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재미있자고 쓴 음주공적서가 저런 큰 상을 안겨주다니. 남편에게 놀림 좀 받게 생겼습니다. 응큼한 사람, 맨날 들어와서 슬그머니 글을 읽고 나가더라구요. 언젠가는 자기가 술 만땅 취해가지고 와서는 "야, 네병 반~"하고 놀리더군요. 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야, 알콜 대상!" 하고 놀리겠지요? -.-

여러 번 밝혔듯이, 요즘은 술 잘 못 먹습니다. 속도 안 좋아졌지만,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터라 너무 늦어지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철없을 때는 '안 취하려고 기를 쓰고' 마셨지만, 요즘은 '얼른 기분 좋게 취하고는 말짱하게 돌아오려고' 마시지요. 그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에는 직장도 일조합니다. 5시 퇴근인지라, 1차에서 신나게 마시고 노래방 갔다가 2차 초입에 빠져나와도 9시30분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거든요.^0^

여하간 자축 세레머니로, 94년, 그 짧았던 전성기의 음주공적을 하나 더 밝힙니다.

제가 그렇게 전투적으로 술에 덤빈 것에는, 그 때의 학교 상황과 동아리가 한 몫 했습니다. 저는 한남동에 위치한 D대학엘 다녔는데, 제가 입학한 그 해 재단의 비리로 학교가 망하느니 옮기느니 해서 우리는 모두 수업거부를 했었습니다. 수업거부, 거의 두 달간 이어졌지요. 그런데 당시 재단 이사장이었던 장충식의 언론 통제가 어찌나 심했던지, 우리는 9시 뉴스는 커녕 신문의 토막 기사에도 실리지 못하고 기껏해야 교통방송에 '정체의 원인'으로나 잠깐씩 등장했지요. TT

수업 없는 대학생이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90년대 들면서 사라졌다던 <낮술>이 저절로 살아났지요. 점심 먹고는 할 일 없으니까 맥주....한참 버티고 나와도 '어, 아직 환하잖아.' 붉은 얼굴이 부끄럽다는 핑계로 2차....먹고 있다보면 선배들이 모여들어 저녁 겸 3차...노래방...학교 운동장 곁 노천을 거쳐 선배들 자취방까지, 그런 날들이 몇 번 계속되었습니다.  

참, 본격적인 음주 공적 하나. 제가 들었던 동아리는 <에스페란토>였습니다. 왠만해서는 이 얘기를 안 하는데, 첫번째 이유는 "어? 그게 뭐 하는 동아리인데?" 하는 질문이 귀찮아서고, 두 번째 이유는 "와....그렇구나, 그럼 한 번 해봐." 하는 말에 답하기가 민망해서 입니다. <에스페란토>를 가장한 술 먹는 동아리였던 터라...지금은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여하간 초봄, 아직 코트를 벗기 이른 계절에 우리는 계룡산 근처로 에스페란토 전국 연합 MT를 갔습니다. 저녁이 되니, 우와아.... 저마다 배낭에서 소주를 꺼내는 겁니다. 뭐, 그게 전통이라나요? 진로에 보해, 금복주, 무학, 선양...도 보도 못한 각 지방의 소주가, 안 깨진다는 이유로 무시무시한 PET병에 담겨서.....!!! 게다가 이 무서운 사람들, 포카리 스웨트나 데미소다를 섞으면 레몬소주 맛이 나서 먹기 좋다고, 마악 섞는 겁니다. 우리는 그 칵테일(?)의 위험을 모르고 잘 넘어가니 덤볐죠. 그 때 저에게는 막강 파트너가 있었으니, 양가집 규수였다가 친구 잘 못 만나 타락한 동기 해피양.(서재에도 간혹 출몰합니다. 오늘 둘째를 낳았다는군요.^^) 술자리 시작한 지 몇 시간 안되어 술은 떨어졌고, 손을 내저으며 쓰러지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해피양과 저는 소주를 더 사러 인근 슈퍼까지 30분이나 걸어나가는 것으로 승리를 장식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안 되어, 밖에서 왠 비명소리가!!! 뛰쳐나가보니 다른 학교 1학년인 남학생 하나가, 예쁘고 동그란 오바이트(!) 자국 옆에 눈을 1cm나 덮고 누워있는 것입니다. 흐억.... 남학생방과 여학생방이 따로 있어서(뭐, 나중에는 노는 방, 안 노는방 기준이 되긴 했습니다만.) 옆 방에서 자겠거니...했더니만! 일찍 발견 못하고 밤을 새웠으면, 저희는 뉴스에 나올 뻔 했습니다. 법적인 처벌을 받지는 않았겠지만, 해피양과 저도 도의적 책임에 두고두고 슬퍼했겠지요.

참, 승리는 거두었으나 각 지방 소주 5종 + 포카리, 데미소다 칵테일의 후유증은 대단했습니다. 그거, 다음날 뒤끝이 죽이더군요. -.- 대전에서 서울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저는 선배님들께 전수받은 비법, <검은 비닐 봉지 양 귀에 걸기>로 버티며 지옥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분...술은, 섞어 먹지 맙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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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3-25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술을 섞어 마시면 죽는다던데... 저는 오히려 한가지 술로만 마시면 더 못 버팁니다. 특히 맥주만 마시면 죽음이죠. 맥주 소주 이렇게 먹거나 소주도 콜라를 타서 마시거나 살구소주 같은걸 마셔야 마실 만 하더라구요.
<검은 비닐봉지 양 귀에 걸기>..흐흐. 막 상상이 되어서 너무 웃깁니다.

진/우맘 2004-03-25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구 소주? 역시 대단한 내공이십니다. 그런 주종은 또 처음이군요.
비닐봉지... 아, 남의 얘기일 때는 웃기지요. 그런데 저는, 지금 생각해도 고통스럽습니다. 하긴, 욱욱 대는 내 옆에 앉아서 속을 달랬던 해피양과, 주변의 뭇 승객들은 더 괴로웠겠죠? ㅋㅋㅋ

비로그인 2004-03-25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숭아 소주도 맛있어요. 죽통주도요. ^^ 그나저나 검은봉지 사건과 남학생 사건은 정말 충격이군요. 역시 진우맘님은 진정한 대상이십니다~ 짝짝짝!!

sooninara 2004-03-25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스페란토...전세계 언어라구요...참 궁금합니다..저도 만나게되면 한번 해보세요 할지도...
어쨋든 상은 좋은거지요..축하드려요^^
참 저는 오늘 학운위에서 지역위원 추천회의에 다녀왔어요..진우맘님은 일하시는데 회의 참석은 어떻게 하세요? 처음이라서 그런지 자주 오라고하네요..ㅠ.ㅠ

책읽는나무 2004-03-25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들었던 동아리는 <에스페란토>...............나; 그게 뭐하는덴디유??
<에스페란토>를 가장한 술 먹는 동아리였던 터라.......나; 우와....증말이우??...내눈으로 봐야할껀디..........
정말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네요.......^^
여지껏 하늘하늘하고 부드러운 두아이의 아줌마라고 보아왔던 초창기에 비해 요즘은 ...네병반의 소주병을 앞에 나열한....그리고 어제 본 아바타에다 왕관을 머리위에 쓴 님의 모습이....아주 무서운 속도로 님의 이미지가 바뀌어 가는군요....^^.....이래서 대한민국 아줌마는 위대하다고 하는것 같네요.....진우맘님의 알콜 대상을 받으신걸 축하하며....건배!!

sooninara 2004-03-2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역시 진우맘님이군요..왜냐면 제가 96년에 결혼해서 위아래 꽃분홍 한복인데..
곤색에 빨간 치마는 98년 아버님 환갑잔치에 단체로 맞춘옷이구요...
진우맘님..예리하시네요..^^(나무님 서재에서 한복 코멘트보고서)
진우맘님...대단~~해~~요

연우주 2004-03-25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오오오~~~ 감탄, 감탄.

마태우스 2004-03-2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미리 읽었다면 수상자 선정을 놓고 머리를 그렇게까지 쓰지는 않았을텐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