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공책 하나에 예진이가 낙서를 하고 있다. 싫증 나서 팽개친 공책을 펴보니, ㅎㅎㅎ....대학 4학년 때 임용고시 공부를 했던 공책이다.
누구나 그렇지만, 난 유독 시험이 싫었다. 시험이 주는 긴장감과 압박감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너무너무 싫었다. 이 노트를 보니...나는, 필사만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구원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책의 내용을 노트에 어여쁘게 옮기면서, 그것이 내 머리 속에도 가지런히 자리잡길 원하는 유약한 소망이 보인다.

중고등학교 때 내가 필기를 열심히, 잘 하는 아이였냐하면, 결코 아니다. 나는 노트 필기보다는 원태연의 시 베끼고 만화 긁적이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시험기간마다 노트를 빌려서 공부했기에, 종래엔, 어쩌다가 빼먹지 않고 필기를 했다 해도 내 글씨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상하고 낯설어 친구의 노트를 빌렸다.
그런 내가 이렇게 정연한 글씨로 노트에 집착했다니...거의 미신, 숭배, 광기였지 않나 싶다.

그래서, 시험 결과는 어땠을까? 합격? 불합격?
ㅎㅎㅎ 여름정도까지 반짝 공부(저런 노트를 대여섯 권 만들었다.)를 하고 가을부터는 내처 놀더니만, 원서까지 접수 시켜놓고는....시험 당일에 내뺐다. 멀쩡히 시험보러 가는 길에, 저 혼자나 갈것이지, 죄없는 친구까지 꼬드겨서 종로엘 가서는, 상영시간이 4시간이 넘기에 쉬는 시간까지 준다고 유명했던 공포영화 '킹덤'을 봤다.

동글동글 글씨체....예쁘긴 하다. 그런데, 귀여웠던 글씨가....요즘은 이렇게 변했다. ㅡ.ㅡ;

난리 굿이네.....그나저나 스윗매직님! 님이 보내주신 리뷰 노트는 저렇게 더러운 글씨로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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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4-11-12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그럼 어찌 발령이 나셨나요....

진/우맘 2004-11-12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간 복지관 조기교육실에서 일하다가, 예진이 임신하고는...부른 배를 끌어안고 다시 시험 봤어요. 어른들 표현을 빌면....뒤늦게 철이 들어서...ㅡ.ㅡ;;;

mannerist 2004-11-12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필기 잘하는 여학생보다 밥 한끼 사주고 그 노트 복사해서 공부하는 아해들이 오방 학점 잘 나온다는... 쿨럭;;;; (매너 내일 몇대나 맞을까? 자비를... -_-;;;;)


음음... 매너는 워낙 글씨를 못쓰는지라 시스템으로 커버한다죠. 매너의 노트는 a4지와 3공바인더 묶음. 이거에 대해서 페이퍼나 좀 써볼까요? ㅎㅎㅎ...


깍두기 2004-11-12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훗, 대기만성이어요^^

urblue 2004-11-12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한 노트입니다요.

제 노트는, 거의 여백이지요. 대학 때 친구의 노트를 본 적이 있는데, 필기 내용이 제 것의 세배나 되는 겁니다. 제가 그 과목을 싫어하거나 땡땡이쳤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거든요. 꽤 열심히 들은 수업인데도 그 모냥. -_-; 그때 알았지요. 제가 사람 말을 띄엄띄엄 듣는다는 것을. 흐흐..

아영엄마 2004-11-12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저렇게 쓰는 게 어딥니까.. 저는 쓰는 거 정말 싫어합니다. 글씨가 엉망이구요...

플레져 2004-11-12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와~~ 저두 영화 백편을 기록한 옛날 공책이 있는데 (아주 허접 ㅠ.~) 한번 올려봐야겠네요. 요건 정말 힌트다! 진/우맘님, 그 노트 정말 소중한 자산이네요. 음음...느무 좋다... 추천!

진/우맘 2004-11-12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맞아요, 그 영화노트 얘기 예전에 잠깐 듣고 되게 부러웠죠.^^ 자산은 자산인데....예진이 낙서장이 되어 폐기 직전에 처했습니다.ㅡ.ㅡ;;

아영엄마님> 님의 미모로 미루어볼때...악필은 상상이 안 됩니다만!

블루님> 캬캬캬캬캬!!! 띄엄띄엄!!!!!

깍두기님> 음...... ㅡ.ㅡ;;;

매너님> 난 줄 없는 종이엔 더 글씨를 못 쓰겠던데...참, 불현듯 떠오른 옛 추억, 따우가 초등학교 때 가르쳐 준 사실인데, 윗 줄과 아랫 줄 사이, 밑에서 1/3 지점에 글자를 쓰면 예쁘게 보인다고... 밑줄에 붙여 쓴 글자는 지저분해 보인다나? 호호호 따우가 나에게 저런 유용한 말도 해 줬더랬군. 따우는 분명, 기억도 못할거야.^^

2004-11-12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4-11-1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보다 글씨 못쓰는 사람 처음 봄=3=3=3

호랑녀 2004-11-1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형이세요?

엊그제 텔레비전을 보니 A형은 쓰면서 공부하고 B형은 돌아다니면서 공부한다던데...

sweetmagic 2004-11-12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진우맘님 글을 잘 쓰시느 이유가 노트에 있었군요. 저도 노트에 쓰고 글을 올리면 잘 쓰려나 ㅠ.ㅠ;; ~ 노트 써주셔서 감사해요 ~~^_^ * 히히ㅣ

진/우맘 2004-11-12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직님> 그리도 심한 겸양의 말씀을!

호랑녀님> B형이구요, 돌아다니면서 공부...거의 안 했죠. 처음이자 마지막 노트입니다. 오죽하면 스스로 '광기'라는 표현을 썼겠어요. ㅋㅋㅋ

만두님> TT 저는 글씨를 쓰는 게 아니라 그려서....공들인 시간과 기분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요.

조선인 2004-11-1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소한 고등학교 때까지는 숙제를 꼭 해가는 범생이었습니다.

고3때도 10시면 잤던 터라 수업시간에 조는 일도 거의 없었구요.

그래서 친구들이 종종 공책 빌려달라고 하기도 했지만!!!

대개 5분을 안 넘기고 돌려주던군요.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구요.
님처럼 글씨 잘 쓰는 분이 정말 부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