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 히데키/세이난 전쟁(1877년)의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칠지도 명문 훼손/광개토대왕비문 날조/김지섭 의사와 박열 의사/일본의 성과 이름이 서양식으로 바뀌고 있음(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서양인들에게 준이치로 고이즈미로 표현되는 이유는...)/후쿠자와 유키치(탈아론의 주창자)/일본의 진보적 문화인 그룹 '9조회'(멤버 이노우에 하사시, 우메하라 다케시, 오에 겐자부로, 오쿠리하 야스히로, 오다 미노루, 가토 슈이치, 사와지 히사에, 쓰루미 스케, 미키 무쓰코)/재일 코리언 청년연합(www.key-j.org)/보신 전쟁/요시다 쇼인/니토베 이나조의 <부시도>/하가쿠레 무사도(떡을 훔쳐먹었다는 누명을 쓴 아들의 배를 갈라 결백을 증명한 후 떡장수를 죽이고 자신도 배를 가른 사무라이의 일화. 셋푸쿠(할복))/미시마 유키오/-메모쪽
오에 시노부의 책 <야스쿠니 신사>(암파신서, 1984)에 따르면 일본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신앙은 전래의 토속신앙이었던 위령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령 신앙은 "생전에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역병을 비롯한 재해를 가져온다는 공포심에서 영혼의 활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위령제를 지내야 한다"는 신앙이다. 막부 정부를 무너뜨리고 1868년에 등장한 메이지 정부도 이 위령 신앙에 입각해 메이지 유신 전후의 내란에서 사망한 전몰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메이지 2년(1870년)에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 자리에 도쿄 초혼사를 지었다.(중략) 야스쿠니 신사가 국민 통합의 커다란 정신적 지주로 발전한 것은 러일전쟁 이후이다. 러일전쟁이 끝난 뒤 야스쿠니에는 전사한 일본군 약 8만 8천 명의 명단이 위령자 명부에 등재되었다. 따라서 러일전쟁에서 사망한 이들의 유가족들이 대거 야스쿠니를 참배하게 되었다.(중략)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죽으면 반딧불이 되어 야스쿠니 신사로 돌아간다는 야스쿠니 신앙을 굳게 믿고 육탄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 좋은 예이다.-52쪽
'신국(神國)'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이다. 즉 신공황후 섭정 전기에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자 신라왕이 동쪽에 신의 나라가 있어 일본이라고 하며, 성황이 있어 천황이라고 한다. 필경 여기에 온 군사들은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라며 복종을 맹세하고 보화를 실은 배 80척을 바쳤다."고 기술되면서 '신국', '신병'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다. 8세기 초에 날조된 이 신공황후의 '삼한정벌론' 또는 '신라정벌설'이 1천3백 년에 걸친 한반도 침략과 그들의 우월의식의 근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83쪽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한국 출신자는 모두 2만 1,181명에 이른다. 주로 태평양전쟁 때 군인, 군속으로 끌려갔다가 사망한 사람들이다.(중략) 야스쿠니에 한국인 전몰자가 합사되어 있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78년경이다. 그 후 일본 정부가 1991년에 통보해 온 태평양전쟁 사망자 명단이 단초가 되어 야스쿠니에 합사된 한국인들의 신원이 밝혀졌다.(중략) 일본 정부는 패전 후 A, B, C급 전범으로 몰려 처형된 일본인 유족들에게는 유족 연금을 지급하는 등 각종 혜택을 베풀었다. 반면,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았다. 게다가 B, C급 전범으로 몰려 사형 언도를 받았다가 운 좋게 풀려난 한국인들 중에는 친일파라고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두려워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일본에 그대로 눌러앉은 사람들이 많았다.
;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사람들...-91쪽
조몬 시대 후기(BC 3세기경)에 일본의 전체 인구가 약 16만 명, 야요이 시대(BC 2세기경)에는 약 59만 명이던 것이 나라 시대(752년)에는 45만 명, 헤이안 시대 말기(1150년)에는 약 683만 명으로 급격히 늘어난 것을 보면 "상상 이상으로 대량의 도래인이 유입되었으며, 그들이 왜 문화의 기초를 만들었다."는 주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유입설이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되지 않는 것은 입장과 관점의 문제일까? -225쪽
보신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나가오카 번이 처한 상황은 지금의 일본이 처한 상황과도 엇비슷하다. 방위비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교육비는 계속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이즈미 총리가 속해 있는 모리파 회장 모리 요시로 전 총리는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2004. 10. 16)에서 쌀 백 섬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이렇게 고이즈미 총리를 질타했다. "어떻게든 (의무교육 국고 부담) 3조 엔을 삭감하겠다면 정부 전체에서 3조 엔을 각출하면 된다. 교육을 중시하고 다른 것은 인내하고 아픔을 나누자 하면 명재상이다.(중략) 총리는 오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와는 30년지기이지만, 나는 총리가 교육의 '교'자도 들먹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마 그 사람은 교육관계 회의나 부회에 나온 적도 없을 것이다." - 고바야시 토라시부로를 추어올리면서 교육비를 깎으려는 고이즈미 총리의 이중성 비판-298쪽
정경숙은 잘 알려진 대로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자 마쓰시타 코노스케가 사재 70억 엔을 들여 만든 인재양성 학교이다. 1980년 4월에 제1기생 30명을 모집한 이래 약 3백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21세기 일본의 번영을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마쓰시타의 설립 철학이 1백여 년 전의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를 닮았다고 해서 정경숙은 '현대판 쇼카손주쿠'라고도 불린다.(중략) 마쓰시타가 주장하는 번영 철학의 최종 목표는 팍스아메리카나에 갈음하는 팍스 자포니카의 달성이다.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의 정치가들이 바로 팍스 자포니카의 충실한 구현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304쪽
책(<부시도>)이 유명해지자 니토베도 교토 대학 교수, 일고 교장, 유엔 사무차장으로 출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일본이 그 후 군국화의 길로 치닫자, 니토베의 구도적인 '부시도'보다는 "무사의 본분은 죽는 길을 찾는 것이다."라는 전투적인 '하가쿠레 무사도'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하가쿠레 무사도에 심취한 군국 청소년들이 대량으로 육성되었다. 육군의 가미카제 특공대, 해군의 인간 어뢰 특공대가 그 전형이다. 인류에 축복을 내릴 것이라는 무사도가 인류의 재앙으로 돌변한 것이다. 군벌과 군국주의가 장차 인류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비판한 니토베도 온갖 핍박을 받고 도앙치듯 캐나다로 이주했다가, 그곳에서 쓸쓸히 객사했다. 니토베의 책을 일본어로 번역한 야나이하라 타다오는 중국 침략을 비판하다가 도쿄 대학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일본이 이라크에 대규모 부대를 파병한 것과 때를 같이해서 니토베의 초상도 5천 엔권에서 사라졌다.-310쪽
방위청은 지난 2000년 5월 미시마가 자결한 이치가야 주둔지 즉 옛 육군성 자리로 청사를 이전했다. 총공사비 약 2천5백억 엔을 들여 완공한 신청사는 록폰기 구청사의 세 배 규모(23헥타르)로, 본건물이 지상 19층, 지하 4층에 달한다. 방위청은 또 내각부 직속의 '청'에서 독립된 '성'으로 승격을 꿈꾸고 있다. 전쟁 전의 육군성보다 규모가 몇 갑절 크고, 훨씬 중후하게 단장된 새로운 육군성 건물의 웅자를 보면 지하의 미시마도 매우 흡족할 것이다.-315쪽
오키노도리시마는 태평양에 떠 있는 두 개의 암초이며, 그중 수면 위로 내밀고 있는 부분은 각각 1미터, 9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일본은 2백 해리 경제수역을 확장할 속셈으로 물경 285억 엔을 들여 철제 블럭 9천9백 개를 쌓아 이를 인공섬으로 조성했다. 국제법상 일본의 영토임을 알리기 위해 등대도 설치할 계획이다. 이 암초에는 현재 '일본국 최남단의 섬'이라는 간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도쿄 도의 이시하라 지사는 여기에 전격 상륙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시하라의 다음 목표는 다케시마, 즉 독도이다.-321쪽
일본이 전수방어 원칙을 무시하고 전진방어 또는 선제공격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은 김일성 부자의 탓만은 아니다. 아버지 부시는 1991년 걸프 전쟁이 일어나자 경제력에 걸맞는 부담을 지라고 일본을 닦달했다. 일본은 걸프 전쟁에 드는 총비용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30억 달러를 거출했다. 하지만 막대한 전비를 각출했음에도 '현금 자동 인출기', '1국 평화주의'라는 욕만 얻어먹게 되자 일본은 헌법을 확대 해석하여 페르시아 만에 소해 부대를 파견했다. 해외 출병이란 금기가 처음으로 깨지는 역사적 순간이다. 아들 부시는 이라크를 공격한 후 전후 복구를 위해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고이즈미 정권은 2003년 7월 이라크 부흥지원특별조지법을 제정하고, 자위대 사상 처음으로 전투지역에 중무장한 육해공 자위대 병력을 파견했다. 게다가 헌법에서 집단적 자위권행사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데도 현재 육상 자위대는 이라크 사마와 지역에서 다국적군의 지휘와 통제를 받으며 활동중이다.-337쪽
자위대에 대한 헌법 해석도 빠른 속도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는 1950년 7월 중의원 본회의에서 "경찰 예비대는 군대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또 1951년 10월의 참의원 본회의에서는 "헌법 9조의 전력은 육해공군과 그것에 필적하는 전쟁 수행 수단으로서의 힘을 의미하며, 자위를 위한 필요 최소한의 전력이 바로 자위대"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1980년 11월 중의원 특별위원회에서 "국제법상 자위대는 군대"로 변경되었으며, 고이즈미 총리는 2003년 5월 참의원 특별위원회에서 "자위대는 실질적인 군대"라고 못을 박았다. 전쟁을 포기했다는 평화헌법이 어느새 실질 군대를 갖고 있는 전쟁헌법으로 변질된 것이다.-338쪽
실제로 독도 근해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지면 미국의 태도가 중요한 관건이다. 중국인 활동가 그룹이 센카쿠 제도에 상륙을 강행한 사건이 일어나자(2004. 3), 미 국무성 보도관은 "센카쿠는 실제로 일본의 시정 하에 있기 때문에 미일 안보조약의 공동방어 조항은 이 섬에도 적용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중국이 만약 센카쿠 제도를 침공하면 미국은 일본 편을 들 것이라는 약속이다.(중략) 한편 일본과 안보조약을 체결하고 있는 미국은 한국과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따라서 한일 두 나라의 독도 영유권 분쟁이 무력 충돌로 번지면 미국은 중립을 취하는 길이 현재로선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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