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가들 모중석 스릴러 클럽 8
데이비드 모렐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폐허가 되어버린 황량한 건물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대부분 이제는 다시 올 수 없을 지난 날의 화려한 시절을 떠올리며 쓸쓸한 감회에 젖거나 낡고 퇴락한 것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건물이 과거의 풍경, 기억, 생활상 등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는 일종의 보물창고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은 수십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 버려진 빈 건물들-호텔, 공장, 지하터널, 창고 같은-에 몰래 잠입해 그곳에 놓인 부서진 가구나 신문쪼가리 등을 발견하고 예전에 여기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며 재미있어 하는데, 이런 사람들을 '도시 탐험가The Creepers'라고 부른단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금시초문이었지만 야후나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17만 개 이상의 도시 탐험가 관련 웹사이트가 뜬다고 한다.

 

먼지투성이 버려진 건물에는 도처에 위험이 넘쳐난다. 튀어나온 못, 부서진 계단, 쥐들이 옮기는 전염병 같은 치명적인 위험들이. 어쩌면 일부러 위험한 것을 추구하며 자신이 가진 힘과 지혜를 극한까지 발휘해야 하는 모험 정신이 익스트림 스포츠와 닮아서 그렇게 도시 탐험가들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험이 부족한 시대를 살고 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항상 모험에 굶주려 있으니까. 이 책은 매우 독특한 소재인 도시 탐험가의 세계를 그리며 쉴새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만점 스릴러이자, 악몽과도 같은 호러 소설이다. 주인공은 도시 탐험가들을 밀착취재해 기사를 작성하려는 프랭크 발렌저. 그는 역사학 교수 로버트 콩클린과 그의 제자들인 릭, 코라, 비니의 도시 탐험가 팀과 함께 직접 탐험에 참가하기로 약속이 된 상태다. 목적지는 1900년대 초반에 지어졌지만 1960년대에 폐쇄됐고, 곧 철거될 예정인 패러곤 호텔.

 

패러곤 호텔의 창립자는 일종의 광장공포증을 갖고 있어, 호텔 전체를 마야의 피라미드 모양을 본떠 지어 자신만의 성을 쌓은 다음 그곳에서 평생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외출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호텔 앞 해변가까지 걸어 나가 자살을 하기 위해서였다. 창립자 모건 칼라일이 사망한 후 쇠퇴일로를 걷다 몰락한 패러곤 호텔의 모든 문에는 강철 덧문이 잠겨 있다. 콩클린 교수가 조직한 도시 탐험가들은 배수로 터널을 이용해 호텔에 잠입하는데 성공하는데, 수십 년간 폐쇄된 장소에서 근친교배를 거듭해 돌연변이를 일으킨 쥐떼와 고양이가 그들을 반겨준다. 그 녀석들은 보통 다리가 다섯 개거나, 눈이 하나인 혐오스런 족속들이다. 한편 발렌저는 유일한 여성 탐험가 코라의 존재가 대원들에게 묘한 질투와 균열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감지한다.

 

여기까지가 아주 초반부의 내용이다. 발렌저를 비롯한 탐험대원들은 곧 8시간의 끔찍한 호러와 테러에 시달리게 될 예정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유령이나 흡혈귀 등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그런 초자연적인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무서운 것이 그들을 찾아오니 그건 바로 사람이다. 육체적인 강인함과 교활한 머리, 각종 특수장비까지 겸비한 사이코가 어둠 속에서 한 명 한 명씩 그들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누가 살아나고 누가 희생될지 추측해보라. 그날 밤의 악몽은 날이 새도록 계속된다.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공포가 찾아올 것이다.

 

작가는 영화 <람보>의 원작자로 유명한 데이비드 모렐. 한국에서 '람보'하면 무뇌아 액션 기계의 대표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영화 <람보>도, 원작 <퍼스트 블러드>도 그다지 녹록한 작품은 아니다. 베트남 전쟁의 상흔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가지고 있는 존 람보가 미국의 광산 도시에서 지난 날의 악몽이 되살아나 폭주한다는 이 내용의 어디가 유치한가? 물론 2편부터는 정말 무뇌아 액션 기계가 되어버렸지만 데이비드 모렐이 원작을 쓴 1편은 폄하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액션 스릴러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모렐답게 시종일관 긴박감 넘치고 영화 <다이하드>를 연상시키는 주인공 발렌저의 액션이 독자를 흥분시킨다. 사실 후반부는 거의 잘 만든 헐리우드 액션 영화를 씬 별로 감상하는 느낌까지 들 정도다.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면, 처음부터 독자들에게 단서를 주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진행되면서 점차 사실들이 밝혀진다는 거다. 알고 보니 주인공의 정체가 뭐더라, 알고 보니 주인공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더라 하는 식인데 어차피 치밀한 반전이나 트릭보다는 손에 땀을 쥐는 스릴과 인상적인 공포의 한 순간에 무게중심을 두고 성큼성큼 건너뛰는 작품이니 큰 문제는 없다. 그리고 또 하나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클라이막스에서 결정적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어떤 물건을 주인공 발렌저가 아무 이유없이 챙긴 다음 위기의 순간에 근사하게 써먹는데, 이 물건을 발렌저가 왜 챙겼는지 개연성 있게 설명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위에도 말했듯이 세부적인 것들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작품은 아니다. 발렌저와 도시 탐험가들이 걷는 길을 조용히 뒤따르는 것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돋고 온통 흥분으로 벌개진 채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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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7-08-10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드는 '프랭크 발랜저'이름이 맞던가^^; 다음엔 더 흥미진진하고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 기대해 봅니다.

jedai2000 2007-08-10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편이 나온다고 하네요. <스캐빈저>라는 이름으로 나온답니다. 올 여름에 참 재미있게 봤던 작품인데, 내년 여름에도 속편이 나와 시원한 여름밤을 선물해주면 고맙겠어요 ^^
 
잔학기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심상치 않은 제목의 <잔학기殘虐記>는 한 통의 편지로 시작된다. 고미 나루미라는 필명으로 16세에 소설을 발표해 천재작가 등장이라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게이코가 돌연 실종되자, 그녀의 남편이 게이코의 담당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게이코는 어린 시절 겪었던 끔찍한 기억을 담은 한 편의 수기 '잔학기'를 남기고 사라졌고, 독자들은 그녀가 남긴 잔학기를 보면서 이제 게이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아무리 담대한 사람도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 그 잔혹한 기억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게이코의 인생이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해는 초등학교 4학년인 열 살 때였다. 그녀는 지방 소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성악 전공자라는 허영심에 젖어 현실 감각이 별로 없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당시에 이미 게이코는 아빠, 엄마가 그다지 별 볼일 없는 속물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리 조숙할 수 있느냐고 묻지 말길. 기리노 나쓰오가 그리는 인물들은 두더지처럼 본능적으로 어둠을 사랑하고, 자석처럼 어둠에 이끌리니까.

 

방과후 집에 돌아오던 길에 게이코는 유괴를 당한다. 그녀를  납치한 건 철공소에서 일하는 겐지라는 사내. 그는 지옥의 밑바닥처럼 소음이 요란한 공장의 2층 자기 방에 게이코를 감금하고는 애완 고양이처럼 '밋치'라는 별명을 지어 부른다.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학대만 받는 인생을 살아온 겐지의 정신은 어딘가 이상하다. 낮에는 보통의 성인 남자로 음습한 성욕에 휘둘리지만, 밤에는 아동용 책가방을 메고 게이코의 친구 노릇을 하며 4학년 아이로 돌아간다. 고아원에서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한 겐지는 4학년이 되고 싶은걸까.

 

겐지와 게이코는 1년을 조금 넘게 기묘한 동거를 계속한다. 게이코는 겐지와 더불어 그 공장의 유일한 종업원이자 겐지를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옆방 남자, 야타베에게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지만 겐지의 주먹맛만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웃음, "야타베 씨는 귀머거리야." 하지만 언젠가는 야타베 씨가 나를 발견하고 구해주리라는 게이코의 희망은 거의 종교적인 믿음의 경지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결국 게이코를 구한 사람은 우연히 겐지의 방을 들여다본 공장 사장 내외.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결국 구출된 게이코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야타베 씨의 방에 들어가본 것이었다. 거기서 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걸 보고 좌절하며 충격을 받는 게이코. 야타베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고 몰래 훔쳐보며 게이코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게이코는 겐지의 손에서 도망쳤지만 한 번 그녀를 손에 넣었던 어둠이라는 존재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그녀를 따라다니며 고통을 선물한다. 열 살 소녀에게 칼날처럼 내리꽂히는 사람들의 편견 섞인 시선, 겐지와 무슨 일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비열한 호기심, 커다란 사건으로 인해 균열을 일으킨 가족 관계 등이 모두 그녀의 삶을 뒤흔들지만 가장 혹독한 붕괴는 그녀 내부에서 일어난다. 무엇이 성인 남자가 열 살 소녀에게까지 성욕을 느끼게 만드는가, 성욕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그렇게 끈적할 수 있을까, 하는 자문에 자답을 거듭하게 되고 어느새 십대 소녀는 성에 집착하고 성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는 성적 인간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잔학기>의 전반부가 게이코가 유괴됐던 열 살 때의 시점에서 진행된다면, 후반부는 고등학생이 된 게이코의 이야기다. 그녀는 현실의 암흑을 잊기 위해 밤의 꿈에 탐닉하게 되고 꿈속에서 이야기를 짓는 데 몰두한다. 겐지와 야타베, 그리고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상상하고 또 상상해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통제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게이코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겪었던 사건에 대해 점차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둘씩 알게 되고, 당연히 그녀의 이야기도 변해 간다. 이 부분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어떻게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소설을 완성해 나가는가 하는 질문의 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기리노 나쓰오의 내밀한 창작의 비결을 슬쩍 털어놓는 것 같아 재미있게 느껴진다.   

 

다른 작가들이라면 처절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던 소녀가 결국 세상과 화해하는 식의 감동적인 결말을 그리겠지만 기리노 나쓰오는 다르다. 한 번 어둠을 맛본 사람은 다시는 빛으로 돌아가지 못하다는 염세적인 세계관과 혼란스런 외부와 내부의 사건을 맞아 조금씩 일그러져가는 정신의 균형, 마음속의 어둠이 불러오는 광기를 극한까지 묘사함으로써 우리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잔혹한 한 순간을 선물한다. 이런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이 너무 어둡고 우울해서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느릿하게 시작하다 점차 속도를 올려서 결말에 이르러 완전히 독자를 압도하는 그녀의 영리함과 칼로 베이는 듯한 느낌까지 주는 날카로운 인간 관계에 대한 통찰력, 날렵하고 빼어난 문장력에 주목한다면, 취향을 떠나 이 일본의 중년 여성작가가 보기 드문 놀라운 실력의 작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손꼽히는 거장이라 그녀의 작품이 속속 영역되고 있지만, 아마도 10년 후쯤에는 전 세계가 그녀의 작품에 찬사를 보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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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 예니체리 부대의 음모
제이슨 굿윈 지음, 한은경 옮김 / 비채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2007년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소설상을 받은 작품. 작가 제이슨 굿윈은 비잔틴 제국과 동양에 관심이 많아 몇 편의 논픽션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소설은 처음이다. 1800년대 초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그리는 일종의 팩션 미스터리로 볼 수 있을 이 작품으로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소설가로 데뷔자하자마자 성공 가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겠다. 수많은 옥석 중에서 고르고 골라 뽑은 수상작은 그만큼 완성도를 보증해준다고도 할 수 있어 실망하는 경우가 적은데, 안타깝게도 이번 작품은 미국추리작가협회의 안목에 솔직히 납득을 하지 못하겠다.

 

추측해보건데, 각고의 노력으로 19세기의 이스탄불을 실감나게 재현한 이 작품의 성취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을까. 과연 이스탄불의 궁정부터 뒷골목까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실제로 보고 온 듯한 작가의 실감나는 묘사와 활달한 필치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지나치게 과도한 감이 있다. 작가후기를 통해 본인도 어느 정도 인정하듯이 아직까지 작가의 장기는 오스만 투르크의 사회나 역사, 문화 등을 알기 쉽게 전하는 것이지 이야기는 아니다. 환관 탐정 야심이 맡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데, 어찌나 이것저것에 대한 설명이 많은지 이제 오스만 제국에서 사람들이 흔히 먹는 요리법과 커피의 유래, 무두질하는 법 등에 대한 설명은 집어치우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외치고 싶어진다.

 

물론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이런저런 지식들을 많이 얻는 걸 좋아하는 분도 많을 테니까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취향이다. 하지만 적어도 미스터리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작품으로서는 단서를 주의 깊게 배치하지 못했고, 야심이 진상을 깨닫는 과정에서도 증거가 부족했으며(특히 할렘에서 일어난 보석 도난사건과 살인사건), 사건이 풀려가는 대부분의 과정이 우연에 의지하고 있고, 중요하게 등장하는 일종의 암호같은 시도 아무 설명없이 그냥 사라진다. 그 시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한 독자들은 당연히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미스터리를 처음 써본 작가가 애거서 크리스티 영화를 많이 만든 제작자 등의 조언을 받아 집필했다고 하는데, 다음 작품을 쓰기 전까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세 번쯤 더 통독하기 바란다.

 

다만 그래도 이 책을 끝까지 읽었던 것은 예니체리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1400년대부터 400년간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이끈 특수부대였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그들은 당연히 부패하게 되고 결국 나라를 좀 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결국 서양식 군대를 양성한 술탄은 예니체리의 막사를 포격하고, 훗날 '신성한 날'이라고 명명되는 그날 예니체리의 영욕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야 말았다. 이 책은 예니체리가 몰살되고 10년 후에 시작된다. 어느 날 예니체리를 물리친 서양식 신위병 군대의 장교 4명이 실종되고 도시 곳곳에서 한 명 한 명씩 시체로 발견된다. 술탄의 할렘 궁정에서는 술탄의 모후 발리데의 보석이 사라지고, 왕의 여자 한 명이 목졸려 죽는다. 안팎으로 시끄러운 이 사건들을 해결할 사람은 비록 없이 살지만 약삭빠르고 능력있는 환관 탐정 야심뿐.

 

남성적 가치관이 지배했던 19세기 동양에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환관은 멸시받는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움츠러들지 않고 기운차게 살아가는 야심의 배짱과 유머는 보기 좋다. 간단히 말해 야심의 인간적인 매력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사회상에 우선을 둔다면 만족스런 독서가, 반전이나 미스터리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저 그런 작품이니 자신의 기호와 취향을 잘 판단하고 선택해서 즐거운 독서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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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사랑 - 다섯 영혼의 몽환적 사랑 이야기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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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 전, 인상깊게 읽은 [꽃밥]의 작가 슈카와 미나토의 신작이라 큰 기대를 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읽어보았다. 작가는 [꽃밥]으로 2005년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일본에서 호러소설 작가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인데, 막상 작품을 보면 그다지 공포스럽지는 않다. 괴이하고 신비한 이야기 혹은 약간 소름끼치는 이야기 정도로 볼 수 있을 텐데, 일본의 오랜 기담, 괴담 문학 전통의 계승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제법 아니 꽤 잘 쓰는 작가다. 다소 노골적인 제목, [새빨간 사랑]을 달고 나온 이 단편집은 버려진 마론 인형처럼 처연한 느낌을 주는 금발머리 소녀가 표지를 장식한다. 과연 이 소녀는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지 절로 궁금해진다.

 

<영혼을 찍는 사진사>는 투병 중인 동생이 결국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자 절망하는 언니가 주인공이다. 이제 갓 스물인데 한 순간도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동생의 운명에 슬퍼하는 언니를 보다 못한 그녀의 남자친구가 묘한 정보를 가져오는데, 죽은 사람을 예쁘게 장식한 다음 사진 속에 담아 내내 아름다운 모습으로 망자를 추억하게끔 한다는 장의사가 있단다. 언니는 결국 장의사와 연락해 동생이 결코 입어볼 수 없었던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동생을 잘 돌봐주던 간호사가 집으로 찾아오고 그 장의사와 관계된 무서운 비밀을 털어놓는다. 공포영화나 소설을 많이 본 분들이라면 대개 아시겠지만 이쪽 장르, 은근히 교훈적이다. 청춘 난도질 호러 영화가 난잡한 성관계를 즐기는 10대들이 주로 당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공포 영화의 피해자는 금기를 어기는 사람들이다. <영혼을 찍는 사진사>의 교훈은 망자는 기억 속에 아름답게 묻어야지 너무 과도한 애도의 표현은 좋지 않다, 뭐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독특한 소재와 분위기가 몰입감을 더해주지만 결말은 조금 아쉽다.

 

<유령소녀 주리>는 제목에 상당한 스포일러가 있다. 은둔형 외톨이처럼 방에만 틀어박혀 학교도 가끔 가는 한 소녀가 있다. 엄마의 푸념에 견디다 못해 모처럼 학교를 나가는데, 이게 웬 일 학생들이 그녀를 보지 못하네. 알고보니 그녀는 진짜 유령소녀였다. 누군가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다. 살아 있을 때는 뭐든지 귀찮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다시 올 수 없는 순간들이 그립기만 할뿐이다. 어떤 순간에도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그녀에게 정말 모든 걸 바쳐서라도 해내고 싶은 일이 생기지만 실체가 없기에, 만질 수 없기에 결국 실패하고 만다. 책에서 묘사되는 이 순간의 절망감은 너무 아프게 느껴져 지금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혹시 있다면 이 단편을 보라고 권해주고 싶을 정도다. 괴로워도 슬퍼도 살아 있어야 남도 돕고 자신도 도울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고 보니 이 단편에도 교훈이 있는걸.

 

<레이니 엘렌>은 미스터리 팬들을 열광으로 몰아넣었던 기리노 나쓰오의 [그로테스크]와 같은 소재를 그린다. 대기업을 다니는 미모의 여사원이 밤에는 매춘을 일삼다 피살되어 일본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바로 그 사건. 일단 기리노 나쓰오가 그토록 멋지게 요리해낸 소재를 또 한 번 다룬다는 것 자체가 작가의 두둑한 배짱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어차피 장르가 완전히 다르니까 부담은 약간 적었을 것이다. 러브호텔 밀집지역에서 채팅으로 만난 두 중년남녀, 싸구려 잠자리를 준비중이다. 남자는 대학교 때 만나 짝사랑했던 같은 과 여자친구를 회상한다. 그 여자친구와는 맺어지지 못했지만 그후 매스컴을 통해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된다. 미모의 커리어우먼이자 매춘부가 된 여자친구는 결국 밤거리를 떠돌다 목 졸려 살해되고 말았다. <레이니 엘렌>에서는 러브호텔 거리를 가득 메운 풍선을 통해, 이 도시를 부유하는 정체불명의 욕망을 그린다. 우리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을 바로 그 욕망을.

 

<내 이름은 프랜시스>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단편이었다. 마치 에도가와 람포를 연상케 하는 이상성욕을 소재로 다룬 작품인데, 화자인 젊은 여성이 중학교 때 스쳐 지나간 같은 반 여자친구에게 테이프를 녹음해 보내면서 그녀의 목소리로만 진행되는 특이한 설정이다. 이단 종교에 매몰된 가족을 둔 그녀의 최대 고민은 원인 모를 도벽이다. 어떻게도 참을 수 없는 이 도벽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도쿄로 도망을 치게 되고 몸을 팔면서 생활한다. 매춘 생활 중 만난 남자는 유달리 신사적이고 성품이 훌륭하지만 한 가지 기묘한 요구를 하는데...끈적끈적한 분위기와 기묘한 인간군상들,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변태성욕을 그려 독자를 훌륭하게 빨아들인다.

 

<언젠가 고요의 바다에>는 소품이다. 초등학생 남자 주인공이 우연히 젊은 남자와 알게 된다. 그의 집에는 지구의 누구도 보지 못했던 기묘한 어떤 것이 살고 있는데, 그 생물(?)을 키우는 데는 품이 무척 많이 든다. 이 작가는 [꽃밥]에서 '요정생물'이라는 정체불명의 생명체에 집착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근사하게 지은 바가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름다운 그 생물(?)에 홀려 생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짤막하게 수록작을 살펴보았다. 작품들이 일정 수준 이상은 전부 되어 있고, 내용도 다 재미있어 금세 읽힌다. [꽃밥]과 비슷하게 공포와 사랑, 에로틱한 정서, 욕망 등의 내밀한 인간 본성을 그리는 것도 인상적이다. 다만 [꽃밥]의 이야기들은 전부 유년시절의 풍경을 담아내 어딘지 아련한 느낌이 좋고 우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면이 있는데, 성인들이 주인공인 [새빨간 사랑]은 그만큼 노골적이라 약간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판정은 [꽃밥]이 위다. 하지만 둘 다 재미있다. 지루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이야기를 애타게 찾고 있는 독자라면 슈카와 미나토라는 이름을 기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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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5-23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밥을 읽어야겠군요. 그나저나 그로테스크와 같은 소재는 정말 님 말씀처럼 작가의 배짱인것같네요^^

jedai2000 2007-05-24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밥>이 더 좋습니다. <그로테스크>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고 당시 사건이 워낙 충격적이긴 했나 봐요 ^^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
나가시마 유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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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인 나가시마 유의 2005년도 작품으로 두 개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다. 평소에 순문학을 거의 읽지 않는데도 200쪽 남짓한 페이지도 부담이 없고, 또 너무 미스터리에만 편향된 독서를 하는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책을 잡았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표제작인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무쓰미라는 한 평범한 직장 여성이 직장 동료를 알게 되고 서서히 그가 마음속에 자리잡지만 결국 바라만 보다 끝나는 짝사랑 이야기인데 커다란 드라마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들이 영화처럼 우연과 우연이 겹쳐 결국 인연으로 맺어지는 드라마틱한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좋아하게 되는 과정도 그냥 미소지을 때 어쩐지 쓸쓸함이 감도는 옆얼굴이 마음에 들더라, 하는 식의 소박한 이유가 대다수다.

 

이 작품에서 무쓰미가 남자 동료에게 처음 마음을 주게 되는 순간은 그가 노래방에서 자메이카의 레게 아티스트 밥 말리의 <No Woman No Cry>를 부르는 걸 보고 나서부터다. 일단 노래 자체도 무난한 히트곡이 아니고 시쳇말로 뭔가 있어 보이는 노래인데다가, 다른 사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자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라고 해석될 그 제목을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라고 말하는 그 남자가 신비하게 느껴진다. 사실 남자가 무식해서 제목을 잘못 해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는 그런 무난한 이유는 통하지 않는다. 왜 이 남자는 그렇게 해석한 것일까, 혼자 상념에 상념을 거듭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보기도 하며 설레여 한다. 누구나 노래방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왜 이 노래를 불렀을까, 무슨 뜻일까 하며 혼자 갖은 상상을 하며 괜히 흐뭇해지고 때로 쓸쓸해하며 망상에 빠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대다수의 사랑을 현실적으로 절묘하게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무쓰미의 내밀한 심리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작가는 결국 말하지 못하고 남자를 떠나보내는 여자의 절망을 극적으로 그리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관찰할 뿐인데 그래서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도 무쓰미에게 애정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여자도 모르고, 작가도 모르고, 독자도 모른다.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의 에피소드처럼 내일이면 다시 만나지 못할 이별을 속으로만 삭이는 무쓰미의 모습이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이외에도 현대의 직장 여성으로서 출퇴근 시간과 일하는 과정 속에서 무쓰미가 느끼는 여러 가지 단상도 비슷한 삶을 사는 독자들에게 큰 공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뱀처럼 긴 줄을 이루며 출근하는 사람들, 서로 알지 못하기에 나란히 서지 못하고 앞뒤로 서서 행렬을 이룬다. 하나로 길게 이어져 있지만 실상은 단절되어 있다. 어느 비오는 날 출근길에 땅바닥에 덮여 있는 나무판자를 누군가 물이 튀기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깔아두었다는 걸 깨닫고 감동받는 무쓰미. 역시 우리는 선의로 이어져 있어, 라고 기뻐하지만 그 감격을 이야기할 상대는 출근길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역시 없다. 결국 혼자인 것이다. 아마 나를 비롯해 이 에피소드에 공감할 독자들이 무척 많을 거라 믿는다.

 

'센스없음'은 표제작보다 더 인상적이고 더 기억에 남는다. 남편이 바람이 났다는 걸 발견한 아내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집안 정리를 한다. 남편이 빌려놓은 성인비디오를 반납하지 않으면 연체료가 쌓이는 걸 알고는 비디오를 갖다주러 대여점이 있는 역까지 걷는다. 남편이 그동안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던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 눈내린 거리를 사진에 담으며 그저 걷는다. 결국 파국으로 끝난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느껴지는 환멸감과 곧 헤어질 거면서 남편의 성인비디오를 갖다주기 위해 걷는 상황의 묘함, 오랜만에 눈길을 걸으며 떠오르는 예전 학창시절의 달콤씁쓸한 기억까지 여자의 혼돈스런 사고가 내내 이어진다. 역시 끝까지 큰 사건은 없고 그저 걸을 뿐인 한 여자의 내면을 따라가는 작품인데도 여운이 굉장히 크고 깊다. 나가시마 유의 작품은 처음 읽어봤지만 담백한 심리 묘사와 현실적이면서도 뭔가 마음을 적시는 여운에 깊이 탄복하고 말았다. 재미로 보는 소설은 아니지만 가끔씩 이런 풍의 소설을 읽으며 마음에 비를 내리게 하는 경험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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