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학기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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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심상치 않은 제목의 <잔학기殘虐記>는 한 통의 편지로 시작된다. 고미 나루미라는 필명으로 16세에 소설을 발표해 천재작가 등장이라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게이코가 돌연 실종되자, 그녀의 남편이 게이코의 담당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게이코는 어린 시절 겪었던 끔찍한 기억을 담은 한 편의 수기 '잔학기'를 남기고 사라졌고, 독자들은 그녀가 남긴 잔학기를 보면서 이제 게이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아무리 담대한 사람도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 그 잔혹한 기억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게이코의 인생이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해는 초등학교 4학년인 열 살 때였다. 그녀는 지방 소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성악 전공자라는 허영심에 젖어 현실 감각이 별로 없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당시에 이미 게이코는 아빠, 엄마가 그다지 별 볼일 없는 속물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리 조숙할 수 있느냐고 묻지 말길. 기리노 나쓰오가 그리는 인물들은 두더지처럼 본능적으로 어둠을 사랑하고, 자석처럼 어둠에 이끌리니까.

 

방과후 집에 돌아오던 길에 게이코는 유괴를 당한다. 그녀를  납치한 건 철공소에서 일하는 겐지라는 사내. 그는 지옥의 밑바닥처럼 소음이 요란한 공장의 2층 자기 방에 게이코를 감금하고는 애완 고양이처럼 '밋치'라는 별명을 지어 부른다.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학대만 받는 인생을 살아온 겐지의 정신은 어딘가 이상하다. 낮에는 보통의 성인 남자로 음습한 성욕에 휘둘리지만, 밤에는 아동용 책가방을 메고 게이코의 친구 노릇을 하며 4학년 아이로 돌아간다. 고아원에서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한 겐지는 4학년이 되고 싶은걸까.

 

겐지와 게이코는 1년을 조금 넘게 기묘한 동거를 계속한다. 게이코는 겐지와 더불어 그 공장의 유일한 종업원이자 겐지를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옆방 남자, 야타베에게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지만 겐지의 주먹맛만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웃음, "야타베 씨는 귀머거리야." 하지만 언젠가는 야타베 씨가 나를 발견하고 구해주리라는 게이코의 희망은 거의 종교적인 믿음의 경지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결국 게이코를 구한 사람은 우연히 겐지의 방을 들여다본 공장 사장 내외.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결국 구출된 게이코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야타베 씨의 방에 들어가본 것이었다. 거기서 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걸 보고 좌절하며 충격을 받는 게이코. 야타베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고 몰래 훔쳐보며 게이코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게이코는 겐지의 손에서 도망쳤지만 한 번 그녀를 손에 넣었던 어둠이라는 존재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그녀를 따라다니며 고통을 선물한다. 열 살 소녀에게 칼날처럼 내리꽂히는 사람들의 편견 섞인 시선, 겐지와 무슨 일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비열한 호기심, 커다란 사건으로 인해 균열을 일으킨 가족 관계 등이 모두 그녀의 삶을 뒤흔들지만 가장 혹독한 붕괴는 그녀 내부에서 일어난다. 무엇이 성인 남자가 열 살 소녀에게까지 성욕을 느끼게 만드는가, 성욕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그렇게 끈적할 수 있을까, 하는 자문에 자답을 거듭하게 되고 어느새 십대 소녀는 성에 집착하고 성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는 성적 인간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잔학기>의 전반부가 게이코가 유괴됐던 열 살 때의 시점에서 진행된다면, 후반부는 고등학생이 된 게이코의 이야기다. 그녀는 현실의 암흑을 잊기 위해 밤의 꿈에 탐닉하게 되고 꿈속에서 이야기를 짓는 데 몰두한다. 겐지와 야타베, 그리고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상상하고 또 상상해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통제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게이코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겪었던 사건에 대해 점차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둘씩 알게 되고, 당연히 그녀의 이야기도 변해 간다. 이 부분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어떻게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소설을 완성해 나가는가 하는 질문의 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기리노 나쓰오의 내밀한 창작의 비결을 슬쩍 털어놓는 것 같아 재미있게 느껴진다.   

 

다른 작가들이라면 처절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던 소녀가 결국 세상과 화해하는 식의 감동적인 결말을 그리겠지만 기리노 나쓰오는 다르다. 한 번 어둠을 맛본 사람은 다시는 빛으로 돌아가지 못하다는 염세적인 세계관과 혼란스런 외부와 내부의 사건을 맞아 조금씩 일그러져가는 정신의 균형, 마음속의 어둠이 불러오는 광기를 극한까지 묘사함으로써 우리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잔혹한 한 순간을 선물한다. 이런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이 너무 어둡고 우울해서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느릿하게 시작하다 점차 속도를 올려서 결말에 이르러 완전히 독자를 압도하는 그녀의 영리함과 칼로 베이는 듯한 느낌까지 주는 날카로운 인간 관계에 대한 통찰력, 날렵하고 빼어난 문장력에 주목한다면, 취향을 떠나 이 일본의 중년 여성작가가 보기 드문 놀라운 실력의 작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손꼽히는 거장이라 그녀의 작품이 속속 영역되고 있지만, 아마도 10년 후쯤에는 전 세계가 그녀의 작품에 찬사를 보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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