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 들을 준비 하라고 큰 소리 땅땅 쳐놓고는....게으름이 병이다, 병.
철이 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내가 볼 때 철이 든다는 건...다른 사람의 마음을 빌어 생각할 수 있는 일 같다. 타인의 입장과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그런 능력. 보통은 자라면서 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을 거쳐 서서히 터득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처음 철이 든 날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빠가 다니는 회사는 복지가 괜찮아서, 수시로 있는 회사버스를 시간만 잘 맞추면 가족들도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 날 엄마와 나는 어디로 가기 위해 회사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예닐곱살 된 아이(같은 회사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어느정도 안면이 있는 아이였다)가 큰 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누나(혹은 언니?), 누나는 왜 손가락이 네 개야?"
이상하게도, 그 때의 심정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하나도 슬프거나 창피하지 않았지만,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그것은 곁에 있던 엄마도 그 얘기를 또렷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하필이면 엄마 있는데서! 엄마가 얼마나 속상하고 슬플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야기를 무시하며 못 들은척...했다. 아이는 재차 물어보려 했지만 아마 제 엄마가 입을 틀어막았겠지. 그리고 버스에 타서, 안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는 엄마를 올려다보며, 최대한, 그런 눈빛을 지으려 애썼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엄마,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학교 다니는 동안, 친구들이 철들어 가는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느끼며 자랐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까지만 해도 개구진 천방지축 동급생들은 가끔 내 손을 가지고 나를 놀려먹곤 했다. 그것은 매우 불쾌하고 짜증이 나며, 어쩔 수 없이 슬픈 일이기도 했다. 그런 경우에 대비하여 나는 답변을 준비해서 되뇌이고 다녔다. '그래, 난 손이 그래. 하지만, 손가락 네 개 갖고도 너희들보다 공부도 잘 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써. 됐냐?' ㅎㅎ, 글을 쓰는 것은, 사실 손가락 보다는 머리에 관여된 기능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아이들이 그것을 문제삼을만큼 똑똑치 못하다는 것까지 계산에 넣는...하지만 한 번도 그 말을 써먹지 못한, 나는 영악하고도 어리숙한 순둥이였다. 그런데 대략 5학년 즈음에 접어들자 더 이상 친구들은 내 손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네들도 어느새 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유치하고 뻔한 답변으로 나를 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어찌나 다행스럽던지.
그런데, 일찍 철이 든다는 것이, 깊게 철든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인가보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남자친구들의 속은 뻔히 들여다 보이고, 어떤 고민이든 척척 답을 내어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다닐 동안 자주 만나지 못하자 이것들은 어느새 키가 나를 앞질러 있었고....내가 내처 술만 먹으며 점점 멍청해져 가고 있던 대학 시절 동안은 머리가 영글어서, 가끔 나보다 똑똑한 소리, 철들어 여문 소리를 한 마디씩 해 댄다. 그 옛날 카운셀러가, 이제는 도리어 어리광을 부리며 치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좋을 때가 많다. 너무 일찍 철들었으니까. 이젠 좀 철 없이 굴어도 되지 않을까? 술 먹고 전화해서 꼬장을 부려도, 내가 늬들 연애 상담 해 준게 얼만데! 내가 교정해 주고 대필해 준 연애편지가 없었다면, 늬들 사춘기가 한결 팍팍했을걸?
어...그런데, 정신차리고 보니 글이 샜다. 내가 조숙했던 시절엔 날 몰랐던....그래서 현재, 철없고 게으른 마누라쟁이를 데리고 살고 있는 울 서방님은...억울해서 어쩐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