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앞 놀이터에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내가 이 학교 1학년에 입학할 때 이 나무는 청년이었다. 이제 나무는 아름드리가 되어 늙어간다. 늙은 몸에도 꽃을 다문다문 피운다. 오래된 가지에 꽃을 피우면 때론 고졸하고, 때론 고색창연해 보인다. 살구나무 살구꽃을 보며 나는 봄마다 얼마나 까닭 없이 설렜던가. 잘살아온 나무다. 그 살구나무에 올해도 꽃이 피었다가 졌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운동장, 그 땅을 달리는 아이들의 튼튼한 발길들을 나는 오늘도 바라본다. (<책머리에>에서..)-5쪽
나는 언제나 삶은, 인생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나는 작고 단순하고 소소하게, 그냥 조용히 나무처럼 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번잡하고 쓸데없는 것들로 번민하고 괴로워한다.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부질없는 것들인데 많은 시간을 그런 일에 할애하고 마음을 쓴다. 그럴 것 없다. 단순하고 작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난 늘 돌아갈 것이다. 문학을 하면서, 진메 마을에 살면서 맛보았던 그 아름다운 고립과 외로움으로, 그리고 어머니 곁으로.-24쪽
종현이가 배가 아파 조퇴했다. 종현이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데려가라고 했더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운동장에 나가 있던 종현이를 싣고 부우웅 가버렸다. 종현이 아버지도, 고모도 내가 가르쳤다.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니 욕이 절로 나온다. 썩을 놈, 얼굴 좀 보고 가면 안 되나? -43쪽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거둘 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한다. 우리 아이는 인류의 자산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내 자식인 동시에 우리 인류의 아들딸이다. 아이들을 너무 감싸고 돌지 말자. 내 자식을 내 소유물로 생각하지 말자.-45쪽
우리 교육의 장에 사람의 따뜻한 숨소리가 들리게 해야 한다. 인간 교육, 전인 교육, 인류의 희망인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며 진정한 가치를 찾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학교에 온다.-54쪽
(2004년) 9월 16일 목요일 아침에 세찬 비, 그러나 굵은 비는 아니었음. 이슬비와 장대비의 중간 비였음. 어머니는 저렇게 쏟아지는 모습을 보고 비가 참 차분하게 잘도 온다고 그러셨다. 눈도 저렇게 잔잔하게 찬찬히, 차분하게 오는 눈도 있다. 비 오는 들판이, 비 오는 산이 좋다. 나도 저 비처럼 저 산처럼 저 들처럼 저 마을처럼 잔잔해지고 싶다. (날씨 설명도 하나의 시가 되어버린듯한...)-55쪽
아침에 오니 아이들이 창문을 다 열어놓고 청소를 하고 있다. 교실이 환하다. 청소를 다 하고 또 논다. "청소 다 했으면 책 봐야지" 하니 그제야 책을 본다. 늘 이런 식이다. 아이들의 일상이 늘 이렇지 않으면 선생이, 학교가 뭣 땜시 있겠는가. 그러기에 초등학교는 아름다운 곳이다. 아이들 과자를 사왔다. 아이들이 좋아한다. 한 상자 남은 걸로 1학년 아이들에게 한 개씩 나누어주었더니 과자 값보다 몇 배나 좋아한다. 아주아주 흐으뭇.-55쪽
오! 이 위대한 자유여! 객관화는 사물이 남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때때로 산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산이 되던 그 순간들을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내 앞에 마주앉아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그 수만 송이 풀꽃들 따라 그냥 웃던 순간들이 어떻게 말이 되고 글이 되리. 나는 산에 편안히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무심히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산에 강에 살았다.-59쪽
나는 고립의 아름다움과 고립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진실의 힘을 믿고 오랜 시간 홀로 살았다. 아득한 저쪽 외로운 청년의 푸른 어깨끈을 나는 아직 내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막강하고 두려움 모르는 외로움을 나는 아직 놓지 않았다. 나는 공부할 것이다. 내 삶을 가꾸어가는 데 게으르지 않겠다. 참으로 같잖고, 바르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한, 쩨쩨하고 옹졸한 것들과 결별하라.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아닌 것에 얽메여 연연하지 마라. 흐트러짐을 보이지 마라.-108쪽
학생들 수가 적기 때문에 한 사람만 전학을 가도 교실이 텅 빈 것 같고, 마음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나는 이렇게 평생 아이들을 떠나보내며 살았다. 어디 아이들뿐인가. 내 동무들도, 이웃도 다 떠나보내며 살았다. 항상 한쪽이 허전하게 살았다.-122쪽
한빛고등학교를 생각하면 사랑이란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잊지 못할, 민세에게, 나에게, 우리 식구에게 잊지 못할 곳이다. 나의 학교였으며, 그 학교를 다니지 못한 민해의 애틋한 학교였고, 그 학교를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절로 나오는, 아내가 사랑하는 행복한 학교였다. 노래 공연을 하는 동안 아내 곁에 계신 교감선생님은 내내 눈물 바람을 하셨단다. 아이들도, 나도, 아내도 선생님들도 다 그랬다. 그곳은 그렇게 눈물과 감동이 살아나는 곳이다.
('민중세상'을 염원하며 지은 이름이 민세고, '민중해방'을 갈망하여 붙인 이름이 민해였지요)-138~139쪽
교대를 사대와 통합하라! 교사가 될 교육대학 학생들에게 폭넓은 인간 교육이 절실히 요구된다. 세계는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교사 교육은 딱딱하게 굳어 변화를 수용할 줄 모른다.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교육대학 제도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 어떻게든 교장이 되면 그만이라는 안일무사주의와 교대는 닯은꼴이다. 둘은 함께 썩어간다. 어떤 식으로든 교대를 개선하고 교장 승진 제도와 아무런 제재 장치도 없는 교장 중임 제도를 철폐해야 한다. 교장 임용 제도를 하루 빨리 개선하라. 그래야 조금이라도 교육이 살아난다.
수능이 끝났다. 아이들아, 초등 6년, 중고등학교 6년, 12년 동안 애 많이 썼다. 하루 동안 몇 문제로 12년 인생을 평가받는다. 얼마나, 얼마나 애를 썼느냐. 그 펄펄한 피를 누르며 얼마나 애를 썼느냐.-153~154쪽
되게 서리가 친 날 아침의 나무들은 실가지마다 서리꽃이 피어 꽃나무처럼 아름답다. 나무야! 나무야! 서리꽃 핀 나무 아래에서 입김을 하얗게 뿜으며 땅에 금을 긋고 땅따먹기를 하며 노는 아이들아! 지구의 축복이다.-200쪽
오후에 아이들 모두 가고 난 후에 희창이와 함께 텔레비젼으로 영화를 보았다. 둘이 맘껏 웃었다. 희창이가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던지 나는 더 크게 웃었다. 무슨 영화였나고? 영화 제목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이 장면,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고 신나는 일입니다)-230쪽
교실에서 혼자 도시락 먹으니 참 맛있었다. 교실에 가니 마음이 놓이고 푸근하다. 산천을 둘러본다. 내가 평생을 산 곳이다. 날이면 날마다 보던 산천이 늘 새롭던 곳이다. 이렇게 유리창 문으로 산천을 보고 있으면 나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할수록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질리지 않는 산천과 그 산천을 보고 질리지 않는 마음을 가졌으니 말이다.-244쪽
아침에 출근하니 성현이, 유빈이, 선영이, 채훈이(2학년 전원의 이름입니다-옮긴이)가 운동장 고운 햇살 속에서 사방치기를 하며 논다. 풋살구 같다. 아이들은 내가 출근하면 날마다 이렇게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묻는다. "선생님 밖에서 놀아도 돼요?" 아이들은 날마다 그렇게 묻고 나는 날마다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 조금만 놀다 들어와라."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우와! 놀다 오래" 하며 운동장으로 흩어진다. 참 좋기도 한 모양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날마다 재미있게 논다.-349쪽
나는 저 산을 평생 동안 바라보고 살았다. 아이들과 잘 지낸 날 이렇게 앉아 저 산과 마을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환해지고 산도 환해진다. 환한 산, 환한 마음을 가진 나는 행복하다.-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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