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번역노걸대와 노걸대언해
정광 지음 / 신구문화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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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상인이 중국에 장사하러 가는 도중에 중국상인을 만나 함께 여행하는 과정을 대화형식으로 쓴 노걸대라는 책이 있다. 고려 때 한문본과 조선 전후기의 한글본이 함께 있어서 중세 국어의 변화과정을 알기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어서 또다른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당시 학교교육의 단면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매일 새벽에 학교에 가서 선생님한테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집에 와 밥을 먹고, 다시 학교에 가서 글씨 쓰기, 시쓰기, 시 읊기, 책 읽기를 한다. 저녁엔 제비를 뽑아서 선생님 앞에서 글을 외운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공부하는 것은 오늘날과 다름이 없지만 중요한 차이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밥을 집에서 먹는다는 점이다. 물론 학교에 급식시설이 없어서 집에서 먹었겠지만 그보다도 그만큼 가까운 곳에 집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은 이른바 선택이란 미명 아래 성적이 좋지 않은 또는 돈이 없는 학생이 가까운 곳 대신 먼 곳의 학교에 갈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서울에 있는 학생이 서울대를 못가는 건 서울 아닌 곳에 있는 학생이 공부를 잘하거나 돈이 많아서 서울대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사의 수업을 일방적으로 듣는 시간은 오전 수업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즉 수업의 대부분이 자습과 발표이다. 오늘날은 정규수업, 보충수업, 학원, 과외, 인터넷 모두가 교사의 수업을 듣는 수동적인 방식이다. 인류의 과학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교육은 오히려 퇴보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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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2017.7.8월호 - 39호
교육공동체벗 편집부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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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S면 무슨 재민겨? (오늘의 교육 39호 후기)

 

스위스의 산악 지대인 그라우뷘덴 주에는 다보스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 나는 이 휴양지에 모인 이들이 벌이는 파티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모욕감을 느낀다. 그들이 그곳에서 결정한 일들이 우리가 사는 이곳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탓이다(본문 10)”

 

고래로 빈부의 차이가 항시 있었지만 한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부의 소유라는 것은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 될 일이지 칭송받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비난받을 만한 일을 성취해낸 사람들을 미화시키는 용어가 기업가 정신인 것이다(본문 28)”

 

나는 개인의 성공을 위한 자본을 만들어 주는 것은 교육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육은 항시 공동체교육을 그 근본으로 삼아야 하며 공교육의 이념을 상실하는 순간 그것은 교육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 된다(본문 29)”

 

부당하게 해고된 강사 채효정. 이심전심이랄까 동병상련이랄까 나도 짧지만 해직시절이 있어서 그의 글을 관심 있게 읽는다. 이번 오늘의 교육 39호의 특집은 4차산업혁명을 다루고 있는데, 그는 이 미래사회에 대한 담론의 허구성을 참으로 기똥차게 까발린다.

 

소위 4차산업이라는 미래담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 BOSS가 되길 꿈꾸라는 것인데, 사실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잦은 해고를 감수하면서도 헛된 다보스의 꿈만 꾸게 하는 자본의 책략일 뿐이다. 다보스는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전우익 선생님이 살아 돌아오시면 한 마디로 정리해 버리실 텐데. BOSS면 무슨 재민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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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옹 책이다. 다른 것보다 읽기 편하다.

 

 

 

 

 

 

 

 

 

 

 

 박영준, 시정곤, 정주리, 최경봉 등이 따로 또 같이 쓴 책들.

 

 

 

 

 

 

 

 

 

 

 

 

 

 

 

 

 

 

 

 

 

 

 

 

 

 

 

 

 

 

 

 

 

 

 

 

 

 

 

 

 

 

 

 

 

 

 

윤동주를 좋아했던 일본 여자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 사랑. 일본인의 시각을 볼 수 있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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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
이바라기 노리코 지음, 박선영 옮김 / 뜨인돌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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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 그녀는 한국을 사랑해서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의 시를 번역했다. 그의 책 한글로의 여행을 통해, 일본어와 한국어, 일본 문화와 한국 문화에 대해 섬세한 비교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일본인이 나쁜 게 아니라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 위정자가 나빴을 뿐이라는 묘한 친일(?)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모국어(일본어)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의 언어(한국어)를 사랑하는 일본시인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기쁨이다.

 

* 1917년생 윤동주가 1926년생 이바라기 노리코와 사귀었다면 혹시 변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불온한 상상을 해본다ㅋㅋ

 

<밑줄>

한국의 여류 시인 홍윤숙 씨가 일본에 와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와 긴자에서 뵌 적이 있다. 나와 거의 같은 세대의 분으로 일본어 실력이 뛰어나고 내 시도 많이 읽으셨는데, 내 쪽에서는 홍씨의 시를 전혀 몰랐다.

일본어를 정말 잘하시네요!”

그 유창함에 감탄하자, 그녀가 이렇게 대꾸했다.

학창시절에 줄곧 일본어 교육을 받았으니까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내 불찰이 부끄러웠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했던 36년간, 언어를 말살하고 일본어 교육을 강제한 사실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청초하고 아름다운 한국 여인과 직접 연결 짓지 못한 것은, 내가 아직 그 아픔까지 함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홍씨 역시 1945년 이후, 자신들의 모국어를 다시 배운 세대이다. 그녀를 보면서 새삼 일본인으로서의 죄책감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일본사람들이 나서서 식은땀, 진땀 뚝뚝 흘리며 일심불란하게 한글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차례라고 통감했던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한글을 배우자, 홍씨와의 이런 경험도 한국어를 배우게 된 동기 중 하나이다.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어의 이런 특징을 역이용, 수상한 자를 불러 세워 “55전이라고 말해 봐하고 시키고선, “코쥬 고젠 [kozyuu-gozen]”이라고 대답한 자를 붙잡아 학살한 일은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불쾌한 기억이다.

 

關係라는 한자는 관계라고 읽는다. 일본에서도 옛날에는 관케이라고 발음했던 모양으로, 미키 다케오 전 수상 같은 사람은 뻔질나게 연발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으로 칸케이라고 발음하는 등 음의 구조가 점점 단순해지고 있다.

 

원조인 중국에서도 한자의 극단적인 약자화가 진행되고 있는 터라 이러다가는 자국의 고전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될 젊은이들이 많아지는 건 아닐까, 깊이 우려될 정도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중국과 조선 모두 과거제도에 오랫동안 시달려 한자가 덜덜 떨릴 정도로 싫어져 버린 것일까? 근대화에 뒤쳐진 원인이 번거로운 한자 공부 때문이라고 오해한 것일까. 일본은 한자를 받아들였으되, 과거제도는 채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거부 반응에서 한결 자유로운 것일까?

 

가혹한 역사 속에서 오늘날까지 자신들의 언어를 지켜 냈다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훌륭한 일이다. 내세워도 될 일임이 틀림없다. 만주족을 보라. 만주족은 이제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그것은 만주어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청을 세운 만주족은 한문화, 한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동화되었고, 만주어도 완전히 그 속으로 흡수되면서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전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에서도 일본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를 쓰자거나 한자와 가나를 버리고 로마자를 쓰자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섬나라였기 때문에 그리 고생을 하지 않고 언어를 순도를 유지해 올 수 있었지만, 만약 이웃 나라처럼 기원전부터 대국에게 직접 대습격을 받는 입장이었다면 과연 일본어는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고생하지 않았던 만큼 모국어를 생각하는 마음은 일본이 이웃 나라에 비해 훨씬 덜할지도 모른다...... 이 지구 어딘가에 모국어의 날을 만들어 기념하는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사실 내가 윤동주의 시를 읽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의 사진에 있다. 이렇게 맑고 단아한 얼굴의 청년이 어떤 시를 썼을까에 대한 흥미, 고백하자면 조금은 불순한 동기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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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삐딴 리 오발탄 탈향 판문점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17
전광용.이범선.이호철 지음, 최원식 외 엮음 / 창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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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침략기엔 친일, 소련군 점령기엔 친소, 미군 점령기엔 친미로 변신을 거듭하는 의사 이인국 박사. 전광용 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이다. 그는 항일투사나 가난한 사람의 치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부자와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처세로 성공가도를 달린다.

 

평생을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위해 살았던 백남기 농민은 사악한 권력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런데 서울대 병원의 백모 의사는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죽은 게 아니라 병으로 죽은 거라며, 외인사가 아니라 병사라며 사악한 권력을 옹호한다.

 

1962년 발표된 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 이인국 박사가 2016년에 환생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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