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지음 / 책읽는오두막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공부하는 게 좋아서 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교사는 공부만 좋아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아는 것을 좋아하는 것보단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의 이름을 못 외운다. 일부러 외워보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 외어진다. 학생 이름을 못 외우는 나를 두고 학생들은 질책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졸업생이 수능원서 신청하러 모교에 왔다가 날 찾아와 자기 이름을 모른다고 서운해 한다.) 그때마다 멍청해서 그러지 싸가지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변명한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였던 시인 백석은 그렇게 학생들의 이름을 잘 외웠다는데....

 

백선생님은 출석부를 옆에 낀 채, 맨 앞줄의 학생부터 차례차례로 50여 명의 학생을 모조리 얼굴만 보며 이름을 불러가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선생님이 부르시는 이름들이 단 하나도 착오가 없이 정확한 호명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꼭 무엇에 홀린 듯 어리둥절하였다. 선생님의 그 모습은 당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신기라 할 만한 것이었다. 나이 많은 선생님들은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시거나, 부른다 해도 틀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새로 부임해온 젊은 선생님이 불과 사흘 만에 우리반 학생들의 이름을 모조리 다 외우시다니. 우리는 그날부터 백선생님의 비상한 기억력에 완전히 포로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선생님은 학생들과 더 친해지기 위해서 명렬표를 갖다놓고서 열심히 외우셨을 것이다. 이것은 교사로서의 그분의 성실한 자세를 말해준다.” - 내 고보 시절의 은사 백석 선생

 

그러나 백석 때문에 잃어버린 교사로서의 자존심을 도로 백석에게서 되찾았다. 26살 백석은 22살 자야에게 홀딱 반해서 학생들 인솔 중에 자야를 만나러 다니다가 급기야....

 

선생님은 밤에는 다른 곳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오셨다가 시합만 끝나면 아니 계셨다는 이야기까지 실토하고 말았다. 단속교사들은 이 사실을 함흥의 영생보고로 통했다. 영생보고는 미션계열로서 근무수칙이나 학칙이 대단히 엄격했던지라 별다른 도리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학교의 이사장은 시인이자 촉망받는 영문학도로서의 당신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당신은 바로 같은 영생 계열의 여자고보로 전근발령이 떨어졌다. 당신은 이 결정을 순순히 접수하고 새로운 근무지로 갔다. 그러나 한번 마음이 떠나버렸고, 또 여학생들을 가르치기가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어서 여름방학이 되면 사표를 내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 김자야 내 사랑 백석

 

백석뿐만이 아니다. 시인 김수영도 내겐 참 고마운 분이다. 서울대 영어교수였던 그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수업을 일찍 끝내 버린다. 백석이나 김수영이나 모두 사랑을 위해 학생을 포기해 버린 선생님이다. 거기에 비해 수업은 열심히 하되 학생 이름 잘 모르는 건 용서 받지 않을까? **아 용서해줘ㅋㅋ

 

그러던 어느 날 종로4가에서 학원 수업을 마치고 전차를 탔는데 거기에서 우연히 수영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수영은 당시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수영은 나를 보더니 수업을 반만 하고 곧 돌아올 테니 벤치에 앉아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 마침내 수업을 일찍 끝내고 온 수영이 내 옆에 앉았다. 잠시 우리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어색했다기보단 개화 직전의 꽃망울 속 같은 두근거림이 가득한 침묵이었다. 한참을 뜸 들이다가 수영은 “My soul is dark”하고 신음 같은 말을 토해냈다.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은 수영의 프로포즈였던 것이다. -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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