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견문 - 조선 지식인 유길준, 서양을 번역하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8
유길준 지음, 허경진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길준은 조선 최초의 일본, 미국유학생이다. 특히 일본의 계몽주의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가 되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유럽을 여행하면서 서유견문을 썼는데 이 역시 후쿠자와 유키치서양사정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후쿠자와는 조선의 한글을 주목하며 국한문혼용하기를 주장했는데, 서유견문」이 국한문혼용체이다. 

 

또한 당시의 선진문물을 기행문 행식으로 낱낱이 기록한 면에선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의 제자란 점이 연관이 된다. 박지원도 당시의 선진국인 청에 가서 열하일기를 썼기 때문이다.

 

조선 실학과 일본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개화파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다만 후쿠자와 유키치가 나중에 군국주의자가 된 것처럼 개화파도 반청친일로 변질한 것이 아쉬운 대목이다.

 

 

<밑줄>

우리 글자와 한자를 섞어 쓰고, 문장의 체계는 꾸미지 않았다.

 

우리나라 글자는 우리 선왕(세종)께서 창조하신 글자요, 한자는 중국과 함께 쓰는 글자이니, 나는 오히려 우리 글자만을 순수하게 쓰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외국 사람들과 국교를 이미 맺었으니, 온 나라 사람들-상하,귀천,부인,어린이를 가릴 것 없이 저들의 형편을 알지 못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서투르고도 껄끄러운 한자로 얼크러진 글을 지어서 실정을 정하는 데 어긋남이 있기 보다는, 유창한 글과 친근한 말을 통하여 사실 그대로의 상황을 힘써 나타내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학교마다 정부가 선생을 두어 배우러 오는 자들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모든 비용은 국민들에게 세금으로 거둬 충당하였다.

선생의 봉급을 후하게 하는 까닭은 선생이 선생 노릇을 하는 동안에는 다른 생업에 종사할 수가 없으며, 교육하는 일을 자기의 직분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옷과 음식으로부터 일용품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군색함이 없도록 해 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고, 한가하게 쉬느 것은 좋지 못한 습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나 한가하게 쉬는 것이나 각기 의미가 있다. 사람이 부지런히 일만 하면서 규칙적으로 섭생하지 않고 경영하는 일에만 밤낮 분주하게 열심이라면, 주색이나 잡기에 빠진 자와 다를 바가 없다. 이제 서양 사람들이 한가하게 쉬면서 놀고 즐기는 모습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일기회(一器會)처럼 각 사람마다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어떤 종류든지 가지고 와서

서양풍속에는 본래 (우리나라처럼) 남자 춤이나 여자 춤을 직업적으로 추는 자가 따로 없고 부귀한 집안 자녀라도 모두 춤을 배우므로

서양사람들은 대개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노래를 배운다

 

<해설>

18816월부터 약 16개월 동안 근대 일본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응의숙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1883년 말부터 1885년 초까지의 약 16개월 동안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셀럼시에 머물렀는데, 진화론을 일본에 처음 소개했던 생물학자 에드워드 모스의 개인 지도 아래 덤머 아카데미에서 대학 입학 예비교육을 받았다. 미국에서 귀국하여 가택연금상태에 있던 1887년에서 1889년 사이에 서유견문을 썼다. 최초의 근대문법서 대한문전과 최초의 근대정치학개론서 정치학을 썼다.

 

1856(1) 출생

1881(26) 윤치호와 함께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

1883(28) 한성판윤 박영효의 효청으로 신문(한성순보) 간행 추진.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

1885(30) 유럽 각지를 유람하고 귀국. 연금생활

1889(34) 서유견문완성

1895(40) 내무대신

1896(41) 독립신문을 간행하려는 서재필에게 국교 5,000원을 보조. 일본으로 망명

1907(52) 귀국. 흥사단 부단장.

1909(54) 대한문전간행

1910(55) 남작 작위를 거부

1914(59) 사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