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 서재보단 제게


어릴 적 저는 사택에 살았습니다
일곱 살 때부터 열 아홉 살 때까지 주욱 그 터에 살았지요
저는 104호에 살았어요
그런데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203호에 한 식구가 이사를 왔습니다
그 집에는 저랑 같은 학년인 여자아이 하나와 여동생 둘, 갓난쟁이 남동생이 하나 있었어요
어쩌다가 그 아이랑 친해졌는지는 저도 몰라요
그냥, 그 아이가 이사오던 날, 우리가 살던 동 담벼락에 기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같이 콜라를 홀짝였던 기억만 어렴풋이 날 뿐,
같은 학교 아이라 이름과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왜 하필 그 애랑 친해지게 됐는지는 몰라요

그 애는 글을 참 잘 썼어요
학교 백일장에 나가서 상도 많이 타 오고요
바로 아래 동생도 글쓰기로 제법 이름을 알렸지요
덕택에 그 집에는 그 자매가 상으로 가져 온 전집들이 언제나 넘쳐났답니다
다행히 저희 집에는 없는 책들이 그 집에는 있었고
그 집에 없는 책들이 제게 있어서 우리는 더 붙어 있게 됐나 봐요
언젠가 한 번은, 어린이용 "금오신화"를 그 애에게 빌렸지요
그런데 제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 없는(-_-;;;) 책 보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셨던 부모님이,
당시 제가 자던 거실 불을 꺼 버리시는 통에 안절부절 못하고 앉아 있다가
결국 창밖으로 비치는 가로등 불빛에 기대 결국 새벽까지 다 읽어버렸더랍니다
어쩌면 그날 밤 때문에 그 애가 더 기억나는지도 모르겠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는 한 반이 되었지요
그 때도 우리는 같은 사택에 살고 있었어요
같이 다니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우리 제일 먼저 시집 가는 애한테 돈 모아서 피아노 사줄까?"
이런 농담도 곧잘 했던 10대였지요

우리는 모두 서울로 대학을 왔지만, 그 애는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유달리 부모님 속 썩이는 짓을 많이 했던 터라
혹여라도 그 아이를 통해 제 부모님 귀에 안 좋은 말들이 들어가지나 않을까
지레 걱정이 되기도 했고요
사람 귀한 줄 잘 몰랐던 시절, 거칠 것 없이 살고 싶었던 제 개인적 성향도 한몫 했을 것 같아요
대학교 때 그 애랑 만난 건 딱 한 번, 우연히 나갔던 한총련 집회에서였지요
헌데 대학교 4학년 때던가요, 그 애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오랜 친군데 모른 척할 수야 없겠지 싶어서 어찌 어찌 연락을 해 전화를 했습니다
그 때가... 결혼 1주일 전이던가 그랬을 거예요
결혼 축하한다고, 친구들은 많이 가냐고, 뭐 이런 실없는 소리들을 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했더라면 제가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저는 회사에 들어갔고, 가끔 그 애 소식을 들었지요
그냥, 아이를 낳았구나, 잘 사나 보구나,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어갔지요
헌데 어느 날 알라딘에 들어와 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과 이름이 대문에 걸려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 애였던 것이지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그 애 덕에 메일 한 번 보내보고, 또 그걸로 끝이었지요

올 봄이었습니다
"서재"라는 게 생겼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딱히 가지고 있는 책 정리하는 차원 이상으로 만들 의지도 없었던 제 눈에
"서재"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몰래 몰래 훔쳐 보기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그 애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어요!
그 때만 해도, 아 벌써 둘째까지 낳았구나, 그 애도 저만큼 컸구나 했을 뿐이었는데
워낙 착한 심성을 가진 아이라 제 서재에까지 신경을 써 주더군요
그 애는, 역시나 여전히 착하고, 여전히 책을 좋아하는, 씩씩한 "직장맘"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저러하게 시작한 "서재질"
아직 "알라딘 폐인"이 되기에는 모자란 기간과 능력이지만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해 주어서, 그리고 또 그 애를 통해 또 다른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이곳은, 제게 너무나 소중한 공간이랍니다
이런 재회를 맞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첫돌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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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써야지 했는데 이런 기회로 올리게 될 줄은 몰랐네요
실은 제목을 [트리뷰트 투 진/우맘]이라 할까 하다가
쥴님의 [트리뷰트 투 오즈마]에게 누가 될까 하여... ^^;
알라딘에서 절 반겨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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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8-20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 어째, 얼굴 맞대고 자라던 때보다 지금이 더 잘 통하는 듯 하이, 따우.
여하간 고맙네. 따우 기억 속의 내가 저리도 차리한 모습이라니.^^

진/우맘 2004-08-20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히....어쩐지, 사랑하는 관계로 남기에는, 우린 너무 어렸던 건지도~ 라는 닭살성 멘트로 오역이 된다. 많이 졸린가봐. 난 자러 간다으.....따우 안녀엉...스타리님도 털땅님도 안녀엉....

진/우맘 2004-08-20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부상으로 받은 전집은 소연이가, 딱, 한 번 뿐이었다구!
우리 집에 넘치던 전집들은 모두 다른 건 아껴도 책 값은 안 아끼던 엄마아빠 덕이었지.
그나저나, 나도, 너희 집에 있던 그 두툼하고 불그스레한 전집 기억나는데....홍당무랑, 키다리 아저씨를 자주 빌려 읽었지.^^

진/우맘 2004-08-20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의 이따시만한 종아리에 목졸리는 꿈?! 잘자~

starrysky 2004-08-20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후어후 닭살이 난무하는 댓글입니다~ 두 분마저 이러실 줄은 정녕 몰랐어요~ ^^
두 분 모습 너무너무 보기 좋아요!! 이런 모습을 몰래 훔쳐볼 수 있는 공간이 있어 더 좋네요.
두 분 모두 꿈 속에서 어렸을 때의 그 다정한 모습으로 즐겁게 노시기 바랍니다!! ^-^

호랑녀 2004-08-20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랬구나. 둘의 관계가... 그러니까 한총련 집회에서 만나는 그런 사이였구나...^^
갑자기,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 번도 못봤던 친구를 대학 3학년 때 동떨어진 다른 대학에서 깃발든 모습으로(나 말고 그 친구가) 만났던 기억이 나구만요. 음... 그 친구... 지금은 뭘할까...

*^^*에너 2004-08-20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넘 가깝다고 생각하기에 소홀해진 소꼽친구가 생각나네요. ^^;
앞으로는 자~알 해야겠습니다. ^^
진/우맘님과 따우님 사이가 넘 좋아 보여요. ^^

ceylontea 2004-08-20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따우님.. 우정 앞으로도 더 돈독해지기를 바래요.. 그리고.. 알라딘에서 쭉 같이 뵐 수 있기를...

책읽는나무 2004-08-2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두분은 그렇게 시간을 함께 했었군요!!..^^
같은 토깽이라 더욱더 관심이 가네요....
님들은 달빛을 벗삼아 책을 읽고 있던 시절...
전 철모르고 배밭을 뛰어댕겼군요!!..ㅡ.ㅡ;;
제초등친구들은 모두다 배밭을 하고 있었거든요...ㅋㅋ
친구~~
참 좋은 단어라고 생각해요!!
두분의 우정이 영원하길~~~^^

2004-08-20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4-08-2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이보다 더 행복하실 수 있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