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894년 여름 - 오스트리아인 헤세-바르텍의 여행기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지음, 정현규 옮김, 한철호 감수 / 책과함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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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오스트리아인 에른스트폰헤세가 쓴 조선여행기이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가 지금 아프리카 초원이나 남미 정글에 가서 여행기를 쓴다면 이런 책이 나올 것 같다.

 

예를 들어, "어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른 곳에서는 통 볼 기회가 없던 아녀자들 20여명과 마주쳤다. 얼굴 생김새를 보면 일본 여인이었지만, 나는 일본에서 그렇게 체격이 장대하고 건강하며 햇볕에 그을린 아가씨들을 본 적이 없다. 모두 스무 살이 안 되어 보였다. 노출된 풍만한 가슴과 옆이 터진 짧은 치마를 입은 모습이 강렬하고 색다른 매력을 발산하였다"라고 부산 해녀를 묘사한 부분이 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에서 부족 아가씨들을 바라보는 관점과 비슷하리라.

 

"조선에서 집안을 돌보는 것은 여자의 몫이다. 여자들은 감동적인 부지런함과 감탄할 만한 인내력으로 그 의무를 다한다 ... 나는 남자들이 일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집안이나 집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조그만 중국식 파이프를 입에 물고 빈둥거리거나 골목길 한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앉아 놀거나 잠을 잤다. 반면에 작고 추하며 고생 때문에 여윈 여자들은 살림을 도맡으며 요리하고 빨래를 했다. 모든 노동은 여자들의 몫이다. 바로 여기서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민족일수록 문화수준이 낮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조선의 여성들은 짐 싣는 동물보다 나은 존재가 아니다. 남자들은 이른바 노예를 갖기 위해 여자와 결혼한다. 여성들은 이름도 없다. 이들은 없는 존재로 치부되며, 이들에게 적용되는 법도 없다. " 놀라운 것은 내가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느꼈던 것과 똑같다는 점이다. 베트남 여자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남자들은 아침부터 길거리에서 술을 먹고 있었다.

 

"모든 것이 착취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데, 결국 백성들이 모든 것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다고 법에 호소할 수도 없다. 그래봐야 더 큰 권력을 지녔거나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하는 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재력은 다름이 없다.

 

"조선에서 보고 들은 것을 종합해 볼 때, 나는 조선인들이 이웃해 있는 만주인이나 중국인에 비해 훨씬 오락을 즐기는 민족이라고 부르고 싶다" 남성은 여성을 착취하고,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착취하니 남성 양반들이나 오락을 즐겼나보다. 아니면 착취받는 자들이 괴로움을 이기기 위해 과도하게 오락을 즐겼나보고.

 

"조선의 학자들은 현재 수많은 중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중국어, 즉 현대의 공용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전혀 발음할 수도 없고 말해온 적도 없는, 왜곡되고 장식이 많으며 부자연스러운 문어를 쓴다. 그래서 그 글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읽어야 한다. 이처럼 전혀 불가능한 언어로 조선인들은 문집을 쓰고, 이 문집을 중국의 옛 현인들의 말과 역사적인 예들, 속담, 선례로 가득 채우는데, 이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시험관조차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글일수록 사람들은 글을 쓴 사람을 대단하게 여긴다." 자기도 이해 못하는 것을 현학적으로 인용해다가 쓰는 건 요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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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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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의 <광장>을 감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거운 주제에 어려운 문장들 때문입니다. 다만 은근히 야한(?) 장면들 때문에 졸린 눈을 뜨게 해줘서 어렵지만 읽어낼 수는 있으니 일단 도전해 보는 게 좋습니다. 그냥 광장이란 제목만 읽은 것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번 더 읽어 보는 게 중요합니다. 몇 번이고 읽다보면 새롭게 느껴지는 맛이 있는 소설입니다. 그만큼 담긴 게 많은 지혜로운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스스로 읽고 고민하고 즐기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얘기했는데도 평생 광장을 읽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정한 사람만 계속 이 글을 읽기 바랍니다. 제목만 읽지 말고 최소한 서문 정도 더 읽는 건 어떨까요? 광장은 작가가 매우 아끼는 작품인 듯 수십년에 걸쳐 여러번 개작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서문도 새롭게 썼는데 1961년판 서문이 광장을 이해하기에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제안합니다. 1960년대 대표소설 광장의 서문 한 장 정도는 읽어 주시는 게 교양인의 자세가 아닐까요?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 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그곳에 이르는 길에서 거상(巨象)의 자결을 목도한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쫓으면서 온 사람도 있다.

그가 밟아온 길은 그처럼 갖가지다. 어느 사람의 노정이 더 훌륭한가라느니 하는 소리는 아주 당치 않다. 거상의 자결을 다만 덩치 큰 구경거리로밖에는 느끼지 못한 바보도 있을 것이며 봄 들판에 부유하는 민들레 씨앗 속에 영원을 본 사람도 있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 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 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이명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떻게 밀실을 버리고 광장으로 나왔는가. 그는 어떻게 광장에서 패하고 밀실로 물러났는가.

나는 그를 두둔할 생각은 없으며 다만 그가 '열심히 살고 싶어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가 풍문에 만족지 않고 늘 현장에 있으려고 한 태도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진 것이다.

- <광장> 1961년판 서문

 

생각해 봅시다.

1. 밀실, 광장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 제목을 <밀실, 광장, 3, 그리고 자살>이라고 짓지 않고 <광장>이라 지은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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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향전.숙영낭자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5
이상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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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는 착한 처 사씨가 악한 첩 교씨의 음모로 쫓겨나서 우여곡절 끝에 다시 자리에 돌아와 교씨를 응징한다는 이야기다. 처첩갈등이 주축이고, 현모양처, 조강지처는 권선하고 악첩은 징악한다는 기본 줄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처첩갈등의 근본원인은 가부장제이고, 주범은 남자이다. 따라서 교씨는 상대적으로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숙영낭자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첩으로 있던 매월은 숙영낭자의 등장으로 찬밥 신세가 되어 음모를 통해 신분역전을 꿈꾸다가 결국 남편한테 처참한 죽임을 당한다.

 

"선군은 크게 노하고 칼을 들고 뜰로 내려와서 매월의 목을 베고, 배를 갈라서 간을 꺼내어 낭자의 시체 앞에 놓고 두어 줄 제문을 읽었다"

 

사씨남정기에서 교씨를 첩으로 들이라고 남편한테 추천한 사람은 사씨였고, 숙영낭자전에서도 매월을 첩으로 들이라고 남편한테 추천한 사람은 다름아닌 숙영낭자였다. 남존여비, 가부장제 조선시대에 남녀갈등이란 애초에 존재조차 할 수 없었으니 여여갈등이란 어이없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고전소설 속 시대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읽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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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경작생 범우문고 103
박영준 지음 / 범우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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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을 범생이라 부르는 건 담임을 담탱이라 부르는 맥락과 같다. 곱지 않은 시선이다. 그 이유는 모범생을 시기, 질투하는 면도 있겠지만, 모범생이 이기적인 까닭이 크다. 교실에선 담임이 지주이고 학생이 소작인인데 범생은 마름 노릇을 한다. 박영준의 <모범경작생>도 일제강점기 조선 농민이 착취를 당하는 상황에 등장인물 김길서는 일제가 주는 모범경작생의 감투를 쓰고 사적 이익만 챙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모범경작생은 누구인지 비교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밑줄 쫙>

(생략)

길서는 그 마을에서 가장 칭찬을 받는 사람이다. 물론 사촌 형 뻘이 되면서도, 기억이 같은 몇 사람은 길서를 시기하고 속으로 미워까지 했으나, 동네 전체로 보아 소학교 졸업을 혼자 했고, 군청과 면사무소에 혼자서 출입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도 지지 않으리만큼 동네 사람들을 가르치고 지도했다. 나이 젊은 사람으로 일을 부지런히 해서 돈도 해마다 벌며, 저축을 하여 마을의 진흥회니, 조기회니, 회마다 회장을 도맡고 있는 관계로 무식하고 착한 농부들은 길서를 잘난 위인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략)

요사이에 감옥에 가장 많이 갇힌 죄수들은 일하기 싫어서 남들까지 일을 못하게 한 놈들이래요. 말하자면 공산주의자라나요. 공연히 알지도 못하고 그런 놈들의 말을 들었다가는 부치던 땅까지 못 부치게 될 것이니 결국은 농군들의 손해가 아니겠소.

(생략)

그들은 할 수 없으므로 성두의 말대로 길서를 시켜 읍내 지주 서재당에게 가서 금년만 도지[소작료]를 좀 감해 달래 보자고 했다. 그러나 길서는 자기와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정해 놓은 도지를 곡식이 안 되었다고 감해 달라는 것은 흔히 일어나는 소작쟁의와 같은 당치 않은 짓이라고 해서 거절했다. 그리고는 며칠 있다가 일본 시찰단으로 뽑혀서 떠나가 버렸다.

(생략)

마을 사람들은 길서의 장난으로 호세까지 올랐다는 것을 다음에야 알고 누구 하나 그를 곱게 이야기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생략)

논에 박은, ‘김길서라고 쓴 말패는 간 곳도 없고, ‘모범경작생이라고 쓴 말뚝은 쪼개져서 흐트러져 있었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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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전집 - 증보판 창비신서 10
신동엽 지음 / 창비 / 198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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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하면 MC, 개그맨 신동엽이 먼저 떠오른다. 사람들의 머리뿐만 아니라 인터넷 검색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학교에선 1960년대의 참여시인, 저항시인 신동엽이 등장한다. 그런데 교과서에도 신동엽하면 그저 껍데기는 가라만 나온다. 하지만 껍데기는 가라만 읽고 신동엽을 안다고 한다면 그야 말로 껍데기만 안 것이다. 요즘 교과서에선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금강을 읽지 않고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만 읽는 것은 그야 말로 누가 신동엽을 읽었다 하는가이다.

 

작품을 읽은 것은 작가를 읽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 하나가 아니라 전체를 읽어야 한다. 물론 조정래를 알기 위해서 조정래의 작품 전체를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수십편의 대하소설을 남겼고 요즘도 여전히 창작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동엽같은 시인이자, 요절하여(1930~1969) 작품 수가 많지 않은 작가의 경우는 전집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신동엽 작품은 전집 한권에 불과하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일주일에 다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가수의 음반 하나하나 구입해 듣지 않고, 베스트음반 하나만 듣는 성격이라고 고집한다면, 좋다. 신동엽의 대표작 금강만 읽길 강력히 추천한다. 피 끓는 청춘이 읽어도 좋고, 다시 일어나고 싶은 중년이 읽어도 좋다. 조선말 혁명의 현장으로 당신을 인도해 줄 것이다.

 

<울컥하며 옮긴 시>

 

- 응 (1965)

 

응 그럴걸세, 얘기하세

응 그럴걸세

응 그럴걸세

,

응 그럴 수도 있을걸세.

응 그럴 수도 있을걸세.

, 아무렴

그렇기도 할걸세

그녁이나, , 그녁이나

, 그래, 그럴걸세

응 그럼, 그렇기도 할걸세.

,

더 하게!

 

 

-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1968)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

 

나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발 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

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

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는

평화로운 논밭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자다가 참

재미난 꿈을 꾸었어.

 

그 중립지대가

요술을 부리데

너구리새끼 사람새끼 곰새끼 노루새끼들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리의 중립지대가

점점 팽창되는데,

그 평화지대 양쪽에서

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

물방게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총칼들 내던져 버리데

 

꽃피는 반도는

남에서 북쪽 끝까지

완충지대,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

사랑 뜨는 반도,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자면서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

 

 

- 산문시 1 (1968)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변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에 놀러 가더란다.

 

 

- 금강 (1967)

 

(생략)

 

왕은

백성들의 가슴에 단

 

군대는

백성의 고용한

문지기

 

앞마을 뒷마을은

한 식구

두레로 노동을 교환하고

쌀과 떡, 무명과 꽃밭

아침 저녁 나누었다

 

가을이면 영고, 무천

겨울이면 씨름, 윷놀이

, 지금도 살아 있는 그 흥겨운

농악이여

 

시집가고 싶을 때

들국화 꽂고 꽃가마

장가가고 싶을 때

정히 쓴 이슬마당에서

맨발로 아가씨를 맞았다.

 

아들을 나으면

온 마을의 경사

딸을 낳으면

이웃마을까지의 기쁨

 

서로 자리를 지켜 피어나는

꽃밭처럼

햇빛과 바람 양껏 마시고

고실고실한 쌀밥처럼

마을들은 자라났다.

 

지주도 없었고

관리도, 은행주도

특권층도 없었었다.

 

반도는

평등한 노동과 평등한 분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그 위에 백성들의

축제가 자라났다

 

늙으면 마을사람들에 싸여

웃으며 눈감고

양지바른 뒷동산에 누워선,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남겼다.

 

반도는

평화한 두레와 평등한 분배의

무정부 마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그 위에 청춘들의

축제가 자라났다

우리들에게도 생활의 시대는 있었다.

 

(생략)

 

출세한다는 건

피 빨아먹는 자리

놀고 먹는 자리

백성의 피기름 솟는

흡구 자리 하나

차지한다는 것

 

(생략)

 

정권 없는

통치자 없는

정부 없는

농민들만의 세상, 이상사회

우리들 손으로 이룩할

책임

우리가 업어야 합니다.

 

(생략)

 

그리고

오후 세 시, 돌문 밖

질경이랑 반지꽃이랑 냉이랑

예쁘게 돋은 흙언덕

높은 장대 위,

 

교수된

정봉준의 머리는

칼로 다시 잘리워

매달리웠다

 

다섯 차례의

혹독한 왜식 고문

일본인 낭인 무전, 전중의 번갈은

일본망명 권유

인품에 감동, 뒷날의 쓸모를 계산한

일본 공사 정상의 은근한 호의

들은 체하지 않고

발 밑에 이까려버린

농민지도자

전봉준의

.

 

그는

목매이기 직전

한 마디의 말을 남겼다

 

하늘을 보아라!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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