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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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개밥바라기별. 교과서에 실린 소설이기에 의무적으로 읽었던. 그래서 의미도 감동도 찾지 못한. 그런데 한 학생이 질문을 한다. 문제집에 실린 문제였으면 대충 풀어주고 말든가 모른다고 하든가 했을텐데...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개밥바라기별을 집어들었다.

 

사닥다리나 다름없는 가파른 계단 위에 서너 칸쯤 발 딛고 올라서자마자 널판자 문에 머리가 닿아버린다. 나는 널판자의 손잡이를 쥐고 위로 쳐들었다. 나는 이 천장 위 다락방 공간을 잠수함이라고 불렀다. 물론 내 방의 별명은 동생에게만 가르쳐주었다. 나는 다 올라서지 않고 잠깐 멈춰 서서 머리만 내밀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떠나기 전에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파충류의 허물과도 같은 것이고 나는 그 허물을 다시 뒤집어쓰고 싶어서 돌아온 건 아닌가.

시장 안의 점포는 아버지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어머니가 이리저리 까먹다가 남은 마지막 밑천이었다. 살림집을 팔로 누나들이 시집가기 전까지는 점포를 사고 남은 돈으로 전셋집을 얻었다. 누나들이 집을 떠난 뒤 우리 세 사람은 점포 안에서 살아왔다. 어린 아우와 어머니가 가게에 붙은 방에서 잤고 나는 그 천장위의 잠수함을 썼다. 이를테면 거꾸로 기어들어가는 셈이라 다락방의 지붕 바깥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속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두운 가게의 천장 위에 내 잠수함은 뚜껑을 닫고 선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뚜껑을 젖히고 머리를 내밀자 나는 다시 심해에 잠기는 것 같았다.“

 

학생은 잠수함, 허물, 선장의 의미를 알고 싶어 했다. 책의 전문을 읽지 않아도 문맥적으로 잠수함은 다락방, 허물은 추억, 선장은 를 의미한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그렇다는 걸 안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질문한 그 학생에게 해줄 변변한 답을 찾지 못해 고민이다.

 

나는 (그 시절에 다들 그랬겠지만) 단칸방이나 방두칸 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청소년이 되면서 내 몸 하나를 따로 둘 공간에 대한 욕망이 커져서 창고에 야전침대를 놓고 지냈다. 나중엔 내 손으로 연탄보일러를 깔고 방이란 걸 만들어 냈다. 그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우리 때는 그 다락방, 지하실, 창고가 육신을 두기엔 춥고, 덥고, 좁았지만 나만의 공간이라는 기쁨에 그 모든 아쉬움을 느낄 틈이 없었으리다.

 

물론 요즘 학생들에도 각자의 방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너무 따뜻하고 시원하고 넓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만들어낸 공간이란 성취감도 없다. 그래서 작가가 표현한 잠수함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있으리라.

 

그 시절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울테니 가르치지 않는다는 변명으로 답변을 대신한다. 그저 할아버지의 어릴 때 이야기려니 생각해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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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의 경쟁은 치열한 것이었다. 어떤 친구는 지금도 그 학교의 학력평가시험을 치르던 나날이 꿈에 보인다고 했다. 다른 애들은 부지런히 쓰고 있는데 자기만 한 문제도 몰라서 백지를 쥐고 땀을 흘리다가 깨어난다는 식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간에 냉정하고 예의가 바른 편이었으며 속을 내보이거나 남에게 약하게 취급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초급학년에서 서투른 짓으로 반 아이들의 비웃음을 몇 번 샀던 아이를 기억하는데, 그는 고학년이 되기까지 끝내 자존심을 회복하지 못했고 친구도 없이 지내다가 어디론가 전학을 갔다.

나도 월말 학력평가시험에 관해서는 원한이 깊은 사람이다. 전 학년의 학생들 이름을 점수대로 석차를 매겨서 교실 앞 복도에 붙여놓고는 했는데 어느 달엔가 성적이 떨어져서 어머니를 격노시켰다. 나는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학교까지 되돌아가 캄캄한 복도에 서서 성냥불을 그어대며 나보다 앞 순위에 있는 아이들의 이름과 점수와 석차를 베껴와야만 했다.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 떠오르던 수많은 아이들의 이름은 실체가 없는 글씨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뒤에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중학교도 그랬지만 고등학교에 가서도 나는 학급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아니 거의 죽을 맛으로 학교에 다녔다고나 할까.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날마다 학교에 불이 나거나 전쟁으로 폭격에 무너져 내리는 교사 건물을 떠올렸다.

나는 교실 안의 공상가였다. 창밖의 빈 운동장과 아카시아나무를 바라보든가 책상 밑에 다른 책을 감춰두고 읽거나 노트에 춘화를 그리면서 선생이 쓸데없는 소리만 떠든다고 여겼다. 나는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점심시간마다 재담으로 아이들을 웃기거나 광댓짓을 벌이곤 했다. 그래서 하루라도 이 교실 안의 피에로가 결석하면 아이들이 하루 종일 뭔가 빠진 것 같더라는 말에 만족했다.

아침에 등교할 적마다 두발검사에 복장검사를 하질 않나 어떤 교장은 부임하자마자 전교생의 바지 호주머니를 꿰매도록 지시했다. 추우면 참된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다니면 단정해 보이지 않는다나 뭐라나. 우리는 교복이 일제시대에 생겨난 것도 알고 있었고, 교모를 쓰고 목까지 올라오는 높은 칼라에 학년 표지와 배지를 꽂고 금속 단추를 달고 이름표를 붙이는 복장이 십구세기 유럽 제국주의 시대의 군복을 베낀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다 매주 월요일엔 군대처럼 열병식으로 조회를 했다. 당연히 학생회장은 대대장이고 우리는 졸병인 셈이었다. 머리털은 죄수들같이 언제나 하얗게 속살이 보이도록 박박 깎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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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시절의 이야기
임종국 지음 / 아세아문화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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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의 빼앗긴 시절의 이야기를 읽고

 

광복의 해 16살이던 소년 임종국에게 패잔 일본군이 20년 뒤에 보자는 말을 한다. 그로부터 정확히 20년 후인 1965년 다카키 마사오(한국명 박정희)에 의해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이뤄졌다. 이때부터 임종국은 친일과거사를 연구했고 그 결과 심지어 아버지의 친일행적마저 폭로하였다. 60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집요한 노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생기고 친일인명사전이 탄생하게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펴낸 임종국 선집 총 8편은 여성의 운동, 특히 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밑줄>

 

김연실전은 단순히 신여성사가 아니라 여학생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새로워진 사회에서 배우고 있는 여학생들은 지난날 새로워지려는 사회의 여학생들이 어떻게 고민하고 행동하고 전진하고 희생되었는가를 알고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3월의 횃불은 이 땅의 여학생들이 표현한 최초의 스튜던트 파워였다. 이로써 여학생들은 남학생과 함께 동등할 수 있다고 증명한 경성여보고의 어느 여학생은 만세행렬을 방관하는 남학생을 심지어 뺨까지도 갈겼다. 이리하여 반영독립운동으로 6번째 투옥된 네루는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의 딸에게 보냈다.

코리아의 민중 특히 청년남녀들은 우세한 적에 항거하여 용감하게 투쟁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그들의 이상을 위해 순사(殉死)한 것이다. 코리아에서는 대개 학교를 갓 나온 소녀들이 이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면 아마 너도 마음이 끌릴 것으로 생각한다

네루가 탄복한 한국 여학생들의 자주독립정신과 항거의 기록!

 

이화여고 310명 전부, 동덕여고 190명 전부, 배화여고 200명 전부, 숙명여고 406명 전부, 경성여자상업 282명 전부, 경성실천여고 112명 전부, 정신여고 93명 전부 ... 1930115일 아침 300명의 이화여고생들은 격문을 뿌렸던 것이다. “학교는 경찰의 침입을 반대하라. 식민지 교육정책을 전폐하라. 광주학생사건에 대하여 분개하라. 학생 희생자를 모두 석방하라. 조선의 청년학생 옹호, 일본의 야만정책을 반대하라. 각 학교의 퇴학생을 복교시켜라” ... 이 사건이 세칭 여학교 만세사건이다. 7명 수형자 중에서 5명이 이화여고 학생이어서 혹은 이화여학교사건이라고도 한다. 6.10만세와 광주학생사건으로 한국의 남학생들이 용감했다면 한국의 여학생들도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여학교 만세사건을 일으킴으로써 그들의 의기와 용감성을 천하에 과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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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견문 - 조선 지식인 유길준, 서양을 번역하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8
유길준 지음, 허경진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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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은 조선 최초의 일본, 미국유학생이다. 특히 일본의 계몽주의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가 되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유럽을 여행하면서 서유견문을 썼는데 이 역시 후쿠자와 유키치서양사정」에서 영향을 받았다. 특히 후쿠자와는 조선의 한글을 주목하며 국한문혼용하기를 주장했는데, 서유견문」이 국한문혼용체이다. 

 

또한 당시의 선진문물을 기행문 행식으로 낱낱이 기록한 면에선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의 제자란 점이 연관이 된다. 박지원도 당시의 선진국인 청에 가서 열하일기를 썼기 때문이다.

 

조선 실학과 일본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개화파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다만 후쿠자와 유키치가 나중에 군국주의자가 된 것처럼 개화파도 반청친일로 변질한 것이 아쉬운 대목이다.

 

 

<밑줄>

우리 글자와 한자를 섞어 쓰고, 문장의 체계는 꾸미지 않았다.

 

우리나라 글자는 우리 선왕(세종)께서 창조하신 글자요, 한자는 중국과 함께 쓰는 글자이니, 나는 오히려 우리 글자만을 순수하게 쓰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외국 사람들과 국교를 이미 맺었으니, 온 나라 사람들-상하,귀천,부인,어린이를 가릴 것 없이 저들의 형편을 알지 못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서투르고도 껄끄러운 한자로 얼크러진 글을 지어서 실정을 정하는 데 어긋남이 있기 보다는, 유창한 글과 친근한 말을 통하여 사실 그대로의 상황을 힘써 나타내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학교마다 정부가 선생을 두어 배우러 오는 자들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모든 비용은 국민들에게 세금으로 거둬 충당하였다.

선생의 봉급을 후하게 하는 까닭은 선생이 선생 노릇을 하는 동안에는 다른 생업에 종사할 수가 없으며, 교육하는 일을 자기의 직분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옷과 음식으로부터 일용품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군색함이 없도록 해 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고, 한가하게 쉬는 것은 좋지 못한 습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나 한가하게 쉬는 것이나 각기 의미가 있다. 사람이 부지런히 일만 하면서 규칙적으로 섭생하지 않고 경영하는 일에만 밤낮 분주하게 열심이라면, 주색이나 잡기에 빠진 자와 다를 바가 없다. 이제 서양 사람들이 한가하게 쉬면서 놀고 즐기는 모습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일기회(一器會)처럼 각 사람마다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어떤 종류든지 가지고 와서

서양풍속에는 본래 (우리나라처럼) 남자 춤이나 여자 춤을 직업적으로 추는 자가 따로 없고 부귀한 집안 자녀라도 모두 춤을 배우므로

서양사람들은 대개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노래를 배운다

 

<해설>

18816월부터 약 16개월 동안 근대 일본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응의숙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1883년 말부터 1885년 초까지의 약 16개월 동안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셀럼시에 머물렀는데, 진화론을 일본에 처음 소개했던 생물학자 에드워드 모스의 개인 지도 아래 덤머 아카데미에서 대학 입학 예비교육을 받았다. 미국에서 귀국하여 가택연금상태에 있던 1887년에서 1889년 사이에 서유견문을 썼다. 최초의 근대문법서 대한문전과 최초의 근대정치학개론서 정치학을 썼다.

 

1856(1) 출생

1881(26) 윤치호와 함께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

1883(28) 한성판윤 박영효의 효청으로 신문(한성순보) 간행 추진.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

1885(30) 유럽 각지를 유람하고 귀국. 연금생활

1889(34) 서유견문완성

1895(40) 내무대신

1896(41) 독립신문을 간행하려는 서재필에게 국교 5,000원을 보조. 일본으로 망명

1907(52) 귀국. 흥사단 부단장.

1909(54) 대한문전간행

1910(55) 남작 작위를 거부

1914(59)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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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범우사상신서 3
에리히 프롬 지음. 방곤,최혁순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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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와서 1980년에 돌아간 에리히 프롬. 부모는 유태인이고 고향은 독일이다. 세계 대전 때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1자유에서의 도피, 1976소유냐 존재냐등을 썼다. 소유냐 존재냐에서는 유태교와 맑시즘이 곳곳에서 보인다. 제목 그대로 소유하는 삶이라 존재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이야기인데, 마지막 장인 새로운 사회의 특색에서 제기한 여덟가지 주장은 4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유효하다.

1. 산업광고와 정치적 선전에 있어서 모든 세뇌적 방법은 금지되어야 한다.

2. 풍요한 국민과 가난한 국민의 격차를 좁혀야 한다.

3.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의 대부분의 불행은 연간 보증 수입을 보장해 줌으로써 없어질 것이다.

4. 여성은 가부장제 지배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5. 최고문화회의를 설립하여 정부, 정치가, 국민에게 지식을 필요로 하는 모든 문제에 관하여 조언을 해주는 것을 그 직무로 삼도록 해야 한다.

6. 효과적인 정보를 효과적으로 보급하는 체제도 확립되어야 한다.

7. 과학적 연구는 산업분야와 방위에 그것을 응용하는 일과는 분리되어야 한다

8. 핵무기 폐기

 

 

<밑줄>

도는 존재이다 노자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자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당신의 존재가 희미할수록 더 소유하게 된다 칼 마르크스

 

내 목표가 소유라면 나는 더욱 많이 소유할수록더욱 그 존재가 확실해지므로 나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 즉 내가 속여야 할 고객과 없애야 할 경쟁자와 착취해야 할 노동자에 대해 적의를 품어야 한다. 소망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시기해야 하며, 더 적게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가장하듯이 나 자신이 (나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미소를 띤, 이성적이고 성실하고 친절한 인간으로 보이기 위해서이다.

 

소유에 대한 열정은 틀림없이 끝이 없는 계급투쟁을 가져올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그들의 체제가 계급을 폐지함으로써 계급투쟁을 종식시킨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허구이다. 왜냐면 그들의 체제는 생활의 목적을 한없는 소비원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한, 계급이 형성되게 마련이고 계급투쟁이 있게 마련이다.

 

 

 

능동성과 과정을 표시하는 것은 동사이다. 예를 들면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원한다, 나는 미워한다 등등. 그런데 어떤 능동성소유하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경우가 점차 잦아지고 있다. 즉 명사가 동사 대신 쓰이고 있다. 그러나 능동성을 명사와 결부시켜 소유하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언어의 오용이다.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며, 그것은 아마 오늘날의 풍요한 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형태일 것이다. 소비는 다의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우선 불안을 제거해 준다. 왜냐하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더 많이 소비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전의 소비가 곧 그 욕구충족적 성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소비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및 내가 소비하는 것

 

삶의 소유양식에 젖어 있는 학생들은 귀를 기울여 강의를 듣고, 그 말의 논리적 구조와 의미를 이해하며, 가능한 한 그 말을 모두 그들의 노트에 적는다. 후에 필기한 것을 암기하며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내용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사상체계의 일부가 되어 그것을 풍요롭게 하거나 확장시키진 못한다. 학생들은 그 대신에 그들이 들은 말을 사상, 혹은 전체적인 이론의 고정된 몇가지 집합으로 면모시켜 그것을 저장한다. 학생과 강의내용은 서로 무관한 채 동떨어져 있으며, 다만 학생 각자가 어떤 사람의 진술의 집적의 소유자가 되어 있을 뿐인 것이다.

 

소유양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단 한가지 목표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을 즉 배운 것을 고수하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그것을 단단히 기억하거나 노트를 소중히 보존한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거나 창조할 필요가 없다. 사실 소유형의 사람들은 어떤 주제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나 관념에 접하며 오히려 당황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양의 정보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우수한 학생이란 여러 철학자들이 각기 말한 것을 가장 정확하게 암송할 수 있는 학생이다. 그들은 박물관의 박식한 안내인과 같은 것이다. 그들이 배우지 않은 것은 이러한 종류의 재산적 지식을 초월한 것이다. 그들은 철학자에게 질문하고 그들과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그들은 철학자 자신의 모순과 그들이 어떤 문제를 무시하거나 쟁점을 회피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법도 배우지 않는다.

 

우리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식을 소유물로서 갖도록훈련하는 데 애쓰고 있으며, 그 지식은 그들이 후일 갖게 될 재산 혹은 사회적 위신의 양과 대체로 비례한다. 그들이 받는 것은 최소한 그들이 일을 하는 데 불편이 없을 만큼의 양이다. 여기에 덤으로 그들 각자에에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사치스러운 지식을 모은 꾸러미가 주어지는데, 각자의 꾸러미의 크기는 그 인물이 아마도 얻게 될 사회적 위신과 일치한다. 학교는 이 전면적인 지식의 꾸러미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하나님은 두가지 중요한 계율을 덧붙인다. 그 하나는 각자는 자기의 필요에 따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출애굽 16:17~18) 마르크스에 의해서 유명하게 된, 각자는 그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원리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정식화되고 있다. 부양받을 권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확립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식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이다. 자식들은 부양받을 권리를 확립하기 위해 그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의 계율은 축재와 탐욕과 그리고 소유욕에 대한 계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아무것도 저축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출애굽 16:20~21)

샤바트(Shabbat:안식일)을 지킨다는 개념도 음식을 거둔다는 것과 관련되어 도입되었다. 모세는 유태인에게 금요일(유태교의 안식일은 토요일)에는 평상시의 음식량보다 두 배를 거두라고 말했다.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칠일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출애굽 16:26)

 

신약성서는 삶의 소유구조에 대한 구약성서의 저항을 계승하고 있다. 그 저항은 그 이전의 유태인이 행한 저항보다 더 철저하다. 구약성서는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계급의 소산이 아니라 유목하는 목양자나 독립적인 농부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로부터 천년 후 탈무드라는 학문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학식이 풍부한 바리새인들은 소수의 매우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소수의 아주 잘사는 사람들에 이르는 중류계급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 양집단이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회정의의 정신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보호, 그리고 모든 무력한 사람들, 예를 들며 과부나 소수민족에 대한 원조였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은 부를 나쁘다거나 존재의 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서 초기의 기독교도들은 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멸시당하는 사람들, 짓밟히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집단이었고, 그들은 구약성서의 몇몇 예언자들처럼- 부자와 권력자를 심하게 비판했고, 부와 세속적 권력과 성직의 권력을 순연한 악으로 보고 타협하지 않고 탄핵했다. 실제로 막스베버가 말했듯이 산상수훈은 커다란 노예반란의 연설이었다. 초기 기독교도들이 품고 있던 기분은 완전한 인간적 연대 바로 그것이었으며 때때로 그것은 모든 물질적 재화의 자발적인 공동소유라는 관념으로 표현되었다.

 

다른 교부(敎父)들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우스에게도 모든 재물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은 그의 특성을 말해준다. “남의 옷을 빼앗는 자는 도둑이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줄 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에게 옷을 주지 않는 자는 도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을까?”

 

소유양식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견해의 전거로 대표적인 것은 빈곤에 대한 그의 설교인데, 그것은 마태복음 513절의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구절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설교에서 에크하르트는 마음의 가난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해 논하고 있다. 그는 우선 외면적인 빈곤, 즉 물질적인 빈곤도 미덕이며 권장할 만한 것이지만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면적인 빈곤, 즉 복음서 구절에 언급되어 있는 빈곤이며, 그것을 정의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원하지않고, 아무것도 알지못하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않는 자는 가난한 인간이다

 

아이를 낳는 모든 고통이 여자의 것임을 고려할 때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이를 만든다는 것은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착취라는 것을 거의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편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독자적인 형태의 소유권, 즉 어린 시기의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다. 이 공전은 끊임없는 악순환을 이룬다. 남편은 아내를 착취하고, 아내는 어린 자식을 착취하며, 청년기의 남자는 이윽고 연상의 남자들에 끼여 여자를 착취하는 등등으로

 

조지 그로데크는 남자는 결국 단 몇분동안만 남자일 뿐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어린아이라고 논평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이윽고 왜곡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1백 년이나 너무 일찍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이미 그 가능성의 한계에도 달해 있기 때문에 혁명이 임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죽은 뒤 엥겔스가 말했듯이 그들은 완전히 판단을 잘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발달의 절정에서 그들의 새로운 가르침을 선언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쇠퇴하고 궁극적인 위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1백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점을 예견하지 못했다.

 

아이히만(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을 지휘했던 악명 높은 나치스 독일의 친위대 중령)은 관료의 극단적인 한 예이다. 아이히만은 유태인이 미워서 수십만의 유태인을 죽인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아이히만은 그의 의무를 다했을뿐이다. 그는 유태인을 죽였을 때 의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는 유태인을 독일 밖으로 추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똑같이 의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단지 규칙을 지키는 일뿐이었다. 그는 그가 규칙을 어겼을 때만 죄의식을 느꼈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단지 어렸을 때 꾀를 부려 빈둥거린 일과 공습 때 피난 명령을 어긴 두 경우에만 죄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의 대부분의 불행은 연간 보증 수입을 보장해 줌으로써 없어질 것이다. 이 생각의 핵심은 모든 인간이 그가 일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주거를 제공받을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생족은 유지해 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많이 받을 필요도 없지만 그보다 적게 받아서도 안 된다. 이러한 권리는 현대에 있어서는 새로운 개념의 표상이지만 실은 기독교에 의해 요구되는 많은 원시적인 부족들에 의해 실천된 매우 오랜 규범이며, 그것은 인간은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하든 다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권리를 지닌다는 규범이다. 그것은 우리가 애완용 동물에게는 인정하면서 같은 인간에게는 인정하지 않는 권리이다.

대규모의 복지 관료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현재 쓰고 있는 비용, 그리고 육체적, 특히 정신신체적인 질병, 범죄성, 마약중독(이 모든 것은 그 대분이 압제와 권태에 대한 항의의 형태이다)을 치료하는데 드는 비용을 고려해 본다면, 필요한 사람에게 연간 보증 수입을 제공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도 적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생각은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게으르다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실행 가능성이 없고 위험한 것으로 생각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투적인 이의에는 근거가 없다. 그것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합리화시켜 주는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다.

 

중세 후기의 문화가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근대사회가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지상의 진보의 나라의 성장이라는 이상에 의해서 고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세기에 와서 이러한 이상이 바벨탑이상으로까지 타락했다. 그것은 이제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으며, 마침내는 모든 사람들이 그 폐허 속에서 묻어버리고 말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정과 반이라면 새로운 합, 즉 중세 후기 세계의 정신적 핵심과 르네상스 이래의 합리적 사고와 과학발달과의 종합이 대혼란을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이 종합은 존재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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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마틴 루터 킹 자서전
클레이본 카슨 엮음, 이순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마틴루터킹목사 자서전)’을 읽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은 영어 문제 지문에서 한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때론 국어, 화법 시간에 잘된 연설의 사례로 언급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연설을 한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의 인생을 두로 살펴보기에 좋다.

 

1929년 정의로운 목사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그 역시 아버지 못지않게 정의로운 목사가 되었다. 55년 로자 팍크스 여사가 버스좌석의 흑백차별에 저항하여 체포된 일을 계기로 인종차별철폐를 위한 운동을 시작한다. 6839세의 나이로 암살당하기까지 비폭력 평화시위로 말콤엑스와는 같고도 다른 길을 걸었다.

 

백인목사들이 수감 중인 킹 목사에게 시위 중단을 요구하는 신문광고를 내자 이에 긴 반박문을 써서 보냈는데, 여기서 킹 목사의 사상을 깊이 느낄 수 있다.

 

<밑줄>

 

집안 분위기는 화목했다. 부모님은 훌륭한 분이셨다. 나는 두 분이 언쟁을 벌이거나 불화를 일으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는 나의 종교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가 사랑을 베푸는 주님의 존재를 별 어려움 없이 확신할 수 있었던 것과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된 것은 모두 타고난 건강 체질과 화목하고 사랑이 넘쳐흐르는 가정 덕분이었다.

 

농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농장주인이 할아버지를 속여서 피땀 흘려 번 돈을 부당하게 빼앗는 현장을 목격했다. 아버지는 농장주인 앞에서 할아버지에게 주인이 부당한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렸다. 그러자 농장주인은 이 검둥이 입을 당장 틀어막지 않으면 내 주먹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하며 몹시 화를 냈다. 그 농장주인에게 밉보였다가는 밥줄이 끊길 형편이었기에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에게 잠자코 있으라 하셨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는 농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버스에 탄 흑인들에게 퍼부어지던 폭력과 모욕을 목격한 다음부터는 버스를 타지 않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애틀랜타에서 교원급여 평준화투쟁을 주도했고, 법원 내 앨리베이터의 흑백차별을 철폐하는 데 기여했다.

 

간디를 연구하면서 나는 진정한 평화주의란 악에 대한 무저항이 아니라 악에 대한 비폭력적인 저항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간디는 폭력적인 저항자에 못지않은 용기와 힘을 가지고 악에 대항하면서도 가슴에는 증오가 아닌 사랑을 품고 있었다. 진정한 평화주의란 니버가 주장한 것처럼 사악한 힘에 굴복하는 비현실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평화주의란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것보다는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랑의 힘에 의거하여 악에 용감하게 맞서는 태도를 의미한다. 폭력의 가해자는 우주 속에서 폭력과 고통을 증식시키지만 폭력의 피해자는 상대편에 수치심을 불러일으켜 심정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에게는 선한 본성이 잠재해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니버를 통해서 인간에게는 악의 본성도 잠재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인간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복잡성과 집단적인 악이 구현되는 실체를 인식할 수 있었다. 평화주의자 중에는 이런 점을 간과하고 인간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가지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독선으로 기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조용히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마틴 루터, 정의를 위해 일어서라. 평등을 위해 일어서라. 진리를 위해 일어서라. 보라,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정당한 법을 준수하는 것은 법적 의무일 뿐 아니라 도덕적 의무입니다. 하지만 부당한 법에 복종하지 않는 것도 역시 도덕적 의무입니다. 저는 부당한 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부당한 법은 불멸의 자연법에 근거하지 않은 인간의 법입니다. 부당한 법은 수와 힘의 측면에서 다수에 속하는 그룹이 소수그룹에 대해 준수를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전혀 구속받지 않는 법입니다. 정당한 법은 다수그룹 자신이 자발적으로 준수하면서 소수그룹에 대해서 준수를 강요하는 법입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자행했던 일들은 모두 합법적인 것이었고 헝가리의 자유투사들이 헝가리에서 했던 일들은 모두 불법적인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는 유태인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편의를 제공하는 행위는 모두 불법적인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불만을 품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들에게 불만은 당연하고 건강한 것이지만, 그것을 발산할 때는 비폭력적 직접 행동이라는 창조적인 배출구를 이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어라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극단적으로 사랑을 추구하신 분이었습니다.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공평이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라하고 말씀하신 아모스는 극단적으로 정의를 추구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세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 세 사람의 죄명은 모두 극단주의였습니다. 그 중 두 사람은 주위 환경에 비해서 비도덕적이라는 점에서 극단주의자였고, 예수님은 사랑과 진리와 선행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극단주의자였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간디는 몇십년 간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간디가 통일시키려 했던 조국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갈등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간디는 조국의 분열을 지켜보면서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페인에 가고 싶어했습니다. 스페인에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가장 큰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스페인에 가지 못하고 로마의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인생은 이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꿈은 오늘이나 내일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 속에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린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이 투쟁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여기서 투쟁을 멈춘다면 큰 비극이 야기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행진계획이 세워지면 모두들 참석합시다. 직장을 빠지더라도, 학교에 결석을 하더라도 행진에 참여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형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이 직접 파업을 하지는 않더라도 언제나 힘을 합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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