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미도 진상
사형수·무기수 아닌 ‘사관후보생’으로 모집했다
하니Only 김도형 기자
» 부대 소대장이었던 김방일씨가 공개한 실미도 부대원들의 사진.
[관련기사]

영화 <실미도>에서는 부대원들이 사형수 또는 무기수 등 흉악범 출신으로 묘사돼 있으나 진상규명위 조사 결과 실제와 많이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관계자는 “애초 모집관들이 사형수와 무기수를 대상으로 삼으려고 각 교도소를 돌아다녔으나 법무부에서 ‘만약 이들이 죽게 되면 주검을 유족들에게 인도해야 하기 때문에 안된다’고 난색을 표시해 이들은 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중정에 파견된 공군 모집관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연고 불량배 등 민간인을 대상으로 부대원을 모집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군자료에는 “특수임무를 띠고 중정에 파견됐다”고 적혀있으나 국정원쪽에서는 “모집관은 공군 사람들”이라며 부인하고 있다고 조사위는 밝혔다.

사관후보생에 준하는 월급, 배불리 먹고, 미군부대 취직 약속

» 영화 실미도의 포스터.
모집관들은 사관후보생에 준하는 월급(3000~3200원)에다 배불리 먹고, 미군부대 취직 약속 등을 좋은 조건으로 내세웠다고 한다. 한 모집관은 대전한밭 체육관에서 먹고자는 아이를 발견하곤 “국가를 위해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애국심에 호소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실미도 부대원들은 권투선수, 편물점 재단사, 입대 대기자, 서커스 단원, 음식점 요리사 출신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20~34살의 젊은이들이었다.

또 실미도 부대원 3명이 생존설에 대해서도 진상규명위 관계자는 “신빙성이 낮다”고 말했다. 소설 <실미도>를 펴낸 저자 백동호씨는 자신이 교도소에서 만난 소설 <실미도>의 주인공 강인창(실명)이 대열에서 이탈한 세명중 한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유가족들도 부인하고 있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또한 훈련과정에서 7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중 부대원끼리 서로 죽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훈련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부대원을 시켜서 집단린치를 가해 죽이는, 영화보다 더 잔혹한 ‘야수같은 행동’이 실제 실미도안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영화보다 잔혹한 야수 본능 “울면서 때려죽였다”

한 사형수는 재판과정에서 “울면서 때려죽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고 증언했다. 진상규명위는 재판기록이 실미도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데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1972년 3월10일 임성빈 이서천 김병염 김창구 등 사형수 네명이 서울시 영등포구 오류동 소재 공군 제7069부대에서 사격장에서 사형집행된 뒤 33년간 공군본부 법무관실에서 기밀서류로 묶여 있다 지난해 12월말 기밀해제돼 진상규명위의 조사자료로 활용됐다.

사형수중 일부는 사형집행일인 1972년 3월10일 서울 오류동 공군 7069부대 사격장에서 애국가와 대한민국 만세 3창을 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한다. 당시 군검찰부장이었던 김아무개씨는 올해 1월 방영된 일본 엔에이치케이방송에서 내보낸 실미도관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엔에이치케이스페셜>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의 애국심과 충성심에 놀랐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위는 지난달 28일 오류동 일대 사형수들이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유골발굴 작업을 벌였으나 유골을 찾아내지 못했다. 실미도 부대원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7명이다.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

» 실미도 부대 특수훈련 모습 담은 사진

» 실미도 부대 특수훈련 모습 담은 사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편집자 집요함 꼼꼼함 없으면 책도 없다”
이진경 ‘미래의 맑스주의’ 펴 낸 김현경씨 “독자 읽기 편하게”
고미숙 ‘나비와 전사’ 만든 선완규씨 “여러 사람 땀 결과”
한겨레 구본준 기자
» 서울 원남동 ‘연구공간 수유+너머’ 강의실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는 선완규 휴머니스트 편집주간,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인문학자 고미숙씨, 김현경 그린비 편집주간(왼쪽부터)
지은이들이 편집자 위해 마련한 ‘특별한 출판기념회’

“이진경 선생님 원고를 읽는데 문장 하나가 두가지 뜻으로 읽히는 게 있었어요. 저 혼자 1시간 넘게 낑낑대고 고민하다가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전화를 드려서 무슨 뜻인지 물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응, 그거 그냥 빼버려’ 하시는 거에요. 어찌나 허탈하던지….”

18일 저녁 7시, 종묘 뒷담 골목속 자리잡은 ‘연구공간 수유+너머’ 강의실. 출판사 그린비의 김현경 편집주간의 이야기에 청중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앉은 지은이 이진경 교수도 함께 웃었다. 하지만 웃음을 자아내는 이 이야기속에는 편집자들의 집요함과 고생스러움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편집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아니, 편집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책을 직업적으로 접하는 이들이 아니라면 일반 독자들에게조차 편집자는 낯선 존재들이다. 그 이름은 책의 앞이나 맨뒷장 서지사항속 조그맣게 ‘편집 아무개’라고만 적힐 뿐이다. 그나마 요즘에는 이마저도 적지 않기도 한다. 그만큼 편집자는 뒤로 숨는다.

하지만 책에 있어서 편집자의 존재는 저자 못잖다. 때로는 저자 이상일 때도 있다.

지은이가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면 그 원고를 읽기 좋게 가다듬고, 보기좋게 모양새를 잡고, 그리고 제목을 다는 것. 이 모든 것이 편집자의 몫이다. 오탈자를 잡는 교열, 교정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기본 일거리다.




책 자체를 기획해서 걸맞는 저자를 선정할 경우 그 책은 저자의 것이기 이전에 편집자의 것이다. 걸출한 편집자는 세상을 제대로 읽고, 그런 세상 흐름을 반영하는 책을 기획한다. 책이란 것에는 오롯이 지은이의 창의성과 노력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은이의 책’이 있는가 하면, 출판사 대표가 탁월한 교섭력을 발휘해서 유명한 필자와 출판계약을 따내 성공하는 ‘펴낸이의 책’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편집자의 책’이 있다. 꼼꼼한 편집과 세밀한 정성으로 만들어내는 책이다. 처음 책을 접어들 때는 알아차리가 어렵지만, 읽고나면 독자들이 가려워하는 곳을 긁어주듯 다양한 배려를 담뿍 담아놓은 책. 바로 그런 책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출판계의 주인공들인 편집자들은 관심의 바깥에 있다. 책이 성공하면 관심은 온통 지은이에게 쏠리기 마련이다. 책이 성공하면 벌어들인 수익은 출판사로 돌아간다. 그 사이에서 편집자들은 분명 ‘푸대접’을 받고 있다. 아무리 눈밝은 독자라도 편집자까지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좋은 책의 뒤에는 반드시 편집자가 있다. 다만 드러나지 않을뿐이다. 편집자들은 조용히 책 뒤에서 책의 성공에 감격하고, 책의 실패에 눈물흘린다.

18일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열린 출판기념회는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특별한 출판기념회였다. 이날 출판기념회는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의 새 책 <미래의 맑스주의>(그린비 펴냄)와, 인문학 연구자 고미숙씨의 책 <나비와 전사>(휴머니스트 펴냄) 출판기념회로, 두 사람이 함께 몸담고 있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마련한 자리였다. 출판기념회라고 하면 으레 지은이가 평소 친한 이들에게 익숙한 감사말을 하며 식사를 대접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이날 출판기념회는 달랐다. 두 책을 편집한 편집자들인 김현경 그린비 편집주간과 선완규 휴머니스트 편집주간이 함께 주인공으로 참석했다. 지은이 두 사람이 “나는 이렇게 책을 썼다”고 설명하고, 편집자 두 사람이 “나는 이 책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설명하는 출판기념회였다. 책의 숨은 주인공 편집자가 전면에 나섰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출판기념회였다. 실제 이날 출판기념회의 진정한 주인공은 두 편집자였다. 그리고 편집자는 무엇으로 사는지, 그리고 어떤 존재들인지를 청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첫 발표자는 <미래의 맑스주의>를 쓴 이진경 교수. 이 교수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을 어떻게 다시 사유할 것인지, 그리고 마르크스의 기본 가정들이 될 공리들을 다시 살펴보고 마르크스주의의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그 경계선을 확장시켜 보려했다”고 책의 집필 취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휴머니즘’에 대해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했다. “휴머니즘이란 것은 무서운 것, 끔찍한 것이다. 인간이 존엄한만큼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의 존엄함이 망각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도 나타나는 휴머니즘의 이런 지점들을 넘어보려 했다.”

이는 곧 새로운 세상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재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미래사회 등장할 로봇이 인간이란 주인에게 지배받고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인간을 위해 실험되고 희생되며 착취당하는 동식물들도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 새로운 의미의 프롤레타리아트란 것이다.

이 책을 편집한 김현경 주간은 “편집자가 만나는 책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는 것같다”는 말로 발표를 시작했다. 하나는 ‘편집자가 저자의 원고에 깊숙이 개입해 전체 구성부터 세세한 원고 배치와 부속물까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책’, 또다른 하나는 ‘구성과 내용에 깊이 관여하기보다는 그 원고의 내용을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정확하고 보기 쉽게 전달해줄까에 초점을 맞추는 책’이라는 것이다. 고미숙씨의 책 <나비와 전사>가 전자에 가깝다면, 자신이 편집한 이진경 교수의 <미래의 맑스주의>는 후자에 가까운 책으로 정의했다.

김 주간은 <미래의 맑스주의>가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스타일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아라도 더 많은 독자들과 만나게 하기 위해 여러가지 신경을 썼다고 밝혔다. 그가 밝힌 다음 네가지 편집적 연출은 10년 이상 편집에 종사한 베테랑이 책을 만드는 요령이란 점에서 후배 편집자들이 귀담아들을만한 ‘노하우’이기도 했다.

우선 원래 원고의 각주에는 인용주와 내용주의 두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내용주는 본문을 이해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에 각주처리를 했고, 인용주는 시선을 분산시켜 읽어나가는 흐름을 방해할 우려가 있어 후주처리를 했다고 한다.

두번째로는 앞으로 이 책이 연구자들에게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보아 저자 원고에 따로 정리되어 있지 않던 참고문헌 목록을 인용주들과 본문에 언급된 책들 모두를 뽑아 정리해 뒤편에 실었다고 한다.

세번째로는 이 책이 저자의 사유를 집중해서 따라 읽어가는 것이 좋다고 보아 본문 안에 그림을 따로 배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이 너무 없으면 독자들이 책에 담긴 강한 사유를 쉴틈없이 맞닥뜨려야하기 때문에 쉴 여유공간을 두려고 각 장의 시작 부분에 그림을 넣고 각장의 문제의식을 관통하는 문장을 지은이에게 부탁해 수록했다.

네번째는 정확한 정보전달을 위해 책 본문에서 인용하는 책들을 모두 구입 내지 입수해서 모든 인용구를 대조했다고 한다.

이날 이 네번째, 책 본문에 인용되는 모든 책을 실제 구입내지 입수해 대조했다는 대목은 청중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편집자가 얼마나 꼼꼼하고 수고스러운 일을 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작업이기 때문이다. 김 주간은 인용되는 책들 가운데에는 절판된 것들도 많아 온 출판사 직원들의 친구며 후배며 동생을 동원해 각 대학 도서관을 샅샅이 훑었다고 한다. 김 주간은 “책을 기획하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지만, 교열과 교정은 고된 노동이자 글자 하나, 문구 하나하나와 대결하는 전쟁”이라고 비유하고, “좋은 원고를 만나면 고정교열이란 노동은 어느새 나 자신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는 마주침과 생기넘치는 활동이 된다”고 말했다. “더 많은 불온한 사유와 만나 그것을 독자들이 가장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일, 그것이 바로 편집자로서의 제 꿈이고, 역할이고 행복입니다.”(당연히 터져나오는 청중들의 박수)

다음은 또다른 책 <나비와 전사>의 지은이 고미숙씨의 차례였다.

고씨는 책의 편집자 선완규 주간의 ‘지독함’을 ‘까발리는 것’으로 감사의 말을 대신했다. “선완규 주간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가 안보낸 원고도 자기가 입수해서 밑그림을 그려서 보내줘요. 원고를 보내주고 나면, ‘이 부분은 에전 선생님이 쓴 다른 글과 비슷하다’며 일일이 다 지적해서 다시 연락이 와요. 그러니 이러이러한 내용을 덧붙여 달라, 여긴 이러면 좋겠다… 그런 주문이 이어지는거지. 그래서 원래 1500매였던 원고가 2000매로 늘어났어요.”

고씨로부터 ‘집요한 편집자’란 애정어린 힐난을 듣고 발표에 나선 선 주간의 설명은 고씨의 말이 오히려 선씨의 집요함을 덜 표현한 것임을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선 주간은 이 책 <나비와 전사>가 “5년을 기다린 끝에 나온 책”이라고 설명해다. 그리고 2001년 6월12일자로 작성한 애초 출판기획안을 직접 가져와 이번 기획안과 함께 보여주기도 했다. 선 주간이 이 책을 기획했던 것은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열린 고씨의 강연을 들었던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근대성’이란 주제의 강연을 듣고 책으로 펴내면 좋겠다고 느낀 고씨가 강의안을 토대로 기획안을 작성해 고씨에게 보냈고, 책을 펴내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후 고씨의 바쁜 일정 때문에 책 출판은 계속 늦춰졌다고 한다.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선 주간은 원래 강의때 고씨가 한 말들을 꼼꼼히 기록해두었던 것을 활용해 원고에 빠진 내용이 있으면 연락해서 집어넣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역시 이 대목에서 청중들 박수.

선 주간은 “책은 어느 한 사람의 땀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발표를 마쳤다.

지식인들이 책을 써 새로운 지식과 담론을 생산할 때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바로 편집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 때문에 두 편집자 모두 이날 행사에 자신을 초청한 연구공간 수유쪽에 무척이나 감사하다는 뜻을 밝혔다. 사실 이처럼 저자와 편집자가 함께 책을 설명하는 행사를 기획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공간 수유만의 성향탓일 것이다. ‘대학’으로 대표되는 기성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도발적이고 새로운 사유의 모험을 떠난 젊은 연구자들의 코뮨이자, 가장 왕성하게 대중적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펴내는 저술가들이 대거 참여한 수유이기 때문에 가능한 기획이었다.

고병권 수유 대표는 “올해는 수유의 여러 회원들의 책이 그 어느 해보다도 많이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이 책들이 과연 어떤 편집자들과 만나 대중들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글·사진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터뷰/‘Mr. 김정일, 차 한잔 하실까요?’ 낸 김현경 기자

졸음 부르는 남북관계 해설서이거나 이름 날리는 기자의 취재 성공기쯤 되겠거니…. 문화방송 북한전문기자 김현경(42)의 를 열었을 때만 해도 미덥지 않았다. 그런데 계속 뒷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술술 넘어가는데 재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독자와 눈을 맞춰가며 지은이는 뚝심있게 자신의 철학을 밀어붙였다. 잘난척 하지 않지만 속이 찬 이야기, 강요하지 않고 설득하는 말솜씨가 책의 첫 번째 매력이다.

“남북관계는 일상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쳐요. 그런데 이젠 사람들이 보기도 싫어해요. 챗바퀴 돌듯 하니까요. 너무 단순화한다는 비판을 받을지라도 아이들한테 이야기하듯 풀어쓰려 했어요.” 골치 아픈 북핵 문제만 해도 그렇다. 지은이는 고슴도치와 호랑이에 북한과 미국을 비유한다. 호랑이가 죽일까 두려워 고슴도치는 털을 꼿꼿이 세우고 있다. “북한에게 핵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고 책에서 설명한다.

아나운서로 문화방송 <통일전망대>를 진행한 것까지 따지면 17년, 기자로 뛴 세월만 처도 12년째 북한과 인연을 맺어온 그의 글엔 북녘의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배나온다. 연명하는 것조차 힘겨웠던 1998년 말, 청년영웅도로의 건설 과정은 뭉클하다. 거기엔 손으로 돌을 깨고 지게로 나르며 만두 한 접시 앞에서 통곡해야 했던 끈질긴 사람들이 있다. 배 곯아도 자식부터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이른바 ‘낀세대’가 돼버린 중장년층의 고민은 낯이 익는다. “민초들의 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그들의 처지가 돼 보는 게 가능하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접근만 해도 그렇다. “과연 김정일(국방위원장)만 없으면 북한 인권이 나아질까요? 자유와 인권이 외부의 강요나 선물로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우리도 겪었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진 뒤에도 봄을 누리지 못했죠. 국민들이 전쟁과 가난에 대한 공포에 짓눌렸던 게 한 가지 이유죠. 북한 민주화 운동이 힘을 발휘하려면 주민들이 절대 빈곤과 침략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더 나은 삶을 꿈꾸도록 도와줘야할지 몰라요.”

인권 문제에는 남북관계의 특수성과 보편적 기준 사이 긴장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루는 태도를 정하기가 까다롭다. 조선시대에 머물고 있는 북한의 여성인권도 그렇다. “북한은 이러니 남쪽 시청자들한테 그냥 이해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특수성과 보편적 기준 사이 중간을 잡는 게 쉽지 않아요.”

역사적 현장엔 빠지지 않고 마이크를 들었고 평양만 6차례, 금강산이나 개성 땅은 수없이 밟아본 그이지만 여전히 북한 취재는 만만하지 않다. “현장은 그쪽에서 준비한 것만 보게 되니까요. 새로운 거리를 찾는 게 힘들죠. 검증이 제대로 되지도 않고요.” 지루할세라 취재 뒷이야기가 책에 양념을 친다. 첫 관광 때는 그야말로 난리 북새통이었다. 몇 초라도 빨리 보도하려고 난투극도 불사했던 기자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모아뒀던 취재 수첩을 정리하고 기억을 더듬어 그는 탄탄한 사실로 말랑말랑한 에피소드로 짰다. 그 속에서 김현경은 평화로 가는 길이 대화에서 시작한다고 줄기차게 말한다. “한반도에 같이 사는 이웃으로서 남북에겐 공통의 이익이 있어요. 아이들에게 더 좋은 미래를 주자는 거죠. 북한은 타이밍을 많이 놓쳤고 미국은 자신의 전략적 목표를 제대로 내놓지 않아요. 미국의 목적이 북한 체제를 깨뜨리는 건지 현안을 푸는 건지 확실하지 않죠. 대화는 적어도 해결로 가는 길을 보여줘요.”

따지고 보면, 아나운서가 된 것도 우연, <통일전망대>를 진행하게 된 것도 우연, 김일성 주석이 숨진 날부터 기자로 뛰게 된 것도 우연이라고 한다. “처음엔 북한 방송만 봐도 재미 없어 잠 들었어요.” 북녘과 만남을 거듭하면서 맞출 수 없는 퍼즐 조각같던 북한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도 바뀌었다. 그의 책으로 좀더 살아 있는 북녘을 만나면, 통일이나 평화가 뜬구름 잡는 당위가 아니라 생활과 맞닿은 문제로 다가온다.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김용택의 교단일기 - 살구꽃이 피는 학교에서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 8
김용택 지음 / 김영사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을 본문에 나와있는 김선생님의 일갈로 메꾸었다.

최근 신작시집인 <그래서 당신>을 읽고, 그간 저자의 출간내력을 확인하다가 최근작인 <... 교단일기>를 서슴없이 주문, 골라들었다.  민세(민중세상, 맞지요?^^)와 민해(민중해방)가 어릴 적, 인근 지인들이 댁을 방문하고 돌아와선 하염없이 감동에 겨워하던 모습이 아련한데,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르고...

일기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밑줄긋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책을 펼치고 닫는 시간 동안 내 안에서도 시골초등학교의 사계가 함께 흘러갔다는 생각에 아주 색다른 독서경험이었다.

'어느 호로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물이겠냐' 호통으로 등장한 섬진강 시인은 시인이기보다는 오히려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가가 갖고 있는 고유한 신념과 애정, 그리고 사유 속에서 자연스럽게 서정과 감성을, 그리고 떳떳한 외침을 다듬어내는 시인이 되신 것은 아닐지...

일기다. 아니다. 무척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이 책은 어느 한 시골 초등학교, 특이하게도 작가가 다니기도 했고, 또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의 부모도 가르치기도 했던, 약간은 '별난' 학교의 일상이기도 하지만, 우리 교육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미 여러 사실에서 확인되듯이 가장 변화와 개선이 어려운 분야가 교육계 아닌가. 그러나 그만큼 중요하기도 한....

이 책을 읽을 숱한 선생님들이 단지 2학년 학생이 여덟 명밖에 되지 않거나(2005년에는 네 명으로 줄었다), 저렇게 '놀면서' 가르칠 수 있는 여유라면 나도 갖고 싶다거나 하는 단순한 동경으로 그치지 않기를 정말 바란다. 어느덧 회갑에 가까워진 연세에도 이렇듯 아이들에게 다가서고, 아이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려는 노력은 하나의 표상으로 굳건하다. 경륜이 느껴지는 일부 일기를 제외하면, 그리고 저자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마도 이제 막 부임한 초짜 교사의 다짐처럼 느껴지는 대목은 이 책의 덕목이고 압권이다. 이미 40년 가까이 지내오신 저자의 일기인데...

어쩌면 이 책을 읽는 선생님들께서 '내 아이들도 (이 책에 인용된 많은 아이들의 시처럼) 그러한 시를 쓰게 해야겠다'는 다짐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부디 많은 선생님들이 보셨으면 하는 책이다. 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고 나오는 아이를 포함하여 작지만 모든 아이들에게 쏟는 저자의 애정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이처럼 딱딱한 교육현실에서 작은 '줄긋기'가 되지 않을까.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아마도 시인보다는 교사로 불리길 바라실 김선생님께 '교단을 떠나시는 그날까지' 지금처럼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무엇이, 아쉽게 늙지 마라'(2005년 4월 14일 일기 전문)

* 김영사에서는 273쪽의 교정을 다시 봐야겠네요.^^ 단순한 실수겠죠. 그나저나 식객은 고치셨나요. 에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용택의 교단일기 - 살구꽃이 피는 학교에서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 8
김용택 지음 / 김영사 / 2006년 5월
구판절판


교실 앞 놀이터에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내가 이 학교 1학년에 입학할 때 이 나무는 청년이었다. 이제 나무는 아름드리가 되어 늙어간다. 늙은 몸에도 꽃을 다문다문 피운다. 오래된 가지에 꽃을 피우면 때론 고졸하고, 때론 고색창연해 보인다. 살구나무 살구꽃을 보며 나는 봄마다 얼마나 까닭 없이 설렜던가. 잘살아온 나무다. 그 살구나무에 올해도 꽃이 피었다가 졌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운동장, 그 땅을 달리는 아이들의 튼튼한 발길들을 나는 오늘도 바라본다.
(<책머리에>에서..)-5쪽

나는 언제나 삶은, 인생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나는 작고 단순하고 소소하게, 그냥 조용히 나무처럼 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번잡하고 쓸데없는 것들로 번민하고 괴로워한다.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부질없는 것들인데 많은 시간을 그런 일에 할애하고 마음을 쓴다.
그럴 것 없다. 단순하고 작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난 늘 돌아갈 것이다. 문학을 하면서, 진메 마을에 살면서 맛보았던 그 아름다운 고립과 외로움으로, 그리고 어머니 곁으로.-24쪽

종현이가 배가 아파 조퇴했다.
종현이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데려가라고 했더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운동장에 나가 있던 종현이를 싣고 부우웅 가버렸다. 종현이 아버지도, 고모도 내가 가르쳤다.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니 욕이 절로 나온다. 썩을 놈, 얼굴 좀 보고 가면 안 되나?
-43쪽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거둘 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한다. 우리 아이는 인류의 자산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내 자식인 동시에 우리 인류의 아들딸이다. 아이들을 너무 감싸고 돌지 말자. 내 자식을 내 소유물로 생각하지 말자.-45쪽

우리 교육의 장에 사람의 따뜻한 숨소리가 들리게 해야 한다. 인간 교육, 전인 교육, 인류의 희망인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며 진정한 가치를 찾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학교에 온다.-54쪽

(2004년) 9월 16일 목요일
아침에 세찬 비, 그러나 굵은 비는 아니었음.
이슬비와 장대비의 중간 비였음.
어머니는 저렇게 쏟아지는 모습을 보고 비가 참 차분하게 잘도 온다고 그러셨다. 눈도 저렇게 잔잔하게 찬찬히, 차분하게 오는 눈도 있다.
비 오는 들판이, 비 오는 산이 좋다.
나도 저 비처럼 저 산처럼 저 들처럼 저 마을처럼 잔잔해지고 싶다.
(날씨 설명도 하나의 시가 되어버린듯한...)-55쪽

아침에 오니 아이들이 창문을 다 열어놓고 청소를 하고 있다. 교실이 환하다. 청소를 다 하고 또 논다. "청소 다 했으면 책 봐야지" 하니 그제야 책을 본다. 늘 이런 식이다. 아이들의 일상이 늘 이렇지 않으면 선생이, 학교가 뭣 땜시 있겠는가. 그러기에 초등학교는 아름다운 곳이다.
아이들 과자를 사왔다. 아이들이 좋아한다. 한 상자 남은 걸로 1학년 아이들에게 한 개씩 나누어주었더니 과자 값보다 몇 배나 좋아한다. 아주아주 흐으뭇.-55쪽

오! 이 위대한 자유여! 객관화는 사물이 남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때때로 산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산이 되던 그 순간들을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내 앞에 마주앉아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그 수만 송이 풀꽃들 따라 그냥 웃던 순간들이 어떻게 말이 되고 글이 되리. 나는 산에 편안히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무심히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산에 강에 살았다.-59쪽

나는 고립의 아름다움과 고립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진실의 힘을 믿고 오랜 시간 홀로 살았다. 아득한 저쪽 외로운 청년의 푸른 어깨끈을 나는 아직 내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막강하고 두려움 모르는 외로움을 나는 아직 놓지 않았다.
나는 공부할 것이다. 내 삶을 가꾸어가는 데 게으르지 않겠다. 참으로 같잖고, 바르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한, 쩨쩨하고 옹졸한 것들과 결별하라.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아닌 것에 얽메여 연연하지 마라. 흐트러짐을 보이지 마라.-108쪽

학생들 수가 적기 때문에 한 사람만 전학을 가도 교실이 텅 빈 것 같고, 마음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나는 이렇게 평생 아이들을 떠나보내며 살았다. 어디 아이들뿐인가. 내 동무들도, 이웃도 다 떠나보내며 살았다. 항상 한쪽이 허전하게 살았다.-122쪽

한빛고등학교를 생각하면 사랑이란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잊지 못할, 민세에게, 나에게, 우리 식구에게 잊지 못할 곳이다. 나의 학교였으며, 그 학교를 다니지 못한 민해의 애틋한 학교였고, 그 학교를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절로 나오는, 아내가 사랑하는 행복한 학교였다. 노래 공연을 하는 동안 아내 곁에 계신 교감선생님은 내내 눈물 바람을 하셨단다.
아이들도, 나도, 아내도 선생님들도 다 그랬다. 그곳은 그렇게 눈물과 감동이 살아나는 곳이다.

('민중세상'을 염원하며 지은 이름이 민세고, '민중해방'을 갈망하여 붙인 이름이 민해였지요)-138~139쪽

교대를 사대와 통합하라! 교사가 될 교육대학 학생들에게 폭넓은 인간 교육이 절실히 요구된다. 세계는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교사 교육은 딱딱하게 굳어 변화를 수용할 줄 모른다.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교육대학 제도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 어떻게든 교장이 되면 그만이라는 안일무사주의와 교대는 닯은꼴이다. 둘은 함께 썩어간다. 어떤 식으로든 교대를 개선하고 교장 승진 제도와 아무런 제재 장치도 없는 교장 중임 제도를 철폐해야 한다. 교장 임용 제도를 하루 빨리 개선하라. 그래야 조금이라도 교육이 살아난다.

수능이 끝났다.
아이들아, 초등 6년, 중고등학교 6년, 12년 동안 애 많이 썼다. 하루 동안 몇 문제로 12년 인생을 평가받는다.
얼마나, 얼마나 애를 썼느냐. 그 펄펄한 피를 누르며 얼마나 애를 썼느냐.-153~154쪽

되게 서리가 친 날 아침의 나무들은 실가지마다 서리꽃이 피어 꽃나무처럼 아름답다. 나무야! 나무야! 서리꽃 핀 나무 아래에서 입김을 하얗게 뿜으며 땅에 금을 긋고 땅따먹기를 하며 노는 아이들아!
지구의 축복이다.-200쪽

오후에 아이들 모두 가고 난 후에 희창이와 함께 텔레비젼으로 영화를 보았다. 둘이 맘껏 웃었다. 희창이가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던지 나는 더 크게 웃었다. 무슨 영화였나고? 영화 제목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이 장면,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고 신나는 일입니다)-230쪽

교실에서 혼자 도시락 먹으니 참 맛있었다. 교실에 가니 마음이 놓이고 푸근하다. 산천을 둘러본다. 내가 평생을 산 곳이다. 날이면 날마다 보던 산천이 늘 새롭던 곳이다. 이렇게 유리창 문으로 산천을 보고 있으면 나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할수록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질리지 않는 산천과 그 산천을 보고 질리지 않는 마음을 가졌으니 말이다.-244쪽

아침에 출근하니 성현이, 유빈이, 선영이, 채훈이(2학년 전원의 이름입니다-옮긴이)가 운동장 고운 햇살 속에서 사방치기를 하며 논다. 풋살구 같다. 아이들은 내가 출근하면 날마다 이렇게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묻는다.
"선생님 밖에서 놀아도 돼요?"
아이들은 날마다 그렇게 묻고 나는 날마다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 조금만 놀다 들어와라."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우와! 놀다 오래" 하며 운동장으로 흩어진다. 참 좋기도 한 모양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날마다 재미있게 논다.-349쪽

나는 저 산을 평생 동안 바라보고 살았다.
아이들과 잘 지낸 날 이렇게 앉아 저 산과 마을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환해지고 산도 환해진다. 환한 산, 환한 마음을 가진 나는 행복하다.-35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