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曾孫女)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이 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토요일이었다.
개울가에 이르니, 며칠째 보이지 않던 소녀가 건너편 가에 앉아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소년은 참외 그루에 심은 무우밭으로 들어가, 무우 두 밑을 뽑아 왔다. 아직 밑이 덜 들어 있었다. 잎을 비틀어 팽개친 후, 소녀에게 한 개 건넨다. 소녀는 먼저 대강이를 한입 베물어 낸 다음, 손톱으로 한 돌이 껍질을 벗겨 우쩍 깨문다.
그러나, 세 입도 못 먹고, "아, 맵고 지려." 하며 집어던지고 만다.
"참, 맛없어 못 먹겠다."
그 때, 거웃한 수염의 농부가 지나가며 말한다.
"어서들 집으로 가거라. 소나기가 올라."
참, 먹장구름 한 장이 머리 위에 와 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산을 내려오는데, 떡갈나무 잎에서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목덜미가 선뜻 선뜻했다. 그러자,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
비안개 속에 원두막이 보였다. 그리로 가 비를 그을 수밖에.
오들오들 떨던 소년과 소녀는 비가 그치자 원두막을 나섰다. 시냇가에 도착하자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뛰어 건널 수가 없었다.
소년이 등을 돌려 댔다. 소녀가 순순히 업히었다. 걷어올린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녀는 '어머나'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끌어안았다.
며칠 후, 소년은 자리에 누워서도 같은 생각뿐이었다. 내일 소녀네가 이사하는 걸 가보나 어쩌 나. 가면 소녀를 보게 될까 어떨까.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하는데,
"허, 참 세상일도……."
마을 갔던 아버지가 언제 돌아왔는지,
"윤 초시 댁도 말이 아니야, 재산만 많으면 뭘 하나.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남폿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증손(曾孫)이라곤 계집애 그 애 하나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 애 둘 있던 건 어려서 잃어버리고……."
"어쩌면 그렇게 자식복이 없을까."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아무리 비싼 약을 써도 별무 소용이었다더군. 지금 같아서 윤 초 시네도 대가 끊긴 셈이지.……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 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소년의 말이 모두 끝났다. 허름한 초가집 마루에는 소년과 소년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정운산 형사가 앉아 있었다. 정운산이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니?"
"네."
"정말 더 할 말 없어?"
소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정운산은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잘 들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구나.
그 소녀를 왜 죽였니?"
소년과 그의 부모들의 얼굴에 놀란 빛이 역력했다. 그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정운산은 입을 열었다.
"지금은 9월이란다. 가을 무 철이지. 가을 무는 맛이 올라 달디 달지.
그런데 네가 뽑아준 무를 먹은 소녀는 왜 맵고 지려 했을까? 네가 무언가를
발랐던 거야. 바로 양잿물이지. 네 어머니의 빨래통에서 양잿물을 훔쳐 무에다 바른 후 소녀에게 갖다 준 거지. 당연히 소녀는 맵고 지려 할 수 밖에 없었고..."
소년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소년의 아버지, 어머니는 직감으로 정운산의 말이 사실인 걸 깨달았다. 어머니는 소년의 등짝을 내지르며
"아이고! 이놈아.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질렀어!" 연신 소리지른다.
사실, 정운산도 소년의 범행 동기가 궁금했다.
"아부지가 맨날 윤초시한테 빌빌거리는 게 보기 싫었단 말예요. 걔도 미웠어요. 서울에서 왔다고 잘난 체만 하고...아부지가 만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힘들게 일해도, 우리 집은 가난하기만 한데, 윤초시네는 아무 것도 안 하면서도 우리가 일한 거 다 가져 가는 게 싫었어요."
소년의 아버지가 힘없이 뇌까린다.
"이놈아. 그마나 우리가 먹고 사는 게 다 누구 덕인데. 윤초시님 아니면 우린 다 굶어 죽었어. 인석아."
마침내 정운산이 입을 열었다.
"꼬마야. 소녀가 왜 자기 옷을 같이 묻어달라고 했는 지 알겠니? 소녀는 네 등 뒤에 업혔을 때, 네 등 위에 침을 비롯해 토사물을 흘렸어. 소녀 옷에도 물론 묻었겠지. 나중에 소녀는 병석에 누워 자기가 먹은 무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지. 혹시 옷을 조사해 너의 범행이 발각될까 두려워 한 소녀는 옷을 같이 묻어달라고 했던거야. 그 옷을 영원히 세상에서 없애려고 했던 거지. 소녀는 죽으면서도 너를 지켜주려 했단다..."
소년은 오열했다.
정운산은 한창 아름다울 나이의 소년이 소녀를 죽여야만 했던 불평등의 고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가난과 세습화된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이 소년으로 하여금 무서운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이다.
또한 죽어가면서도 소년만을 생각한 소녀의 가슴아픈 사랑도 그의 마음을 시리게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연한 감상만을 남긴 채, 얄궂은 소나기가 초가집 안마당을 때리기 시작했다.
1953년 거문도에서 있었던 일...
2005년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