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인의 유서 - 장재인은 저자 한기호의 대학 친구로, 1990년 9월에 발생한 섬강교 버스 추락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사람이다. 당시 물에 빠진 아내는 어느 청년에게 아들 호를 부탁하고 헤엄쳐 나왔는데 아들이 못 나온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검붉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다시는 못 나오고 말았다고 한다)
'생사의 차이가 이리도 간결한 것을 무던히 애를 쓰며 살아왔습니다. 하늘이 지워주신 짐의 무게와 고뇌의 깊이를 용케도 감내하더니 자그마한 행복의 기억들과 함께 이제는 모든 짐을 벗겨주십니다. 험한 삶을 위로하던 처자는 모질게 살다 희망의 입구에서 스러지고 차마 간직할 수 없는 가엾이 고운 추억들만 남겨주었습니다.
세상을 붙잡으려다 처자를 버리고 이제는 처자를 부여안기 위하여 세상을 버리려 합니다. 불행한 사람의 삶에 뛰어들어 고생만 하던 고마운 아내, 아들의 뒤를 따라 다시 강으로 뛰어들어 갔다는 아내처럼 저도 처자를 찾아 떠나려 합니다. 이것은 사고 현장에 도착한 이래 강물을 바라보며 제 마음에 살아오는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행여 살아남아 보람된 일을 해야 한다는 생의 의무감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저의 세 식구가 지닌 쓰라린 사랑의 메세지보다 더 생생한 경종이 어디에 있겠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일깨우고자 하는 생을 초월한 선택이 어찌 소극적인 결심일 수 있겠습니까?'
- 장 재 인
출처 : 한기호, <열정시대>, 교양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