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와 통하는 한국 전쟁 이야기 - 왜 전쟁 반대와 평화가 중요할까요?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0
이임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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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이 국방부의 금서로 지정되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솔직히 부끄럽게도 그때까지 그 책을 읽지 못했는데 국방부 덕에 읽고 보니 국방부는 평화보단 전쟁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비슷한 사례를 하나 발견하였다. 어느 인터넷 기사에서 이임화의 10대와 통하는 한국전쟁 이야기반미·반정부 투쟁을 선동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처럼 좌편향된 도서가 학교도서관에 있어서 문제란 내용이었다. 역시나 부끄럽게도 그런 책이 있는 줄, 그런 저자가 있는 줄 몰랐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학교도서관을 검색해 보니 마침 있어서 얼른 대출해 읽어 보았다.

 

이 책은 한국전쟁 중에 북측과 남측에서 각기 뿌린 삐라(bill, ビラ)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한 역사서이다. 삐라는 각자의 주관을 극대화해서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전단이기 때문에 한쪽만 보지 말고 두쪽 다 봐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인터넷 기사는 이 책에서 한쪽만의 시각을 두고 문제를 삼고 있었다. 저자의 의도를 오해한 것인지 일부로 곡해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인터넷 기사는 한국전쟁 중에 뿌려진 남측 삐라와 별 다를 바가 없는 내용이었다.

 

아무튼 좋은 책 소개해 줘서 고맙다.

 

<참고기사 http://www.mediapen.com/news/view/71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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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지요.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조직은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였습니다. 지방에는 북쪽의 회령에서 남쪽의 제주도까지 145개의 지부가 만들어졌습니다. (생략) 친일파를 포함한 지주, 자본가들은 재빨리 모여 한국민주당을 만들었어요. 한국민주당은 미군정에 앞장서 협력하면서 새로 세워질 나라의 지도자로 이승만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뒤 가장 강력한 세력은 9월에 다시 조직된 조선공산당이었지요. 조선공산당은 완전한 독립과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한다는 원리를 실현할 토지 개혁을 주장했답니다. (생략) 김구를 비롯한 충칭 임시정부세력은 11월 개인 자격으로 국내로 들어왔어요. 김구는 임시 정부의 법통을 주장하며 한국독립당을 만들었어요. 한편 건준 위원장을 맡았던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세력도 11월 조선인민당을 조직했어요. 인민당은 좌우 갈등을 최소화하고 좌우가 연합한 정부를 세우려 했습니다.

 

대통령 이승만이 1950627일 대전에서 전화로 국민을 격려한 방송 내용입니다. (생략) ‘국민은 안심하라는 방송은 북한군이 서울로 들어오기 4시간 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국민들에게 대통령이 전쟁 뒤 처음 한 담화였어요. (생략) 서울 근교에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가 점점 커지자 일부 시민들은 짐을 꾸려 한강으로 몰려갔지만 대통령의 안심하라는 방송을 듣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답니다. (생략) 28일 새벽 228분 한강 다리가 폭파됐고,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왔거든요. 이날 한강 다리 위에 있던 수백 명의 피난민과 군인들이 부서진 한강 다리와 함께 강에 떨어져 물결에 휩쓸려 갔어요. (생략) 19501224,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시민의 피난을 결정했고, 내무부 장관은 서울 철수 정책을 발표했어요. 당연히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을 떠나려 한강으로 몰려나왔겠죠. 서울 시민들은 지난여름 한강을 건너지 못해 북한군과 정부로부터 당한 수모를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한강 변 곳곳에서 빨리 강을 건너려는 서울 시민들과 군사 작전의 효율을 앞세운 유엔군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유엔군은 한강을 건너오는 것을 금지한다. 건너오는 자는 누구든지 쏜다는 내용의 삐라를 뿌렸어요.

 

소련군의 빠른 진격 속도에 놀란 미국은 813일 두 나라 군대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점령해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자고 제안했지요. 그리고 소련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38도선을 경계로 한 한반도 분할 점령이 결정되었답니다. (생략) 이렇게 해서 한반도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들어와 자기들의 구미에 맞게 군정을 실시했지요.

 

전사, 부상, 행방불명과 포로를 포함한 한국군의 인명피해는 전쟁 동안 621,479명입니다. 그런데 국방부가 발행한 한국 전란 1년지에 따르면 19513월까지의 인명피해는 168,852명이었지요. 그러니까 인명피해의 72.8퍼센트인 45만 명가량이 전선이 고착된 뒤 고지쟁탈전을 벌이다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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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 서정시학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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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東柱)는 동주의 친동생이 보기에 동국(東國, 우리나라)을 밝히는 기둥이란 뜻이고, 윤동주 평전의 저자 송우혜 교수가 보기엔 태자나 세자를 가리켜 동궁(東宮)’이라고 불렀듯 장남이란 뜻이며, 동주 본인이 보기엔 동주(童舟) 아이 배란 뜻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동주는 동주(同走) 함께 달리기란 뜻이다. 왜냐면 그의 육신은 29살에 광복을 반년 앞두고 일본 형무소에서 옥사했지만 그의 정신은 동생과 친구와 친척과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와 함께 지금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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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추정이 맞는다면 신학문을 가르칠 교육기관 이름으로서 명동은 곧 동국(우리나라)을 밝힐 인재를 기른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대학󰡕의 첫 구절 식으로 풀어보면 신학문지도 재명동(新學問之道 在明東)’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갈 것이 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 교수가 동주(東柱)’란 이름을 두고 동주란 이름도 아버지가 지은 것이며, ()자는 명동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고 추정한 부분이다.

필자가 보기에 윤 교수의 추정은 사실과 어긋나는 듯하다. 윤동주(尹東柱)자는 󰡔주역󰡕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주역󰡕에서 진괘, 진은 장남을 뜻한다. 그래서 제왕가에서는 태자나 세자를 가리켜 동궁(東宮)’이라고 불렀다. 동주가 윤씨 집안의 첫아들이기에 장남을 의미하는 자를 쓰고 그 뒤에 항렬자인 주자를 붙인 것으로 봐야 한다.

 

2년에 걸친 광명 시절에서 특기할 것은, 그가 5편의 동시를 세상에 발표한 일이다. 당시 연길에서 󰡔카톨릭 소년󰡕이라는 어린이 잡지가 월간으로 발행되고 있었는데, 윤동주가 거기 투고하여 채택되었다. 그는 (‘童舟라는) 필명까지 만들어 사용했다.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 건조한 학과로

해말간 권태가 깃들고

모순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 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윤동주 이런 날)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 하여 숭실중학교 교장을 강제 퇴직시키고 강제 귀국시키는 일제 당국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숭실중학교를 자퇴했다. 그러나 이젠 학생들이 일본 국기 아래서 단순하게 즐거워하고 있는 곳, 신사참배라면 아예 신성한 의무로서 경건하게 거행하도록 금을 그은 지역안에 제 발로 들어와 있는 처지였다. 그야말로 모순된 일이었다. 그 자신의 이런 모순은 너무 쓰라려서 그는 차마 겉으로 내색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다만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라는 아픈 결구로서 자신의 고뇌를 형상화했다.

여기에 나오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은 곧 송몽규를 지칭한 것이라고 본다면, 윤동주는 송몽규의 완고함’, 즉 현실적인 불이익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신념을 과감하게 추진하는 행동력과 그에 따를 고난을 마음 깊이 기리고 있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이것이 광명(중학교) 시절의 윤동주가 지녔던 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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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5
김형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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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은 만주(북간도)에서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성장하였다. 송몽규가 중학교 때 신춘문예에 산문으로 등단하였고, 윤동주는 문익환이 시를 못 쓴다고 핀잔하였지만, 문익환은 평양 숭실학교에 가장 먼저 진학한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거부하느라 자퇴하고 고향 만주로 돌아와 아이러니하게도 친일계 광명중학교에 편입한다. 도쿄 유학 중에 만난 박용길과 결혼, 미국으로 유학한다. 전쟁과 분단을 겪으며 평생 통일과 민주를 위해 살았다.

 

라고 쓰고 보니 재미가 없네... 다시 쓰자면... 어릴 적 삼총사 몽규와 동주에게서 느꼈던 미묘한 경쟁, 콤플렉스가 친근하다. 게다가 몸이 약해 결혼을 못할 것 같으니 금강산에 가서 6개월간 몸을 만들어 와서 결혼한 것도 참 친근하다. 그런 아내를 두고 몰래 혼자 미국으로 유학한 것도 그렇다. 그렇지만 앞서간 송몽규, 윤동주, 장준하가 못 이룬 일들을 늦게 피지만 길게 가는 꽃처럼 이뤄냈다. 통일 운동이나 민주화 운동 뿐만이 아니라 우리 말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 공동번역성경을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태초'를 '한 처음'으로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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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조선인을 끌고 갈 때 윤동주는 학도병으로 무기를 받아서 그것을 일본에게 겨누는 길을 구상하였고(이것이 그를 옥사시킨 이유였다), 장준하는 학도병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넘어갔으며, 문익환은 만주 봉천으로 회피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걸었다. 그때 그들은 모두 일제에게 충성하여 윤동주들을 죽이고 장준하들을 공격하는 친일부역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한데, 박정희는 그 친일 부역자 안에서도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최상급의 길을 선택했었다.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금메달을 수여받음과 동시에 졸업생을 대표하는 답사를 낭독할 때 그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만주국의 왕도락토를 지켜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는 성전에 참여, 저는 벚꽃처럼 산화하겠습니다." 성적도 우수한 조선인 생도가 일본 천황에게 이토록 무서운 충성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박정희는 일본 육사에 입학할 수 있는 특정을 얻었다. 그리하여 다시 1944년 일본 육사 57기를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오카모도 미노루라는 이름의 일본군 소위가 되었다.

 

문익환은 장준하가 실족사 했다는 자리에 쏜살같이 달려가서 여러 가지 정황을 수집해본 결과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타살이라고 확신했다.

 

문익환은 장준하의 관을 땅속에 내리면서 약속했다. 그의 죽음을 땅에 묻어서는 안된다! 그래 네가 하려다 못한 일을 내가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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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 시로 만나는 윤동주
김응교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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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에 광복을 반년 앞두고 일본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한 끝에 숨진 윤동주. 비극적인 죽음이었지만 그의 곁엔 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종사촌 송몽규는 그와 죽음을 같이 했고, 후배인 정병욱은 그의 유작을 목숨 걸고 지켰습니다. 친구인 문익환은 늙어 죽을 때까지 그의 뜻을 이어 갔습니다. 또한 동생인 윤일주가, 송몽규의 조카 송은혜가 그렇게 윤동주를 추억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 김응교도 동주 잇기에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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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9월 은진중학교 사학년 일학기를 마친 윤동주는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합니다. 미션스쿨인 숭실학교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용케 버텨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람벽이 되어주었던 서양 선교사들이 평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936120일 총독부에 의해 교장직에서 강제 해임된 교장 윤산온(George McCune)은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를 사랑했던 학생들은 동맹 퇴학을 감행합니다. 퇴학자 명단에는 윤동주를 비롯해 그와 용정에서 함께 온 문익환 등도 있었습니다. 19363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 표시로 열아홉의 윤동주는 결국 육 개월 만에 숭실중학교를 자퇴합니다.

 

 

북간도 명동촌의 같은 집에서 1917928일 송몽규가, 같은 해 1220일 윤동주가 태어났습니다.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로 일했던 송몽규의 아버지 송창희가 윤동주의 고모부였습니다. 송몽규가 신춘문예로 등단하면서 윤동주는 시창작에 더욱 몰두합니다. 또한 송몽규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집을 떠나자 윤동주는 형을 그리워했고, 결국 두 사람은 1938년 봄 연희전문에 함께 입학합니다. 기숙사도 한방을 썼습니다. 두 사람은 일본 유학도 함께 가고, 함께 공부했으며, 함께 투옥되고, 함께 죽음을 맞이합니다.

 

 

1917년에 태어난 박정희와 윤동주, 1918년에 태어난 장준하와 문익환. 박정희는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졸업생을 대표하여 만주국의 왕도락토(王道樂土)를 지켜 대동아 성전에 참여, 벚꽃처럼 산화하겠다는 답사를 낭독합니다. 박정희의 길은 일본군 장교로서 독립운동하는 동족을 사냥하는 일에 나서는 것이었죠. 무서운 충성심을 보여준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입학할 수 있는 특전을 얻고 1944년 일본 육사 57기를 삼등으로 졸업합니다. 박정희는 곧 일본군 소위 오카모도 미노루였습니다.

정반대로 장준하는 학도병을 탈출하여 육천 리를 걸어 광복군으로 넘어가 기관총을 들고 일본군과 맞섭니다. 한편 문익환은 만주 봉천으로 피하여 선교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윤동주는 가장 연약한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가 감옥에 갇혀 가장 먼저 죽습니다. 장준하에게서 느꼈던 사회적, 정치적 실천에 대한 겸손한 다짐은 문익환을 재야 운동가로 만듭니다.

또래 인물 중에 가장 오래 살았던 문익환 목사는 박정희를 제외한 친구들의 장점을 받아들입니다. 박정희의 기회주의적 처신을 참을 수 없었던 장준하처럼 혁명가의 삶을 살기도 하고, 가장 부러워했던 윤동주처럼 시인이 되어 시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시인으로 만들어준 친구 윤동주에게 시 한 편을 올립니다.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테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 억울해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버릴 줄 알았던 너의 피 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 문익환, 동주야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에서 반도 출신의 중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같은 곳에서 중학교를 거쳐, 경성에 있는 사립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쇼와 17(1942) 3월 일본에 건너와서 일시적으로 도쿄 릿쿄 대학 문학부 선과에 재학했으며, 같은 해 10월 이후 교토 도시샤 대학 문학부 선과에 전과해서 현재에 이르는 사람으로, 유년시절부터 민족적 학교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 등을 탐독하며 교우의 감화 등에 의해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일본과 조선 사이에 소위 차별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원망하는 생각을 가지고, 일본의 조선 통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전멸시키고, 조선 민족의 멸망을 도모한다고 해서, 그 결과 조선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써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키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 외에는 없고, 조선 독립을 위하여 조선 민족의 현 시점에서 실력 또는 과거에 있었던 독립운동 실패의 발자취를 살피며, 조선인의 능력과 민족성을 향상시키며 독립운동의 소질을 배양해야만 하고,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써야 한다고 결의를 하기에 이르러,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직면해 있는 과학력이 열세인 일본의 패전을 몽상하고 그때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고 얻을 수 있으며, 일본은 망한다고 하는 신념을 갖추었으며 (중략) 치안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소정의 형기 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며...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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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 언니 - 양장
권정생 지음, 이철수 그림 / 창비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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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배고프고 아픈 사람들이 많았다. 권정생도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물론 그의 작품이 널리 읽히면서 돈을 많이 벌게 되었지만, 그는 그 돈을 늘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고 자신은 여전히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몽실언니작가의 말을 통해 이 작은 이야기가 통일의 밑거름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고통스럽게 살아온 전쟁의 어린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싶었다라고 밝혔다. 강아지똥, 몽실언니, 우리들의 하나님3종세트로 권정생의 바른 삶(정생, 正生)을 느껴보길 한다.

 

<밑줄>

빨갱이라도 아버지와 아들은 원수가 될 수 없어요. 나도 우리 아버지가 빨갱이 되어 집을 나갔다면 역시 떡 해드리고 닭을 잡아 드릴 거여요.

 

국군 중에는 나쁜 국군도 있고 착한 국군도 있지. 그리고 역시 인민군도 나쁜 사람이 있고 착한 사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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