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시대 - 출판인 한기호의 열정 인생
한기호 지음 / 교양인 / 2006년 9월
절판


하지만 국내 도서유통업계는 여전히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종로 5가의 대학천 골목에서 지게를 지고 책을 나르는 구조로는 그 같은 물량의 확대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해보고자 공동창고제, 충판사와 서점의 공동협의체 구성, 일원화 공급안, 변칙영업 철폐 같은 여러 방안이 우후죽순 제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출판사들은 '한탕주의'에 빠져 있었다. 밀리언셀러라는 산을 나라고 오르지 못하란 법이 있난 하는 심리가 팽배했다. 그때 나는 <대형유통기구의 정착으로 기대되는 유통구조 현대화>(계간 <책마을>, 진명서적, 1991년 겨울호)라는 글을 썼다.-98쪽

지금이야 고치기 쉽지만 문선과 정판을 거치던 때에 외주 제작을 하는 입장에서는 많이 고치면 좋은 말을 듣기 어려웠다. 때로는 미처 글을 쓰지 못해 달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렇게 휘갈겨 쓴 글은 문선공들이 고칠 곳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뽑아냈다. 오히려 깔끔하게 정서한 글은 제대로 문선되지 않아 수없이 고쳐야 했다. 나중에야 그 원인을 알아냈는데 난삽한 글은 고참에게 맡기고 깨끗한 글은 견습공에게 맡겼던 것이다.-144쪽

(장재인의 유서 - 장재인은 저자 한기호의 대학 친구로, 1990년 9월에 발생한 섬강교 버스 추락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사람이다. 당시 물에 빠진 아내는 어느 청년에게 아들 호를 부탁하고 헤엄쳐 나왔는데 아들이 못 나온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검붉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다시는 못 나오고 말았다고 한다)

'생사의 차이가 이리도 간결한 것을 무던히 애를 쓰며 살아왔습니다. 하늘이 지워주신 짐의 무게와 고뇌의 깊이를 용케도 감내하더니 자그마한 행복의 기억들과 함께 이제는 모든 짐을 벗겨주십니다. 험한 삶을 위로하던 처자는 모질게 살다 희망의 입구에서 스러지고 차마 간직할 수 없는 가엾이 고운 추억들만 남겨주었습니다.
세상을 붙잡으려다 처자를 버리고 이제는 처자를 부여안기 위하여 세상을 버리려 합니다. 불행한 사람의 삶에 뛰어들어 고생만 하던 고마운 아내, 아들위 뒤를 따라 다시 강으로 뛰어들어 갔다는 아내처럼 저도 처자를 찾아 떠나려 합니다. 이것은 사고 현장에 도착한 이래 강물을 바라보며 제 마음에 살아오는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행여 살아남아 보람된 일을 해야 한다는 생의 의무감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저의 세 식구가 지닌 쓰라린 사랑의 메세지보다 더 생생한 경종이 어디에 있겠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일깨우고자 하는 생을 초월한 선택이 어찌 소극적인 결심일 수 있겠습니까?'
- 장 재 인-158쪽

언젠가 누군가에게 내 인생에서 백낙청 선생이 끼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는 짧은 시간에 상대를 설득하는 것을 '엘리베이터 스피치'라 한다고 알려줬다. 할리우드의 영화감독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제작자를 설득한다고 한다. 아무리 높은 빌딩이라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시간은 매우 짧다. 그 짧은 시간에 제작자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3분력'이라는 말과도 통한다.-237쪽

책의 완성도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훈수를 두고 싶었다. 그때 영업부장은 다리의 인대가 끊어져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래서 병문안을 가서 책에 대한 의견을 늘어놓고는 나 같으면 2만 부를 찍겠다고 말했다. 또 우수 고객의 생일날 책 선물을 하는 한 카드회사에 이 책이 선정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 카드회사에는 한 영업사원이 다녀왔는데 할인율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길래 '그런 일에 나서는 사람은 사장 대행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 회사에 대한 애정을 갖고 직접 판단하라'고 말했다. 그 카드회사에는 월 800부 정도를 73퍼센트에 납품하기로 약정을 맺었다. 1년에 1만 부 판매가 가능해진 것이다.-244쪽

그날 정 선생(북디자이너 정병규 선생)은 지난해 말에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이상하게 연이어 몇 사람이 작고했는데그들의 대표작이 서너 개밖에 되지 않더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을 통해 미뤄 짐작해보면, 당신도 작고한 디자이너처럼 대표작은 이미 만들었다. 그러데 지금 수준 이하의 한국 출판물들에 '껍데기(표지'나 씌어주고 있다. 또 직원들은 자신의 지시도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 표지 작업은 컴퓨터로 장난쳐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래서 우리는 언제 일본에서 선물 받은 책 같은 것을 즐겁게 만들어볼 수 있겠는가? 그런 자괴감이 결국 컴퓨터를 부숴버린다는 말로 이어졌던 것이다.-250쪽

이때 우리나라는 IMF 관리체제로 들어갔다. 어급한 것처럼 IMF 이전에도 서적 도매상의 도산이 줄을 이었다. 1996년 2월 의정부 제문서점을 신호탄으로 해서 4월에 창원 사림문고, 5월에 목포 한림, 6월에 광주 삼일, 9월에 광주 종합, 10월에 광주 호남과 동대문 문영이 무너지는 등 도매상 도산이 줄을 이었다.
해가 바뀐 1997년에도 나쁜 상황은 이어졌다. 4월에 천안 동방과 제주 탐라가 무너진 것을 시작으로 6월에 창원 경남도서유통과 동대문 청송, 7월에 목동 한솔과 동대문 청호, 12월에 양재동 용천, 광주 광우, 광주 용문, 평택 국민도서 등 크고 작은 도매상의 부도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도매상 부도는 그래도 잔매에 불과했다. 1998년 1월에 신촌의 좋은책들과 동대문 신광이 무너지는 것으로 호흡을 조절하더니 강력한 카운터 펀치 두 대가 작렬했다. 1998년 2월 2일에 39년 역사를 이어온 업계 2위의 송인서림이 최종 부도 처리되고, 2월 28일에는 다시 공격적 영업을 펼치던 업계 1위의 보문당이 무너지면서 출판업계는 공황 상태로 접어들었다.-255쪽

회의를 한참 진행하는데 송인의 송택규 사장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송 사장은 회의 도중 집행위원들이 직원을 30퍼센트 감원하라는 말을 듣고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뜬 것이었다. 다시 나타난 그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새빨갰다. 그리고 '직원들 상여금을 없애고 월급을 30퍼센트 깎으라는 것도 모두 수용하겠다. 모든 재산을 하나도 남김 없이 채권단에 내놓겠다. 하지만 직원들 내보내라는 이야기는 정말로 하지 말아 달라'고 읍소하다시피 했다. 내가 잘못해서 부도가 났는데 죽어라고 일만 한 직원들을 이 엄동설한에 어떻게 내보내냐는 그의 말을 채권단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송택규 사장을 마음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위기의 순간에도 자신보다는 직원들의 안위부터 생각하는 그분의 진심이 결국 송인을 다시 살려낸 것이다.-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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