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럼 - 시로 만나는 윤동주
김응교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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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에 광복을 반년 앞두고 일본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한 끝에 숨진 윤동주. 비극적인 죽음이었지만 그의 곁엔 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종사촌 송몽규는 그와 죽음을 같이 했고, 후배인 정병욱은 그의 유작을 목숨 걸고 지켰습니다. 친구인 문익환은 늙어 죽을 때까지 그의 뜻을 이어 갔습니다. 또한 동생인 윤일주가, 송몽규의 조카 송은혜가 그렇게 윤동주를 추억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 김응교도 동주 잇기에 함께 합니다.

 

 

<밑줄>

19359월 은진중학교 사학년 일학기를 마친 윤동주는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합니다. 미션스쿨인 숭실학교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용케 버텨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람벽이 되어주었던 서양 선교사들이 평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936120일 총독부에 의해 교장직에서 강제 해임된 교장 윤산온(George McCune)은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를 사랑했던 학생들은 동맹 퇴학을 감행합니다. 퇴학자 명단에는 윤동주를 비롯해 그와 용정에서 함께 온 문익환 등도 있었습니다. 19363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 표시로 열아홉의 윤동주는 결국 육 개월 만에 숭실중학교를 자퇴합니다.

 

 

북간도 명동촌의 같은 집에서 1917928일 송몽규가, 같은 해 1220일 윤동주가 태어났습니다.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로 일했던 송몽규의 아버지 송창희가 윤동주의 고모부였습니다. 송몽규가 신춘문예로 등단하면서 윤동주는 시창작에 더욱 몰두합니다. 또한 송몽규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집을 떠나자 윤동주는 형을 그리워했고, 결국 두 사람은 1938년 봄 연희전문에 함께 입학합니다. 기숙사도 한방을 썼습니다. 두 사람은 일본 유학도 함께 가고, 함께 공부했으며, 함께 투옥되고, 함께 죽음을 맞이합니다.

 

 

1917년에 태어난 박정희와 윤동주, 1918년에 태어난 장준하와 문익환. 박정희는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졸업생을 대표하여 만주국의 왕도락토(王道樂土)를 지켜 대동아 성전에 참여, 벚꽃처럼 산화하겠다는 답사를 낭독합니다. 박정희의 길은 일본군 장교로서 독립운동하는 동족을 사냥하는 일에 나서는 것이었죠. 무서운 충성심을 보여준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입학할 수 있는 특전을 얻고 1944년 일본 육사 57기를 삼등으로 졸업합니다. 박정희는 곧 일본군 소위 오카모도 미노루였습니다.

정반대로 장준하는 학도병을 탈출하여 육천 리를 걸어 광복군으로 넘어가 기관총을 들고 일본군과 맞섭니다. 한편 문익환은 만주 봉천으로 피하여 선교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윤동주는 가장 연약한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가 감옥에 갇혀 가장 먼저 죽습니다. 장준하에게서 느꼈던 사회적, 정치적 실천에 대한 겸손한 다짐은 문익환을 재야 운동가로 만듭니다.

또래 인물 중에 가장 오래 살았던 문익환 목사는 박정희를 제외한 친구들의 장점을 받아들입니다. 박정희의 기회주의적 처신을 참을 수 없었던 장준하처럼 혁명가의 삶을 살기도 하고, 가장 부러워했던 윤동주처럼 시인이 되어 시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시인으로 만들어준 친구 윤동주에게 시 한 편을 올립니다.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테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 억울해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버릴 줄 알았던 너의 피 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 문익환, 동주야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에서 반도 출신의 중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같은 곳에서 중학교를 거쳐, 경성에 있는 사립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쇼와 17(1942) 3월 일본에 건너와서 일시적으로 도쿄 릿쿄 대학 문학부 선과에 재학했으며, 같은 해 10월 이후 교토 도시샤 대학 문학부 선과에 전과해서 현재에 이르는 사람으로, 유년시절부터 민족적 학교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 등을 탐독하며 교우의 감화 등에 의해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일본과 조선 사이에 소위 차별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원망하는 생각을 가지고, 일본의 조선 통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전멸시키고, 조선 민족의 멸망을 도모한다고 해서, 그 결과 조선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써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키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 외에는 없고, 조선 독립을 위하여 조선 민족의 현 시점에서 실력 또는 과거에 있었던 독립운동 실패의 발자취를 살피며, 조선인의 능력과 민족성을 향상시키며 독립운동의 소질을 배양해야만 하고,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써야 한다고 결의를 하기에 이르러,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직면해 있는 과학력이 열세인 일본의 패전을 몽상하고 그때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고 얻을 수 있으며, 일본은 망한다고 하는 신념을 갖추었으며 (중략) 치안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소정의 형기 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며...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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