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비상을 위한 천 번의 점프 - 최고에 도전하는 김연아를 위한 오서 코치의 아름다운 동행
브라이언 오서 지음, 권도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김연아의 엄마가 쓴 책 다음으로 읽은 연아의 코치 브라이언 오서의 책. 연아와 자신의 삶을 비교해 가면서 쓴 점이 특징이다. 앞의 책에선 부모의 육아관을 읽을 수 있었고, 이 책에선 스승의 교육관을 읽을 수 있었다. 비슷하지만 다른 연아와 오서. (그런데 어찌 보면 오서는 아사다 마오와 더 닮았다. 트리플악셀을 잘 한다는 점, 올림픽 금메달을 못 땄다는 점. 그렇게 보면 마오는 장차 오서 같은 코치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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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우연은 누군가에게는 필연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내가 네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받은 한 통의 전화가 나에게는 그랬다. 아버지에게 온타리오 주 한 구석에 있는 페네탕이라는 도시에서 코카콜라를 만드는 공장을 맡아서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결단은 이후 나의 인생을 결정하는 필연이 되었다.

아버지의 결정으로 나는 눈과 얼음이 흔한 북쪽 지방으로 가게 되었고, 그 지방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겨울 스포츠를 즐기게 되었으며,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스포츠를 만나게 되었다

-> 연아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살고 있던 곳에 가까이에 스케이트장이 생기게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연아는 아니었을지도

 

잭슨은 어머니에게 내게 재능이 있으니 개인 레슨을 시켜주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 제자를 알아보는 것이 스승의 역할이다. 김연아에겐 류종현 코치가 있었다

 

연아와 나 사이에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누가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아도 스케이트를 탔다는 점, 아니 타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좋아해서 아무도 말릴 수 없을 정도였다는 점일 것이다

-> 부모의 양육, 교사의 교육 보단 자식/학생의 본성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누리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 최고가 되기 위해선 평범한, 일반적인, 균형 있는 삶은 포기해야 한다. 어쩌면 최고가 최선은 아닐 수도.

 

20065월 어느날, 나는 한국에서 온 김연아라는 이름의 소녀를 처음 만났다. 그날은 내가 유서 깊은 토론토 크리켓 스케이팅 앤 컬링 클럽에서 스케이트를 지도하기로 결심한 지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 연아가 그곳에 온 이유는 데이비드 윌슨으로부터 새 프로그램을 받기 위해서이다. 연아 어머니와 대한빙상경기연맹은 내게 연아에게 점프를 가르쳐 줄 수 있는지 물었다

-> 최고가 되기 위해선 재능과 노력 못지않게 행운이 있어야 한다.

 

나는 코치와 선수의 관계는 더그와 나의 관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나를 보아왔기 때문에 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코치였고, 나를 위해서 언제나 헌신적으로 가르쳐주었다. 나는 더그가 그랬던 것처럼 연아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서 효과적으로 그녀를 가르치고 앞으로 이끌어주는 딱맞는 선생님이 되고자 한다

-> 연아와 오서의 마지막은 석연치 않았지만 함께했던 몇 년간은 최소한 그랬으리라 믿고 싶다. 연아도 그의 선수생활 시작과 마지막은 류종현 코치와 함께 했다.

 

어린 시절을 평범하게 보낼 수 없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그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할리우드의 어린 아역 스타처럼 어린 나이에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그것만 바라보며 달려간 사람이 어른이 되어서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이는 비단 대중 스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대부분의 스포츠 선수도 겪는 문제이다.

-> 비단 대중 스타나 스포츠 선수뿐만이 아니라 수능을 치르는 이 나라 모든 학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입을 위해 어린 시절의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대입을 성공한 이후엔 정상적인 어른으로 살지 못한다.

 

부모님은 내가 스케이팅에 재능이 있는 막내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네 명의 자식도 똑같이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 때문에 나머지 가족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부모님은 우리 다섯 형제자매가 각자의 삶을 잘 살아나가도록 이끌어주셨지만, 정작 당신들은 매우 큰 희생을 감수하셨다.

-> 연아 부모와 오서 부모, 공통점은 자식을 위한 희생, 차이점은 집중과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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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재능에 꿈의 날개를 달아라
박미희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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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연아 엄마에게 김연아 엄마 같은 엄마가 있었다면,

김연아 엄마는 김연아보다 더 훌륭한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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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가 처음 스케이트를 접한 것은 유치원에 다니던 일곱 살 여름이었다. 우리가 사는 군포에서 가까운 과천시민회관에 실내 링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들보다도 우리 부부가 더 펄쩍 뛰며 반가워했다. 남편이나 나나 워낙 스케이트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 부모가 좋아해야 아이도 좋아하게 된다

 

언니는 시키려면 취미로 하면 좋겠고, 동생은 좀 밀어줘서 크게 키워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재능은 선생이 알아본다. 안타깝지만 자매끼리도 능력차는 있다.

 

연아가 개인 레슨을 시작하면서 나는 내 생활을 완전히 연아에게 맞췄다

-> 자식을 위한 부모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연아는 악착같이 해내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남달랐다

-> 결국 자식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죄송하지만 코치님 상황 때문에 우리 연아가 주춤할 수 없으니, 코치님을 바꾸겠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 마음 약한 부모는 자식을 성공시키기 어렵다.

 

점프 기술은 2차 성징이 시작되기 전에 완성해야 하는데, 이후에는 골격이 커지고 체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는 데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 피겨의 성공 여부는 초등학교 때 판단

 

나는 어떻게 해서든 시켜야 했으니 매일 매일이 전쟁이었다

-> 자신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결국 하고 싶지 않아서 포기할 때가 온다. 이때 부모의 악역이 필요하다.

 

한때는 국내에서 뚜렷한 경쟁자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의욕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무대를 경험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 끊임없는 자극,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은 부상이 많다. 얼음판에서 점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부상의 위험이 크다. 심지어 십 대 초반의 어린 선수들이 노인들에게서나 나타나는 퇴행성관절염을 앓는 경우도 많다

아픈 아이를 얼음판 위에 내보낼 때의 마음은 피겨맘으로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이다.

어차피 아플 거야. 완치되기 전까지는 통증이 있을 테니까 그걸 인정해야 돼. 울어도 없어지지 않는 거니까 조금만 참자.” 나는 그렇게 아이를 설득해서 연습을 시켰다.

어렸을 때는 아픈 아이를 구슬려서 한 번 뛰게 하느라 힘들었다면, 지금은 말리느라 힘들다. 몸이 아파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아이는 무리가 될 정도로 연습을 하려고 한다.

-> 격투기에선 벨트 아래를 가격하는 것을 금지한다. 선수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피겨에선 점프를 금지해야 한다.


엄마로서 좀 더 너그럽게 대해줬더라면 하는 후회도 생긴다. 물론 악역을 자처했던 덕분에 좋은 성과를 얻은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방법이 과연 옳았을까? 그저 부디 연아 마음에 그 시절의 전쟁들이 상처로 남지 않았기를

->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때론 그 상처로 평생을 아파하는 경우도 많으니

 

연아한테 첫 번째 부상이 왔다. 남편의 회사가 결국 문을 닫기 직전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스케이트를 그만두기로 했다. 선생님은 국제대회라도 한번 나가보자며 나를 설득했다.

-> 그때 선생님이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나 내 품에 있지도 않을 내 딸, 혼자서 길을 가더라도 나 대신 누군가 든든히 지켜주는 존재가 있다는 믿음이 내게는 필요했다

-> 메시는 골을 넣을 때마다 성호를 긋는다. 연아는 링크에 들어갈 때마다 그런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연아는 제대로 학교에 다닐 시간이 없었다. 연아의 입장에서는 공부를 못한 것 것 못지 않게 학교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것도 아쉬울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나. 갈 길이 그렇게 정해졌던 것을.

-> 외국은 학업, 직업과 병행하여 운동을 한다. 그러다보니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분위기에서 우수한 선수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로지 운동만 한다.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이 적다. 그런 상황에서 우수한 선수가 나오는 확률은 기적에 가깝다.

 

남편과 큰아이의 섭섭한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거기에 마음을 쓰다 보면 하는 일도 흐트러질 게 뻔했고, 그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힘겨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약해진 마음으로 그 모든 요구들을 들어줬더라면, 연아의 뒷바라지는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 부모의 희생뿐만이 아니라 형제자매의 희생까지 있어야 한 아이의 성공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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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 개정판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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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 시절인 80년대에 이미 컴퓨터를 접하고, 대학생이 된 90년대에 인터넷을 한, 비교적 시류에 빠르게 적응하는 편이지만, 주식거래는 해 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확히 말해 유산으로 받은 10주와 내가 산 10주가 있으니 그게 바로 한겨레신문 주식이다. (아버지가 한겨레신문 창간 주주였다.)

그러나 이제는 한겨레신문도, 경향신문도 더 이상 구독하지 않는다. 어느덧 오십이 넘어 기득층, 보수층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 한겨레나 경향이 나보다 더 빨리 늙어 보수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고 싶다.

지금 내가 구독하고 있는 건 녹색평론, 오늘의교육, 작은책등이다. 환경, 교육, 노동에 대한 진보성을 아직도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잡지들이다.

손석춘의 신문읽기의 혁명이 나온 지 20년이 넘어가지만 그 옛날 조중동은 여전한 것 같고, ‘한경오근근또는 안간으로 버티는 것 같다. 잃어버린 20년이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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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읽지 않으면서부터 실로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다. 사람들은 남이 하는 일들에만 관심을 갖고 자신의 중요한 의무는 아주 쉽게 있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파우스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문호 괴테가 신문 읽기에 대해 남긴 혹평이다. 신문 읽는 것을 혐오한 작가는 비단 괴테만이 아니다. 숲속 생활을 찬미한 소로우 또한 신문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에 눈을 돌려 그것을 통해서 신을 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신문이 갖는 중요성은 괴테나 소로우가 살았던 19세기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현대인의 삶은 이제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 변화무쌍한 삶의 환경과 우리 삶을 연결해주는 가교가 다름 아닌 신문인 까닭이다.

따라서 문제는 신문을 읽느냐 읽지 않느냐에 있지 않다. 신문을 어떻게 읽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신문사는 일반 회사와는 달리 기업으로서의 이윤 추구보다는 전체 국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공공기관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주식회사 형태로 되어 있음에도 우리 신문들의 소유 구조는 상당히 독특하다. ‘사주(社主)’에 의해 철저히 전제적인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다. 가령 민족지를 자처하는 두 신문의 경우, ‘조선일보는 친일 금광재벌 방응모 이래 4대가 세습하고 있으며, ‘동아일보도 친일 지주 김성수 이래 4대로 대물림해가고 있다. 상업지를 표방한 다른 신문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일보는 장기영 씨가 창업한 이후 그의 아들들이 신문사 경영을 맡고 있다. ‘중앙일보의 사주는 삼성그룹과 친인척 관계로서 홍석현 씨 자신이 보광그룹의 회장이다. ‘국민일보세계일보의 사주는 다 알다시피 순복음교회와 통일교회다.

조선일보는 방씨 일가가 90%대의 주식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한국일보는 장씨 일가가 무려 99%에 달하는 주식을 완전히 독점하고 있다. ‘동아일보또한 인촌기념회와 김씨 일가가 75% 이상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비정상적인 소유 구조는 자연스럽게 각 신문사 내부에서 이들의 권력을 무소불위로 만들어준다.

 

신문 편집의 궁극적 주체가 사주들이므로 대부분 우리 신문들 편집 방향이나 사설 논조가 친자본이고 노동자들에 적대적인 것은 필연이다. 사주 자신이 우리 사회에서 자본가로서 스스로 신문사 내부의 언론노동조합운동에 적대적이거니와, 노동쟁의 대부분이 주요 광고주인 재벌들의 사업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까닭이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힘의 균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한국의 현실은 참으로 우려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사설은 고교생들에게 논리적 사회의 훈련용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대다수 고등학교에서 일선 교사들이 사설을 논술 수업에 적극 활용할 뿐 아니라, 실제로 신문 사설이 대입시험에 지시문으로 출제되고 있다.

이른바 신문교육운동(NIE)’이란 것도 명목상으로야 신문 편집인협회가 교육부로 보낸 공한에서 보듯 청소년 어린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신문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언론의식, 민주의식, 시민의식을 깨닫게 되어 올바른 현대인으로 자라게 될 것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한낱 사주의 사설(私說)에 지나지 않거나 천편일률적인 사설들을 통해 우리 청소년들이 얼마나 민족문제나 노동문제에 비뚤어진 시각을 갖게 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신문의 성격이 확연하게 다른 두 신문을 동시에 구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독료가 부담될 수는 있으나, 삶의 현실을 정확히 보기 위한 투자로 여기자. 조금 더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독자라면 언론비평 전문지들을 구입하여 볼 수 있다. 현재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미디어오늘이라는 주간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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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되겠지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원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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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좋아하는 일본 사상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 분 책만 나오면 바로 사서 읽는다. 그리곤 이 분을 만나기 위해 고베에 있는 집(개풍관)에 직접 찾아간 일도 있다. 아내 덕분에 우치다를 알게 되서  책 몇권을 읽긴 했는데, 그 것 중 이게 제일 재밌다.

 

우치다와 나는 (감히ㅋㅋ) 비슷한 면이 꽤 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가출한 것, 딸을 키운 것, 여학교에서 근무한 것,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 집을 지은 것, 밴드를  좋아하고, 여행을 안 좋아하는 집돌이 등등

 

하지만 차이는 첫째, 우치다가 블로그에 쓴 글은 책으로 내겠다는 편집자가 줄을 섰지만 난 그렇지 않다는 점. 둘째, 우치다는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집을 지었지만 (나도 우치다처럼 1층은 음악과 체육이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으나ㅠ.) 나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 셋째, 우치다는 사람의 장점을 칭찬하는 능력이 있으나 난 그 반대라는 점.

 

아무튼 어떻게든 되겠지란 낙천적인 성격이 무엇보다 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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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스승은 무의식적으로 제자가 자기보다 열등한상황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 탁월할 스승님을 모시고 있다고 믿는 편이 제자의 기술 향상에는 효율적입니다. 다만 이 시스템에는 어두운 측면이 있습니다. 언제나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계속 여기도록 만들기 위해 제자의 실력이 향상하지 못하도록 스승이 제자의 성장을 무의식적으로 가로막을 위험이 있다는 점입니다.

 

히라카와 군과 나는 얼마 전까지도 일본제국주의 타도라는 슬로건을 외쳤는데, ‘어라, 자본주의도 쓸 만한 시스템이잖아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일반적으로 관계자들 전원이 될수록 득을 볼 수 있는 틀을 만들어 놓으면 어김없이 돈을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분야를 과감하게 탐구해가는 일은 용감하고 창조적인 기획이기는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심사 불가능이라는 판정을 받아 연구자의 자리를 확보하지 못합니다. 내가 8년 동안 32개교의 공모에 모조리 낙방한 것도 채용 여부를 결정하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든가 낮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정도 수준의 연구자인지 심사할 수 없기때문이지 않았을까 하고 돌이켜봅니다.

 

단지 문법 규칙이나 단어를 통째로 외우게 하는 방식은 비효율적이고, 언어의 본질을 본격적이고 학술적으로 설명하는 편이 학생들의 빠른 이해를 돕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관사란 어떤 세계관의 산물인가?’ ‘()이란 어떤 시간 의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가하는 언어의 근원부터 설명하면 학생들은 빨리 이해해줍니다.

 

인간은 내심으로 배움을 원합니다. 교사의 배움의 스위치를 켜주기만 할 따름입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 배움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는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교육법이 효과를 보는 것이 아니니까요.

 

다쓰루 군, 전쟁에서 살아남는 비결을 알고 있는가?” 장인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느데요.”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면 바로 숨는 거야하고 장인이 답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내가 쉬지 않고 책을 낼 수 있는 이유는 이제까지 써놓은 글을 거의 전부 인터넷에 올린 덕분에 편집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각자 기호에 맞게 자기가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와도 금방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중요한 능력일 텐데, 확실히 나는 그런 능력이 높은 편입니다. 혹시 요령이 있다고 한다면, 상대방의 가장 좋은 점을 찾아내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교제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재능은 그곳에 있다기보다는 그곳에서 태어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풍부한 재능으로 만들어낸 작품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마음에 비판보다는 칭찬하고 심사하기 보다는 기대하려고 합니다. 나는 지금 창작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교육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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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 노르웨이의 한국인들이 말하는
박노자 외 지음 / 꾸리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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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식의 장래에 대한 고민이 많다. 애는 참 착하고 성실한 편인데, 그런 애들이 이 대한민국에선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삼 복지국가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겼다. 그런데 의외로 노르웨이에 대한 책이 별로 없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비록 10년전 나온 책이긴 해도 다행히 좋은 책이 있어서 읽게 되었는데, 박노자가 공저자다.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시작해 한동안 박노자에 푹 빠져있었는데, 그게 벌써 20년전이라니 세월 참... 박노자와 나의 공통점(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ㅋㅋ)은 첫째, 나이가 같고, 둘째, 사립학교에서 노예처럼 일했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박노자는 좋은 곳으로 떠났고, 난 그대로 머물러 있단 점이다ㅠ.

 

노르웨이는 산유국이다. 국토는 우리보다 6배나 큰데, 인구는 1/10이나 적다. 따라서 바로 따라할 모델이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소련이 옆에 있어서 공산화 될까봐 복지국가를 택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우리도 그렇게 공산주의가 싫고, 공산화될까봐 두렵다면, 노르웨이처럼 복지국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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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봄. 나는 한국의 모 사립대학에서 비정규직(계약직) 강사로 채용되었다.

한국에서 사립학교 재단의 노예로 사는 것이 너무나 불편했던 나는 외국에 자리를 알아봤다.

우리 가족은 20003월 말에 노르웨이에 와서, 현재 13년간 거주해오고 있다.


노르웨이는 전체 노동인구의 약 30퍼센트가 공공부문에서 일한다. 비록 시장성이 없는전공(고대 희랍어라든가 등등) 졸업자라 해도 일단 인문학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공공부문 직장(예컨대 복지사무소 상담원 등)을 보통 가질 수 있다. 그러니까 한국과 결정적 차이는 결국 공공부문 고용의 크기인 듯하다.


노르웨이는 소매업 시장의 99.3퍼센트를 4개의 큰 독점기업이 독차지하고 있다. 개인이 가게 내서 장사에 성공했다는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노르웨이는 전체 비농업 부문 피고용자에 대비해 비농업 자영업가 4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피고용자 100명 이상이면 노사 간의 소통과 노동자의 발언권, 즉 경영참여가 법제화되어 있다. 때문에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안정된 소득의 임금 노동자들이 맹목적 성장보다 차리리 재분배 위주의 정책에 더 쉽게 합의한다.


한국은 지금도 산업국으로서 최악의 비정규직 비율(노동인구 중 56퍼센트 정도)을 전혀 줄이지 못하고 있지만, 노르웨이는 비정규직이 약 8퍼센트에 불과


노르웨이에서 복지국가의 기본적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대공황 시절인 1930년대 초기였다. 당시 노르웨이의 지배자들은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인접국가인 소련처럼 아예 체제를 전복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비록 의회에서는 약세였지만, 급진적인 노조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보수정당들이 차선책으로 차라리 복지개혁을 실시하겠다는 노동당의 집권을 수용한 것은 결국 혁명에 대한 공포로 인한 하나의 양보였다.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북유럽은 경험적으로 잘 증명하고 있다. 총국민생산 중 세수의 비중을 보자면, 노르웨이는 43퍼센트, 스웨덴은 45펴센트, 러시아만 해도 37퍼센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미국과 똑같이 26퍼센트 정도이다.


지구인 전체가 노르웨이만큼의 소득 및 소비 수준을 누리자면 우리에게 약 세 개의 지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만큼 노르웨이의 특수한 경험을 무조건 보편화시켜서 다른 나라들에 그대로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반드시 노르웨이 정도의 화려한국가적 지출은 아니더라도 한국과 그 경제수준이 비교가 가능한 남유럽, 동유럽의 상당수 국가들까지도 적어도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실행하고 있기에, 이와 같은 정치적 목표들을 한국의 경우에도 상정할 수 있다.


노르웨이를 포함한 북유럽은 인구가 한국보다 많지 않아서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를 유지할 수 있고 한국에선 그런 모델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사실일까? 스칸디나비아 복지 모델은 근본적으로 독일 모델을 근간으로 해서 발전시킨 것으로 독일인구는 남한의 두배에 가깝다. 문제는 총인구 숫자가 아니라 부자와 기업으로부터 얼마나 효과적으로 징세를 하는가, 그리고 부자에게 징세하고 보편적 복지를 실행할 만큼 정치적 의지력이 있는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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