스 자포니카의 충실한 구현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304쪽

책(<부시도>)이 유명해지자 니토베도 교토 대학 교수, 일고 교장, 유엔 사무차장으로 출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일본이 그 후 군국화의 길로 치닫자, 니토베의 구도적인 '부시도'보다는 "무사의 본분은 죽는 길을 찾는 것이다."라는 전투적인 '하가쿠레 무사도'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하가쿠레 무사도에 심취한 군국 청소년들이 대량으로 육성되었다. 육군의 가미카제 특공대, 해군의 인간 어뢰 특공대가 그 전형이다. 인류에 축복을 내릴 것이라는 무사도가 인류의 재앙으로 돌변한 것이다.
군벌과 군국주의가 장차 인류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비판한 니토베도 온갖 핍박을 받고 도앙치듯 캐나다로 이주했다가, 그곳에서 쓸쓸히 객사했다. 니토베의 책을 일본어로 번역한 야나이하라 타다오는 중국 침략을 비판하다가 도쿄 대학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일본이 이라크에 대규모 부대를 파병한 것과 때를 같이해서 니토베의 초상도 5천 엔권에서 사라졌다.-310쪽

방위청은 지난 2000년 5월 미시마가 자결한 이치가야 주둔지 즉 옛 육군성 자리로 청사를 이전했다. 총공사비 약 2천5백억 엔을 들여 완공한 신청사는 록폰기 구청사의 세 배 규모(23헥타르)로, 본건물이 지상 19층, 지하 4층에 달한다. 방위청은 또 내각부 직속의 '청'에서 독립된 '성'으로 승격을 꿈꾸고 있다. 전쟁 전의 육군성보다 규모가 몇 갑절 크고, 훨씬 중후하게 단장된 새로운 육군성 건물의 웅자를 보면 지하의 미시마도 매우 흡족할 것이다.-315쪽

오키노도리시마는 태평양에 떠 있는 두 개의 암초이며, 그중 수면 위로 내밀고 있는 부분은 각각 1미터, 9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일본은 2백 해리 경제수역을 확장할 속셈으로 물경 285억 엔을 들여 철제 블럭 9천9백 개를 쌓아 이를 인공섬으로 조성했다. 국제법상 일본의 영토임을 알리기 위해 등대도 설치할 계획이다. 이 암초에는 현재 '일본국 최남단의 섬'이라는 간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도쿄 도의 이시하라 지사는 여기에 전격 상륙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시하라의 다음 목표는 다케시마, 즉 독도이다.-321쪽

일본이 전수방어 원칙을 무시하고 전진방어 또는 선제공격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은 김일성 부자의 탓만은 아니다. 아버지 부시는 1991년 걸프 전쟁이 일어나자 경제력에 걸맞는 부담을 지라고 일본을 닦달했다. 일본은 걸프 전쟁에 드는 총비용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30억 달러를 거출했다. 하지만 막대한 전비를 각출했음에도 '현금 자동 인출기', '1국 평화주의'라는 욕만 얻어먹게 되자 일본은 헌법을 확대 해석하여 페르시아 만에 소해 부대를 파견했다. 해외 출병이란 금기가 처음으로 깨지는 역사적 순간이다.
아들 부시는 이라크를 공격한 후 전후 복구를 위해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고이즈미 정권은 2003년 7월 이라크 부흥지원특별조지법을 제정하고, 자위대 사상 처음으로 전투지역에 중무장한 육해공 자위대 병력을 파견했다. 게다가 헌법에서 집단적 자위권행사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데도 현재 육상 자위대는 이라크 사마와 지역에서 다국적군의 지휘와 통제를 받으며 활동중이다.-337쪽

자위대에 대한 헌법 해석도 빠른 속도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는 1950년 7월 중의원 본회의에서 "경찰 예비대는 군대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또 1951년 10월의 참의원 본회의에서는 "헌법 9조의 전력은 육해공군과 그것에 필적하는 전쟁 수행 수단으로서의 힘을 의미하며, 자위를 위한 필요 최소한의 전력이 바로 자위대"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1980년 11월 중의원 특별위원회에서 "국제법상 자위대는 군대"로 변경되었으며, 고이즈미 총리는 2003년 5월 참의원 특별위원회에서 "자위대는 실질적인 군대"라고 못을 박았다. 전쟁을 포기했다는 평화헌법이 어느새 실질 군대를 갖고 있는 전쟁헌법으로 변질된 것이다.-338쪽

실제로 독도 근해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지면 미국의 태도가 중요한 관건이다. 중국인 활동가 그룹이 센카쿠 제도에 상륙을 강행한 사건이 일어나자(2004. 3), 미 국무성 보도관은 "센카쿠는 실제로 일본의 시정 하에 있기 때문에 미일 안보조약의 공동방어 조항은 이 섬에도 적용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중국이 만약 센카쿠 제도를 침공하면 미국은 일본 편을 들 것이라는 약속이다.(중략) 한편 일본과 안보조약을 체결하고 있는 미국은 한국과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따라서 한일 두 나라의 독도 영유권 분쟁이 무력 충돌로 번지면 미국은 중립을 취하는 길이 현재로선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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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시대 - 출판인 한기호의 열정 인생
한기호 지음 / 교양인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도산 안창호 선생은 좋은 책 한 권이 학교 하나를 세우는 것과 같다고 했다.'(내용 중에서) 

규모가 일반 기업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업종인 출판업, 그래서 각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뤄지는 '출판업'의 이미지는 냉혹한 사회현실과는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비경쟁적이거나 순수(또는 순진?)하다는 이미지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시대와 문화의 '반영이자 모색'이기도 한 출판업계는 그 포괄적 역할과 기능에 비해 냉혹한 현실논리가 작용하고 있는 생존의 격전장이기는 여타 업종과 마찬가지다.(이 책에서 여실히 확인될 것이다) 현실적 기반이 부실한 업계에서 '문화의 파수꾼'이라는 나름의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인생역정은 존경할 만하다.

'나는 지금도 그의 글(홍세화 선생)을 읽을 때마다 출판 현장의 야전사령관으로 돌아가 옛날처럼 일하고 싶다는 열망이 치솟곤 한다. 하지만 언제쯤에나 나는 그럴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잡지 못할 것인가?'

저자 개인뿐만 아니라 파수꾼일 수도, 첨병일 수도, 야전사령관일 수도 있는 많은 출판종사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기록이라고 보인다.(수많은 문장과 그 의미로 가득 찬 '글밭'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엘리베이터 스피치'의 의미는 신선하다)

무형의 '학교를 세우는 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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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인의 유서 - 장재인은 저자 한기호의 대학 친구로, 1990년 9월에 발생한 섬강교 버스 추락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사람이다. 당시 물에 빠진 아내는 어느 청년에게 아들 호를 부탁하고 헤엄쳐 나왔는데 아들이 못 나온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검붉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다시는 못 나오고 말았다고 한다)

'생사의 차이가 이리도 간결한 것을 무던히 애를 쓰며 살아왔습니다. 하늘이 지워주신 짐의 무게와 고뇌의 깊이를 용케도 감내하더니 자그마한 행복의 기억들과 함께 이제는 모든 짐을 벗겨주십니다. 험한 삶을 위로하던 처자는 모질게 살다 희망의 입구에서 스러지고 차마 간직할 수 없는 가엾이 고운 추억들만 남겨주었습니다.
세상을 붙잡으려다 처자를 버리고 이제는 처자를 부여안기 위하여 세상을 버리려 합니다. 불행한 사람의 삶에 뛰어들어 고생만 하던 고마운 아내, 아들의 뒤를 따라 다시 강으로 뛰어들어 갔다는 아내처럼 저도 처자를 찾아 떠나려 합니다. 이것은 사고 현장에 도착한 이래 강물을 바라보며 제 마음에 살아오는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행여 살아남아 보람된 일을 해야 한다는 생의 의무감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저의 세 식구가 지닌 쓰라린 사랑의 메세지보다 더 생생한 경종이 어디에 있겠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일깨우고자 하는 생을 초월한 선택이 어찌 소극적인 결심일 수 있겠습니까?'
- 장 재 인

출처 : 한기호, <열정시대>, 교양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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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0-0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퍼요ㅠ.ㅠ
 
열정시대 - 출판인 한기호의 열정 인생
한기호 지음 / 교양인 / 2006년 9월
절판


하지만 국내 도서유통업계는 여전히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종로 5가의 대학천 골목에서 지게를 지고 책을 나르는 구조로는 그 같은 물량의 확대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해보고자 공동창고제, 충판사와 서점의 공동협의체 구성, 일원화 공급안, 변칙영업 철폐 같은 여러 방안이 우후죽순 제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출판사들은 '한탕주의'에 빠져 있었다. 밀리언셀러라는 산을 나라고 오르지 못하란 법이 있난 하는 심리가 팽배했다. 그때 나는 <대형유통기구의 정착으로 기대되는 유통구조 현대화>(계간 <책마을>, 진명서적, 1991년 겨울호)라는 글을 썼다.-98쪽

지금이야 고치기 쉽지만 문선과 정판을 거치던 때에 외주 제작을 하는 입장에서는 많이 고치면 좋은 말을 듣기 어려웠다. 때로는 미처 글을 쓰지 못해 달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렇게 휘갈겨 쓴 글은 문선공들이 고칠 곳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뽑아냈다. 오히려 깔끔하게 정서한 글은 제대로 문선되지 않아 수없이 고쳐야 했다. 나중에야 그 원인을 알아냈는데 난삽한 글은 고참에게 맡기고 깨끗한 글은 견습공에게 맡겼던 것이다.-144쪽

(장재인의 유서 - 장재인은 저자 한기호의 대학 친구로, 1990년 9월에 발생한 섬강교 버스 추락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사람이다. 당시 물에 빠진 아내는 어느 청년에게 아들 호를 부탁하고 헤엄쳐 나왔는데 아들이 못 나온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검붉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다시는 못 나오고 말았다고 한다)

'생사의 차이가 이리도 간결한 것을 무던히 애를 쓰며 살아왔습니다. 하늘이 지워주신 짐의 무게와 고뇌의 깊이를 용케도 감내하더니 자그마한 행복의 기억들과 함께 이제는 모든 짐을 벗겨주십니다. 험한 삶을 위로하던 처자는 모질게 살다 희망의 입구에서 스러지고 차마 간직할 수 없는 가엾이 고운 추억들만 남겨주었습니다.
세상을 붙잡으려다 처자를 버리고 이제는 처자를 부여안기 위하여 세상을 버리려 합니다. 불행한 사람의 삶에 뛰어들어 고생만 하던 고마운 아내, 아들위 뒤를 따라 다시 강으로 뛰어들어 갔다는 아내처럼 저도 처자를 찾아 떠나려 합니다. 이것은 사고 현장에 도착한 이래 강물을 바라보며 제 마음에 살아오는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행여 살아남아 보람된 일을 해야 한다는 생의 의무감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저의 세 식구가 지닌 쓰라린 사랑의 메세지보다 더 생생한 경종이 어디에 있겠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일깨우고자 하는 생을 초월한 선택이 어찌 소극적인 결심일 수 있겠습니까?'
- 장 재 인-158쪽

언젠가 누군가에게 내 인생에서 백낙청 선생이 끼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는 짧은 시간에 상대를 설득하는 것을 '엘리베이터 스피치'라 한다고 알려줬다. 할리우드의 영화감독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제작자를 설득한다고 한다. 아무리 높은 빌딩이라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시간은 매우 짧다. 그 짧은 시간에 제작자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3분력'이라는 말과도 통한다.-237쪽

책의 완성도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훈수를 두고 싶었다. 그때 영업부장은 다리의 인대가 끊어져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래서 병문안을 가서 책에 대한 의견을 늘어놓고는 나 같으면 2만 부를 찍겠다고 말했다. 또 우수 고객의 생일날 책 선물을 하는 한 카드회사에 이 책이 선정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 카드회사에는 한 영업사원이 다녀왔는데 할인율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길래 '그런 일에 나서는 사람은 사장 대행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 회사에 대한 애정을 갖고 직접 판단하라'고 말했다. 그 카드회사에는 월 800부 정도를 73퍼센트에 납품하기로 약정을 맺었다. 1년에 1만 부 판매가 가능해진 것이다.-244쪽

그날 정 선생(북디자이너 정병규 선생)은 지난해 말에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이상하게 연이어 몇 사람이 작고했는데그들의 대표작이 서너 개밖에 되지 않더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을 통해 미뤄 짐작해보면, 당신도 작고한 디자이너처럼 대표작은 이미 만들었다. 그러데 지금 수준 이하의 한국 출판물들에 '껍데기(표지'나 씌어주고 있다. 또 직원들은 자신의 지시도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 표지 작업은 컴퓨터로 장난쳐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래서 우리는 언제 일본에서 선물 받은 책 같은 것을 즐겁게 만들어볼 수 있겠는가? 그런 자괴감이 결국 컴퓨터를 부숴버린다는 말로 이어졌던 것이다.-250쪽

이때 우리나라는 IMF 관리체제로 들어갔다. 어급한 것처럼 IMF 이전에도 서적 도매상의 도산이 줄을 이었다. 1996년 2월 의정부 제문서점을 신호탄으로 해서 4월에 창원 사림문고, 5월에 목포 한림, 6월에 광주 삼일, 9월에 광주 종합, 10월에 광주 호남과 동대문 문영이 무너지는 등 도매상 도산이 줄을 이었다.
해가 바뀐 1997년에도 나쁜 상황은 이어졌다. 4월에 천안 동방과 제주 탐라가 무너진 것을 시작으로 6월에 창원 경남도서유통과 동대문 청송, 7월에 목동 한솔과 동대문 청호, 12월에 양재동 용천, 광주 광우, 광주 용문, 평택 국민도서 등 크고 작은 도매상의 부도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도매상 부도는 그래도 잔매에 불과했다. 1998년 1월에 신촌의 좋은책들과 동대문 신광이 무너지는 것으로 호흡을 조절하더니 강력한 카운터 펀치 두 대가 작렬했다. 1998년 2월 2일에 39년 역사를 이어온 업계 2위의 송인서림이 최종 부도 처리되고, 2월 28일에는 다시 공격적 영업을 펼치던 업계 1위의 보문당이 무너지면서 출판업계는 공황 상태로 접어들었다.-255쪽

회의를 한참 진행하는데 송인의 송택규 사장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송 사장은 회의 도중 집행위원들이 직원을 30퍼센트 감원하라는 말을 듣고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뜬 것이었다. 다시 나타난 그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새빨갰다. 그리고 '직원들 상여금을 없애고 월급을 30퍼센트 깎으라는 것도 모두 수용하겠다. 모든 재산을 하나도 남김 없이 채권단에 내놓겠다. 하지만 직원들 내보내라는 이야기는 정말로 하지 말아 달라'고 읍소하다시피 했다. 내가 잘못해서 부도가 났는데 죽어라고 일만 한 직원들을 이 엄동설한에 어떻게 내보내냐는 그의 말을 채권단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송택규 사장을 마음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위기의 순간에도 자신보다는 직원들의 안위부터 생각하는 그분의 진심이 결국 송인을 다시 살려낸 것이다.-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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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골프 세상 - 위풍당당 오감자의
최민아 지음 / JNC북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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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에게서 예찬을 듣다 보면, 늘 환경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왜 갑자기 골프붐이 불어서 이 땅 어디에나 속속 골프장 개발붐에 시달리고, 골프장 하나에 들어가는 연간 농약살포량이 이 땅을 황폐화시키지 않느냐 등등... 대충 화제를 돌리는 데에는 유익한 수단이다.('저 친구는 이야기가 안 통하는군'^^;) 그런데 예를 들어 셋이 만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이 마침 관심이 커가고 있는 골프예찬론자일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지간한 이야기로는 그 분위기를 바꾸지 못한다. 환경오염 대체에 대해서는 자못 전문가 수준인 경우도 있다.

이제 TV에서는 관심만 있으면 하루에도 꽤 오랜 시간을 골프중계를 볼 수가 있고, 일부 학부모는 자녀의 '출세' 방편으로 적극 강요하기도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 이 땅의 '골프현상'이다. 왠만한 룰과 용어들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경기방식은 극히 단순하지 않은가?), 그런 자리에서 왠지 '외계인' 취급을 당하기도 해서 관련 종사자의 에세이 한 권을 읽어 보았다.

이 책은 골프 관련 유명 싸이트에 연재한 '캐디'직 젊은 여성의 경험담이다. 인터넷 상에 올라온 글이기에 짧은 글들도 줄임말이나 비문 등 상당히 인터넷스럽다. 생경하기도 하지만 필드에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인터넷에 올린 글이고, 재미 중심의 글쓰기여서 '골퍼들의 천태만상'이거나 '골프장의 작은 일화' 등이어서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뭘 바랄까?' 하면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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