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왜...성장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주인공이 성인인 여타의 소설보다 감정이입이 쉽기 때문이다. 미숙함에 덮여 있는 폭발적인 성장의 욕구, 그것으로 혼란스러워 하는 그들에게는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쏘옥 빨려들고 만다. 혹시 내가 나이를 헛 먹어서, 마음은 아직 자라질 못해서 그런 것일까?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

성장 소설 속에서 나레이션을 맡는 조숙한 아이들. 그들은 단순히 성인인 작가의 분신, 그저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일 뿐일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들이 작가의 분신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면 오래 전...유년 시절 작가의 분신일 것이다.
나는 조숙한 아이였다. 아니, 우리 모두는 그랬다. 그런데 아이들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어휘는 아직 빈약하다.
하지만 책이라면 다르다.
작가의 풍부한 어휘를 빌어, 진지하게 마주 앉은 독자 앞에 선 유년은...그 머리와 가슴 속은, 참으로 눈부시다. 그리고 그 매력 안에서 내 유년의 한자락을 건져 낸다. 그건 아주 근사한 기분이다.

아랍 창녀인 어머니, 그 어머니를 죽인 정신병자 아버지, 그리고 그를 키워준 추한 유태인 노파 로자. 더 이상 떨어질 곳도 구겨질 것도 없는 모모의 삶에서 도대체 어떤 공감을 얻어냈냐고? 글쎄, 상황은 달라도 우린 많이 비슷하다. 나도 모모처럼, 화를 내는데 에너지를 소비하기 보다는 체념을 택하는 아이였으니까.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백일몽의 세계로 빠져드는 녀석, 조숙하지만 또 어쩔 수 없이 어린 아이에 불과한 모모의 속내가 마치 내 것인냥 짠하다.
책 속의 인물에게 이 정도로 동화되어 버리면....Game over. 재미나 감동 같은 것은 그냥 덤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은 그 밤, 나는 홀든 콜필드에게 무척이나 전화를 걸고 싶었다.
자기 앞의 생을 덮은 지금은...모모와 어디 볕 좋은 카페에 앉고 싶다. 모모에게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사 주고 싶을 뿐, 굳이 묻고 싶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햇살이 좋아 금세 녹아버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울 시간 동안만...그의 건너편에 앉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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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1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지만 확실한 자기앞의 생입니다. 추천!^^

superfrog 2004-09-1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모도 햇볕 쬐는 걸 좋아해요..! 모모는 맛있구마, 하드를 좋아해요!! 빠른화면에서처럼 혀의 놀라운 움직임을 볼 수 있어요..ㅎㅎㅎ

2004-09-11 2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nnyside 2004-09-1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에요!
저 역시 성장 소설을 좋아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와 마주하는 듯 하여 겁날 때가 있답니다.

진/우맘 2004-09-11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미루다미루다 뒤늦게 쓴 리뷰인데, 칭찬해 주시니....좋네요.^^;
그리고 보니, 모모! 금붕어님네 모모의 풀네임도 모하메드여요? ^^;;

superfrog 2004-09-11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하!!! 모하메드!! 음.. 터번과 콧수염과 뭐 그런 것들이 줄줄 생각나네요..모모는 털이 복숭아, 백도 색이랑 똑같아서 모모라고 지었어요!!(일어로 복숭아가 모모..)

진/우맘 2004-09-11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히~~~모모 머리에 터번 씌운 사진 보고 싶어요. 수건이라도 한 장 감아서....^^;;

_ 2004-09-11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조숙한 아이라던지, 젊은데도 사고의 폭이 깊은 분들을 만나면 정말 부럽습니다.
아직도 철들지 못한 제가 뭐하고 지냈을까?하는 생각에서지요.
그래서 뒤늦게 발부둥을 치고 있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추천^^ (전혀 연관성이 없잖아!!)

진/우맘 2004-09-1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어찌되었든, 칭찬 하나 벌어서 행복하네요.^^

어항에사는고래 2004-09-11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 아자르 참 좋아하는 작가인데. 절판 된 것 같은 가면의 생이란 작품도 좋고.
무엇보다도 로맹가리란 이름으로 출판한 '새들은 페루에서 죽는다'를 전 가장 좋아하죠.
추천 하고 들어갑니다.

진/우맘 2004-09-12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래님, 고마워요.^^ 페루...제목만 들어봤는데, 다음에 기회 닿으면 꼭 볼게요.

비연 2004-09-12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를 지은 작가의 작품이군요..그는 필명이 두개였죠.
이 책, 한번 읽어보고 싶다 느낌 들게 리뷰를 참 잘 쓰셨네요. 추천!

진/우맘 2004-09-12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마나...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제 리뷰를 다시 읽고 왔습니다. 부끄럽지만....저절로 둥실, 벌어지는 입.^^

기다림으로 2004-10-0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앞의 생. 제 책장에도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 중에 한 권입니다.
...늘 이런 식으로, 첫 인사를 갑작스럽게 해 버리는 것은 저의 나름대로의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함이랍니다..^^
모모의 건너편에 앉았을 때,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이런 달콤하지만 애린 상상을 진우맘님의 리뷰를 통해서 얻고 갑니다.
(뒷마무리는 어떻게 할것인가?.....그냥 평범하게 하면 안될까..?)
마음의 외침을 누르며 평안한 밤, 혹은 활기찬 아침, 아니면 따뜻한 오후 보내세요^___^

진/우맘 2004-10-07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 님도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벌써, 아침 버스 좌석에 남은 다른 사람의 온기가 반가워지는 날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