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사의 속삭임 1
기시 유스케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바야흐로 여름이 모두 끝나간다. 그런데 곱게는 못 물러가겠다는 듯이 막바지 무더위가 거세다. 이럴 때는 역시 등골이 서늘한 무서운 이야기가 딱이다. 개인적으로 국적 불문하고 책으로 읽은 것 중에 가장 공포스러웠던 건 역시 스즈키 코지의 <링>과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이다. 스즈키 코지가 <링>의 비참한 동어반복으로 스러져 갔다면 기시 유스케는 요즘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제4회 일본호러대상을 받았다는 <검은 집>은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무섭기로 소문난 작품이다. 나도 한동안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할 정도로 공포에 질린 적이 있다. 원래 내가 기가 약하기로 둘 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인지라...쿨럭..
<검은 집> 이외에도 그의 작품은 <푸른 불꽃>과 오늘 소개할 <천사의 속삭임>이라는 작품이 국내 출간되어 있다. <푸른 불꽃>은 보지 못했다. <천사의 속삭임>을 다 읽고는 이렇게 잘쓴 작품이 잘도 묻혀 있구나 하는 분노를 느껴 몇 자 적는다.
<검은 집>만큼 압도적인 공포는 없지만 상당히 무섭고 재미있는 작품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듯 하다. 작품은 다카나시라는 작가가 아마존 오지에서, 말기 환자를 담당하는 의사 애인 사나에에게 보내는 이메일로 시작한다. 원래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했던 다카나시 작가는 아마존 탐험을 마치고 돌아오자 이상하게 죽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가 그는 자살을 해버린다.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 하던 사람이... 또한, 탐험대 중에 한 교수는 고양이과의 동물을 극도로 무서워했는데 일부러 호랑이 우리에 들어가 자살한다.
다섯 명의 탐험대원들에게 이상한 일들이 속출한다. 애인 다카나시 작가를 잃고 슬픔에 잠긴 사나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의문을 느끼고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과연 아마존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건은 점입가경으로 확대되고, 클라이막스에서는 <검은 집>에서 선보인 예의 그 지옥도가 다시 한번 펼쳐 지는데 그야말로 압권이다.
대강의 줄거리도 상당히 흥미진진한 데, <검은 집>에서는 볼 수 없던 잔재미까지 상당 부분 늘어났다. 취재를 상당히 좋아한다는 기시 유스케답게 그리스/로마 신화, 기생충(선충)학, 의학, 증권, 환경 오염 등을 비롯한 다양한 전문 지식을 선보이고 있다. 이런 전문 지식들이 단순한 지식 자랑이 아닌 작품 속에 상당히 잘 녹아들어가 있어 만족스럽다.
기시 유스케를 일본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미래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하다. 단 두편 <검은 집>과 <천사의 속삭임> 밖에는 접해볼 기회가 없었지만 재능이 대단한 것 같다. <푸른 불꽃>이나 <크림존의 미궁>같은 작품들의 소개를 보면 장르도 다양하고 소재도 다채로워 <검은 집>의 성공에 부화뇌동하지 않겠다는 결의와 재기가 엿보인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기시는 작품 말미 클라이막스에 그야말로 공포의 오르가즘을 안겨주는 능력이 있다. 이 작품에서도 절정 부분에서는 정말 책을 넘기기 힘들 정도였다...물론 내가 남들보다 겁이 더 많다는 사실은 감안하시라..^^;;
작품 해설을 보니까 시나 히데아키 (<패러사이트 이브>)가 추천사를 썼는데, 그도 질투가 났을 정도라고 고백을 했더라.. 그런데 <천사의 속삭임>이 나왔을 시점에는 메디컬 호러 내지는 바이오 호러 장르가 세계적으로 유행을 했었다고 한다. <천사의 속삭임>도 일종의 바이오 호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사람이므로, 정말 오싹한 사람이 등장하는 <검은 집>만큼 강력한 공포는 없지만 시종일관 흥미로운 이야기에 적당한 공포를 제공해주는 <천사의 속삭임>은 추천할만한 읽을거리임을 자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