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이해 현대사상의 모험 8
마샬 맥루한 지음, 김성기 & 이한우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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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안 읽어도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은 어디서든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도 그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왜냐면 너무 장황하고 어려워서.


언어, 인쇄, 만화, 사진, 신문, 광고, 게임, 전신, 타자기, 전화, 축음기,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뿐만이 아니라 도로, , 의복, 주택, , 시계, 바퀴, 자전거, 비행기, 자동차, 무기, 자동화까지 미디어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게다가 1960년대 미국사회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 책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마셜 맥루언의 불친절한, 현학의 바다에서 장시간 표류하다 보면 가끔 눈이 번쩍 뜨이는 섬을 발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표음문자가 서양인의 삶을 어떻게 발전시켰는가 하는 대목이다, 다소 서구우월주의가 느껴지긴 하지만. 언어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디어라면, 그 미디어인 언어가 표음문자여서 그렇지 않은 동양(중국)보다 서양이 우월하다는. 그래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말. 

 

<밑줄>

러시아에서 바스크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페루에 이르기까지 서구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알파벳들은 모두 그리스-로마 문자에서 나온 것이다. 그 문자의 형태와 음성이 의미상의 말의 내용과 분리되는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이 알파벳들은 문화들간의 번역과 동질화를 위한 가장 철저한 기술이 되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문자들은 단지 하나의 문화에만 봉사해 그 문화를 다른 문화들과 분리하는 데 기여해 왔다. 비록 조잡하기는 해도 표음적인 문자들만이 그 어떤 언어의 소리든지간에 하나의 동일한 시각적 부호로 번역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중국어를 서구의 표음 문자들을 사용해 표기해 보려고 하고 있는데, 광범위한 성조 변화와 동음이의어 같은 특수한 문제에 봉착했다. 이리하여 중국어의 단음 어절을 세분화해 다음절어로 변형시켜 음성상의 애매함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의 표음 알파벳이 이제 중국어와 중국 문화의 청각 중심적인 특징을 변화시키고 있다. 중국이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은, 서구의 노동과 조직에 통일의 중심과 일양적인 선형적이고 시각적인 패턴들을 자국 내에서 발전시키기 위해서이다. 다른 한편 우리 서구 문화권의 사람들을 쿠텐베르크 시대를 벗어남에 따라 점차 우리 문화가 가진 동질성, 일양성, 연속성 등과 같은 특징을 식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는 비문자적인 야만인들을 누를 수 있었는데, 야만인이나 부족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문화적 다원주의, 특이성, 불연속성 등을 자신의 특색으로 삼고 있다.


요약하자면 바빌로니아, 마야, 중국 등과 같은 문화에서 사용된 그림 문자나 상형 문자는 인간의 경험을 축적하고 그 경험에 접근할 수 있게끔 시각을 확장한 것이다. 이 모든 형태의 문자들은 구어상의 의미에 그림으로 된 표현을 제공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만화 영화와 비슷하고 극도로 다루기 힘들다. 왜냐하면 사회 활동의 무한한 자료와 활동을 지시하는 데에는, 너무나 많은 기호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표음 알파벳은 적은 수의 문자만으로 모든 언어들을 다 포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 기호와 소리가 의미론적, 극적 의미로부터 분리된다. 이런 일은 그 밖의 다른 문자 체계들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또 표음 알파벳에 고유한, 시각과 소리와 의미의 분리는 확장되어 사회적, 심리적 결과들을 낳게 되었다. 문자 문화의 인간은 상상 생활, 정서 생활, 감각 생활이 상당히 분리되는 것을 경험한다. 이 점은 루소가 오래전에 천명한 바 있다. 오늘날에는 로렌스를 언급하기만 해도, 인간의 <전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문자 문화인을 넘어서려는 20세기의 각종 시도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서구의 문자 문화인들이 자신의 알파벳을 사용하는 것과 자신의 내적 감수성이 크게 분리되어 있는 것을 경험한다면, 그들은 자신을 씨족이나 가족으로부터 분리해내는 개인적 자유도 획득될 것이다. 개인의 일생을 형성하는 이런 자유는 군사 생활이 지배하던 고대 세계에서도 드러난다.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에서처럼 공화제 아래의 로마에서는 재능에 따라 인생이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었다. 당시 새로운 문자 문화는 동질적이고 유연한 환경을 창출해 냈고, 그 속에서 군인들이나 야심을 가진 개인들의 이동 가능성은 새로울 뿐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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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지음 / 책읽는오두막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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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부하는 게 좋아서 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교사는 공부만 좋아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아는 것을 좋아하는 것보단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의 이름을 못 외운다. 일부러 외워보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 외어진다. 학생 이름을 못 외우는 나를 두고 학생들은 질책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졸업생이 수능원서 신청하러 모교에 왔다가 날 찾아와 자기 이름을 모른다고 서운해 한다.) 그때마다 멍청해서 그러지 싸가지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변명한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였던 시인 백석은 그렇게 학생들의 이름을 잘 외웠다는데....

 

백선생님은 출석부를 옆에 낀 채, 맨 앞줄의 학생부터 차례차례로 50여 명의 학생을 모조리 얼굴만 보며 이름을 불러가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선생님이 부르시는 이름들이 단 하나도 착오가 없이 정확한 호명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꼭 무엇에 홀린 듯 어리둥절하였다. 선생님의 그 모습은 당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신기라 할 만한 것이었다. 나이 많은 선생님들은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시거나, 부른다 해도 틀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새로 부임해온 젊은 선생님이 불과 사흘 만에 우리반 학생들의 이름을 모조리 다 외우시다니. 우리는 그날부터 백선생님의 비상한 기억력에 완전히 포로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선생님은 학생들과 더 친해지기 위해서 명렬표를 갖다놓고서 열심히 외우셨을 것이다. 이것은 교사로서의 그분의 성실한 자세를 말해준다.” - 내 고보 시절의 은사 백석 선생

 

그러나 백석 때문에 잃어버린 교사로서의 자존심을 도로 백석에게서 되찾았다. 26살 백석은 22살 자야에게 홀딱 반해서 학생들 인솔 중에 자야를 만나러 다니다가 급기야....

 

선생님은 밤에는 다른 곳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오셨다가 시합만 끝나면 아니 계셨다는 이야기까지 실토하고 말았다. 단속교사들은 이 사실을 함흥의 영생보고로 통했다. 영생보고는 미션계열로서 근무수칙이나 학칙이 대단히 엄격했던지라 별다른 도리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학교의 이사장은 시인이자 촉망받는 영문학도로서의 당신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당신은 바로 같은 영생 계열의 여자고보로 전근발령이 떨어졌다. 당신은 이 결정을 순순히 접수하고 새로운 근무지로 갔다. 그러나 한번 마음이 떠나버렸고, 또 여학생들을 가르치기가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어서 여름방학이 되면 사표를 내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 김자야 내 사랑 백석

 

백석뿐만이 아니다. 시인 김수영도 내겐 참 고마운 분이다. 서울대 영어교수였던 그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수업을 일찍 끝내 버린다. 백석이나 김수영이나 모두 사랑을 위해 학생을 포기해 버린 선생님이다. 거기에 비해 수업은 열심히 하되 학생 이름 잘 모르는 건 용서 받지 않을까? **아 용서해줘ㅋㅋ

 

그러던 어느 날 종로4가에서 학원 수업을 마치고 전차를 탔는데 거기에서 우연히 수영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수영은 당시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수영은 나를 보더니 수업을 반만 하고 곧 돌아올 테니 벤치에 앉아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 마침내 수업을 일찍 끝내고 온 수영이 내 옆에 앉았다. 잠시 우리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어색했다기보단 개화 직전의 꽃망울 속 같은 두근거림이 가득한 침묵이었다. 한참을 뜸 들이다가 수영은 “My soul is dark”하고 신음 같은 말을 토해냈다.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은 수영의 프로포즈였던 것이다. -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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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백석 - 문학동네 글과 길 2
김자야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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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부하는 게 좋아서 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교사는 공부만 좋아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아는 것을 좋아하는 것보단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의 이름을 못 외운다. 일부러 외워보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 외어진다. 학생 이름을 못 외우는 나를 두고 학생들은 질책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졸업생이 수능원서 신청하러 모교에 왔다가 날 찾아와 자기 이름을 모른다고 서운해 한다.) 그때마다 멍청해서 그러지 싸가지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변명한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였던 시인 백석은 그렇게 학생들의 이름을 잘 외웠다는데....

 

백선생님은 출석부를 옆에 낀 채, 맨 앞줄의 학생부터 차례차례로 50여 명의 학생을 모조리 얼굴만 보며 이름을 불러가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선생님이 부르시는 이름들이 단 하나도 착오가 없이 정확한 호명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꼭 무엇에 홀린 듯 어리둥절하였다. 선생님의 그 모습은 당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신기라 할 만한 것이었다. 나이 많은 선생님들은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시거나, 부른다 해도 틀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새로 부임해온 젊은 선생님이 불과 사흘 만에 우리반 학생들의 이름을 모조리 다 외우시다니. 우리는 그날부터 백선생님의 비상한 기억력에 완전히 포로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선생님은 학생들과 더 친해지기 위해서 명렬표를 갖다놓고서 열심히 외우셨을 것이다. 이것은 교사로서의 그분의 성실한 자세를 말해준다.” - 내 고보 시절의 은사 백석 선생

 

그러나 백석 때문에 잃어버린 교사로서의 자존심을 도로 백석에게서 되찾았다. 26살 백석은 22살 자야에게 홀딱 반해서 학생들 인솔 중에 자야를 만나러 다니다가 급기야....

 

선생님은 밤에는 다른 곳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오셨다가 시합만 끝나면 아니 계셨다는 이야기까지 실토하고 말았다. 단속교사들은 이 사실을 함흥의 영생보고로 통했다. 영생보고는 미션계열로서 근무수칙이나 학칙이 대단히 엄격했던지라 별다른 도리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학교의 이사장은 시인이자 촉망받는 영문학도로서의 당신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당신은 바로 같은 영생 계열의 여자고보로 전근발령이 떨어졌다. 당신은 이 결정을 순순히 접수하고 새로운 근무지로 갔다. 그러나 한번 마음이 떠나버렸고, 또 여학생들을 가르치기가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어서 여름방학이 되면 사표를 내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 김자야 내 사랑 백석

 

백석뿐만이 아니다. 시인 김수영도 내겐 참 고마운 분이다. 서울대 영어교수였던 그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수업을 일찍 끝내 버린다. 백석이나 김수영이나 모두 사랑을 위해 학생을 포기해 버린 선생님이다. 거기에 비해 수업은 열심히 하되 학생 이름 잘 모르는 건 용서 받지 않을까? **아 용서해줘ㅋㅋ

 

그러던 어느 날 종로4가에서 학원 수업을 마치고 전차를 탔는데 거기에서 우연히 수영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수영은 당시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수영은 나를 보더니 수업을 반만 하고 곧 돌아올 테니 벤치에 앉아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 마침내 수업을 일찍 끝내고 온 수영이 내 옆에 앉았다. 잠시 우리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어색했다기보단 개화 직전의 꽃망울 속 같은 두근거림이 가득한 침묵이었다. 한참을 뜸 들이다가 수영은 “My soul is dark”하고 신음 같은 말을 토해냈다.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은 수영의 프로포즈였던 것이다. -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밑줄>

나는 함흥 영생고보의 한 영어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날은 내가 함흥 권번에 소속이 되어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으로 나갔던 바로 첫날이었다. 영생고보의 어느 교사가 이임하는 송별회의 자리인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당신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 당신에게 아호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子夜)라고 합시다

 

서울에 갔더니 고향 평안도 정주에서 큰아버님 내외분도 오시고, 집안 식구들이 다들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갑자기 색시 선을 보라고 우격다짐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맞선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강제로 장가를 들게 되었는데

 

그 무렵 당신은 세 번째로 장가를 들고 왔었고, 내 마음은 한바탕 풍파를 겪은 듯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삼세 번이나 장가를 들었으니 무슨 아이들의 장난이기라도 한 것인가? 거의 넌센스에 가까웠다. 물론 자의가 아니었음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신은 그만 혼자서 쓸쓸히 만주의 신경으로 아주 떠나버렸다. 그때 보았던 당신의 초췌한 뒷모습이 내가 보았던 당신의 마지막 모습이자 우리 둘 사이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일본의 문인들을 화제로 떠올리긴 했지만, 당신은 일본말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일본유학도 다녀왔으니 일본말도 썩 잘했을 것이나, 당신은 일본말을 써야 할 때 거기에 대신 바꿔넣을 수 있는 우리말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보통 담화 때는 주로 표준말을 썼지만 당신의 억양은 짙은 평안도 말씨였다. 무슨 일로 기분이 상했거나 고향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때 당신은 야릇한 고향 사투리를 일부러 강하게 쓰는 습관이 있었다.

예컨대 천정을 턴덩으로, 정거장을 덩거당으로 정주를 덩두’, 질겁을 디겁’, 아랫목을 구태어 아르궂따위로 쓰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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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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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교과서에 실린 소설이기에 의무적으로 읽었던. 그래서 의미도 감동도 찾지 못한. 그런데 한 학생이 질문을 한다. 문제집에 실린 문제였으면 대충 풀어주고 말든가 모른다고 하든가 했을텐데...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개밥바라기별을 집어들었다.

 

사닥다리나 다름없는 가파른 계단 위에 서너 칸쯤 발 딛고 올라서자마자 널판자 문에 머리가 닿아버린다. 나는 널판자의 손잡이를 쥐고 위로 쳐들었다. 나는 이 천장 위 다락방 공간을 잠수함이라고 불렀다. 물론 내 방의 별명은 동생에게만 가르쳐주었다. 나는 다 올라서지 않고 잠깐 멈춰 서서 머리만 내밀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떠나기 전에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파충류의 허물과도 같은 것이고 나는 그 허물을 다시 뒤집어쓰고 싶어서 돌아온 건 아닌가.

시장 안의 점포는 아버지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어머니가 이리저리 까먹다가 남은 마지막 밑천이었다. 살림집을 팔로 누나들이 시집가기 전까지는 점포를 사고 남은 돈으로 전셋집을 얻었다. 누나들이 집을 떠난 뒤 우리 세 사람은 점포 안에서 살아왔다. 어린 아우와 어머니가 가게에 붙은 방에서 잤고 나는 그 천장위의 잠수함을 썼다. 이를테면 거꾸로 기어들어가는 셈이라 다락방의 지붕 바깥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속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두운 가게의 천장 위에 내 잠수함은 뚜껑을 닫고 선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뚜껑을 젖히고 머리를 내밀자 나는 다시 심해에 잠기는 것 같았다.“

 

학생은 잠수함, 허물, 선장의 의미를 알고 싶어 했다. 책의 전문을 읽지 않아도 문맥적으로 잠수함은 다락방, 허물은 추억, 선장은 를 의미한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그렇다는 걸 안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질문한 그 학생에게 해줄 변변한 답을 찾지 못해 고민이다.

 

나는 (그 시절에 다들 그랬겠지만) 단칸방이나 방두칸 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청소년이 되면서 내 몸 하나를 따로 둘 공간에 대한 욕망이 커져서 창고에 야전침대를 놓고 지냈다. 나중엔 내 손으로 연탄보일러를 깔고 방이란 걸 만들어 냈다. 그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우리 때는 그 다락방, 지하실, 창고가 육신을 두기엔 춥고, 덥고, 좁았지만 나만의 공간이라는 기쁨에 그 모든 아쉬움을 느낄 틈이 없었으리다.

 

물론 요즘 학생들에도 각자의 방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너무 따뜻하고 시원하고 넓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만들어낸 공간이란 성취감도 없다. 그래서 작가가 표현한 잠수함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있으리라.

 

그 시절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울테니 가르치지 않는다는 변명으로 답변을 대신한다. 그저 할아버지의 어릴 때 이야기려니 생각해두길.. 


<밑줄>

학교에서의 경쟁은 치열한 것이었다. 어떤 친구는 지금도 그 학교의 학력평가시험을 치르던 나날이 꿈에 보인다고 했다. 다른 애들은 부지런히 쓰고 있는데 자기만 한 문제도 몰라서 백지를 쥐고 땀을 흘리다가 깨어난다는 식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간에 냉정하고 예의가 바른 편이었으며 속을 내보이거나 남에게 약하게 취급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초급학년에서 서투른 짓으로 반 아이들의 비웃음을 몇 번 샀던 아이를 기억하는데, 그는 고학년이 되기까지 끝내 자존심을 회복하지 못했고 친구도 없이 지내다가 어디론가 전학을 갔다.

나도 월말 학력평가시험에 관해서는 원한이 깊은 사람이다. 전 학년의 학생들 이름을 점수대로 석차를 매겨서 교실 앞 복도에 붙여놓고는 했는데 어느 달엔가 성적이 떨어져서 어머니를 격노시켰다. 나는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학교까지 되돌아가 캄캄한 복도에 서서 성냥불을 그어대며 나보다 앞 순위에 있는 아이들의 이름과 점수와 석차를 베껴와야만 했다.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 떠오르던 수많은 아이들의 이름은 실체가 없는 글씨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뒤에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중학교도 그랬지만 고등학교에 가서도 나는 학급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아니 거의 죽을 맛으로 학교에 다녔다고나 할까.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날마다 학교에 불이 나거나 전쟁으로 폭격에 무너져 내리는 교사 건물을 떠올렸다.

나는 교실 안의 공상가였다. 창밖의 빈 운동장과 아카시아나무를 바라보든가 책상 밑에 다른 책을 감춰두고 읽거나 노트에 춘화를 그리면서 선생이 쓸데없는 소리만 떠든다고 여겼다. 나는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점심시간마다 재담으로 아이들을 웃기거나 광댓짓을 벌이곤 했다. 그래서 하루라도 이 교실 안의 피에로가 결석하면 아이들이 하루 종일 뭔가 빠진 것 같더라는 말에 만족했다.

아침에 등교할 적마다 두발검사에 복장검사를 하질 않나 어떤 교장은 부임하자마자 전교생의 바지 호주머니를 꿰매도록 지시했다. 추우면 참된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다니면 단정해 보이지 않는다나 뭐라나. 우리는 교복이 일제시대에 생겨난 것도 알고 있었고, 교모를 쓰고 목까지 올라오는 높은 칼라에 학년 표지와 배지를 꽂고 금속 단추를 달고 이름표를 붙이는 복장이 십구세기 유럽 제국주의 시대의 군복을 베낀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다 매주 월요일엔 군대처럼 열병식으로 조회를 했다. 당연히 학생회장은 대대장이고 우리는 졸병인 셈이었다. 머리털은 죄수들같이 언제나 하얗게 속살이 보이도록 박박 깎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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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시절의 이야기
임종국 지음 / 아세아문화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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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의 빼앗긴 시절의 이야기를 읽고

 

광복의 해 16살이던 소년 임종국에게 패잔 일본군이 20년 뒤에 보자는 말을 한다. 그로부터 정확히 20년 후인 1965년 다카키 마사오(한국명 박정희)에 의해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이뤄졌다. 이때부터 임종국은 친일과거사를 연구했고 그 결과 심지어 아버지의 친일행적마저 폭로하였다. 60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집요한 노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생기고 친일인명사전이 탄생하게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펴낸 임종국 선집 총 8편은 여성의 운동, 특히 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밑줄>

 

김연실전은 단순히 신여성사가 아니라 여학생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새로워진 사회에서 배우고 있는 여학생들은 지난날 새로워지려는 사회의 여학생들이 어떻게 고민하고 행동하고 전진하고 희생되었는가를 알고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3월의 횃불은 이 땅의 여학생들이 표현한 최초의 스튜던트 파워였다. 이로써 여학생들은 남학생과 함께 동등할 수 있다고 증명한 경성여보고의 어느 여학생은 만세행렬을 방관하는 남학생을 심지어 뺨까지도 갈겼다. 이리하여 반영독립운동으로 6번째 투옥된 네루는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의 딸에게 보냈다.

코리아의 민중 특히 청년남녀들은 우세한 적에 항거하여 용감하게 투쟁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그들의 이상을 위해 순사(殉死)한 것이다. 코리아에서는 대개 학교를 갓 나온 소녀들이 이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면 아마 너도 마음이 끌릴 것으로 생각한다

네루가 탄복한 한국 여학생들의 자주독립정신과 항거의 기록!

 

이화여고 310명 전부, 동덕여고 190명 전부, 배화여고 200명 전부, 숙명여고 406명 전부, 경성여자상업 282명 전부, 경성실천여고 112명 전부, 정신여고 93명 전부 ... 1930115일 아침 300명의 이화여고생들은 격문을 뿌렸던 것이다. “학교는 경찰의 침입을 반대하라. 식민지 교육정책을 전폐하라. 광주학생사건에 대하여 분개하라. 학생 희생자를 모두 석방하라. 조선의 청년학생 옹호, 일본의 야만정책을 반대하라. 각 학교의 퇴학생을 복교시켜라” ... 이 사건이 세칭 여학교 만세사건이다. 7명 수형자 중에서 5명이 이화여고 학생이어서 혹은 이화여학교사건이라고도 한다. 6.10만세와 광주학생사건으로 한국의 남학생들이 용감했다면 한국의 여학생들도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여학교 만세사건을 일으킴으로써 그들의 의기와 용감성을 천하에 과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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