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개밥바라기별. 교과서에 실린 소설이기에 의무적으로 읽었던. 그래서 의미도 감동도 찾지 못한. 그런데 한 학생이 질문을 한다. 문제집에 실린 문제였으면 대충 풀어주고 말든가 모른다고 하든가 했을텐데...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개밥바라기별을 집어들었다.

 

사닥다리나 다름없는 가파른 계단 위에 서너 칸쯤 발 딛고 올라서자마자 널판자 문에 머리가 닿아버린다. 나는 널판자의 손잡이를 쥐고 위로 쳐들었다. 나는 이 천장 위 다락방 공간을 잠수함이라고 불렀다. 물론 내 방의 별명은 동생에게만 가르쳐주었다. 나는 다 올라서지 않고 잠깐 멈춰 서서 머리만 내밀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떠나기 전에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파충류의 허물과도 같은 것이고 나는 그 허물을 다시 뒤집어쓰고 싶어서 돌아온 건 아닌가.

시장 안의 점포는 아버지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어머니가 이리저리 까먹다가 남은 마지막 밑천이었다. 살림집을 팔로 누나들이 시집가기 전까지는 점포를 사고 남은 돈으로 전셋집을 얻었다. 누나들이 집을 떠난 뒤 우리 세 사람은 점포 안에서 살아왔다. 어린 아우와 어머니가 가게에 붙은 방에서 잤고 나는 그 천장위의 잠수함을 썼다. 이를테면 거꾸로 기어들어가는 셈이라 다락방의 지붕 바깥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속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두운 가게의 천장 위에 내 잠수함은 뚜껑을 닫고 선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뚜껑을 젖히고 머리를 내밀자 나는 다시 심해에 잠기는 것 같았다.“

 

학생은 잠수함, 허물, 선장의 의미를 알고 싶어 했다. 책의 전문을 읽지 않아도 문맥적으로 잠수함은 다락방, 허물은 추억, 선장은 를 의미한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그렇다는 걸 안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질문한 그 학생에게 해줄 변변한 답을 찾지 못해 고민이다.

 

나는 (그 시절에 다들 그랬겠지만) 단칸방이나 방두칸 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청소년이 되면서 내 몸 하나를 따로 둘 공간에 대한 욕망이 커져서 창고에 야전침대를 놓고 지냈다. 나중엔 내 손으로 연탄보일러를 깔고 방이란 걸 만들어 냈다. 그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우리 때는 그 다락방, 지하실, 창고가 육신을 두기엔 춥고, 덥고, 좁았지만 나만의 공간이라는 기쁨에 그 모든 아쉬움을 느낄 틈이 없었으리다.

 

물론 요즘 학생들에도 각자의 방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너무 따뜻하고 시원하고 넓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만들어낸 공간이란 성취감도 없다. 그래서 작가가 표현한 잠수함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있으리라.

 

그 시절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울테니 가르치지 않는다는 변명으로 답변을 대신한다. 그저 할아버지의 어릴 때 이야기려니 생각해두길.. 


<밑줄>

학교에서의 경쟁은 치열한 것이었다. 어떤 친구는 지금도 그 학교의 학력평가시험을 치르던 나날이 꿈에 보인다고 했다. 다른 애들은 부지런히 쓰고 있는데 자기만 한 문제도 몰라서 백지를 쥐고 땀을 흘리다가 깨어난다는 식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간에 냉정하고 예의가 바른 편이었으며 속을 내보이거나 남에게 약하게 취급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초급학년에서 서투른 짓으로 반 아이들의 비웃음을 몇 번 샀던 아이를 기억하는데, 그는 고학년이 되기까지 끝내 자존심을 회복하지 못했고 친구도 없이 지내다가 어디론가 전학을 갔다.

나도 월말 학력평가시험에 관해서는 원한이 깊은 사람이다. 전 학년의 학생들 이름을 점수대로 석차를 매겨서 교실 앞 복도에 붙여놓고는 했는데 어느 달엔가 성적이 떨어져서 어머니를 격노시켰다. 나는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학교까지 되돌아가 캄캄한 복도에 서서 성냥불을 그어대며 나보다 앞 순위에 있는 아이들의 이름과 점수와 석차를 베껴와야만 했다.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 떠오르던 수많은 아이들의 이름은 실체가 없는 글씨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뒤에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중학교도 그랬지만 고등학교에 가서도 나는 학급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아니 거의 죽을 맛으로 학교에 다녔다고나 할까.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날마다 학교에 불이 나거나 전쟁으로 폭격에 무너져 내리는 교사 건물을 떠올렸다.

나는 교실 안의 공상가였다. 창밖의 빈 운동장과 아카시아나무를 바라보든가 책상 밑에 다른 책을 감춰두고 읽거나 노트에 춘화를 그리면서 선생이 쓸데없는 소리만 떠든다고 여겼다. 나는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점심시간마다 재담으로 아이들을 웃기거나 광댓짓을 벌이곤 했다. 그래서 하루라도 이 교실 안의 피에로가 결석하면 아이들이 하루 종일 뭔가 빠진 것 같더라는 말에 만족했다.

아침에 등교할 적마다 두발검사에 복장검사를 하질 않나 어떤 교장은 부임하자마자 전교생의 바지 호주머니를 꿰매도록 지시했다. 추우면 참된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다니면 단정해 보이지 않는다나 뭐라나. 우리는 교복이 일제시대에 생겨난 것도 알고 있었고, 교모를 쓰고 목까지 올라오는 높은 칼라에 학년 표지와 배지를 꽂고 금속 단추를 달고 이름표를 붙이는 복장이 십구세기 유럽 제국주의 시대의 군복을 베낀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다 매주 월요일엔 군대처럼 열병식으로 조회를 했다. 당연히 학생회장은 대대장이고 우리는 졸병인 셈이었다. 머리털은 죄수들같이 언제나 하얗게 속살이 보이도록 박박 깎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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