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학기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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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심상치 않은 제목의 <잔학기殘虐記>는 한 통의 편지로 시작된다. 고미 나루미라는 필명으로 16세에 소설을 발표해 천재작가 등장이라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게이코가 돌연 실종되자, 그녀의 남편이 게이코의 담당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게이코는 어린 시절 겪었던 끔찍한 기억을 담은 한 편의 수기 '잔학기'를 남기고 사라졌고, 독자들은 그녀가 남긴 잔학기를 보면서 이제 게이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아무리 담대한 사람도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 그 잔혹한 기억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게이코의 인생이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해는 초등학교 4학년인 열 살 때였다. 그녀는 지방 소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성악 전공자라는 허영심에 젖어 현실 감각이 별로 없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당시에 이미 게이코는 아빠, 엄마가 그다지 별 볼일 없는 속물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리 조숙할 수 있느냐고 묻지 말길. 기리노 나쓰오가 그리는 인물들은 두더지처럼 본능적으로 어둠을 사랑하고, 자석처럼 어둠에 이끌리니까.

 

방과후 집에 돌아오던 길에 게이코는 유괴를 당한다. 그녀를  납치한 건 철공소에서 일하는 겐지라는 사내. 그는 지옥의 밑바닥처럼 소음이 요란한 공장의 2층 자기 방에 게이코를 감금하고는 애완 고양이처럼 '밋치'라는 별명을 지어 부른다.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학대만 받는 인생을 살아온 겐지의 정신은 어딘가 이상하다. 낮에는 보통의 성인 남자로 음습한 성욕에 휘둘리지만, 밤에는 아동용 책가방을 메고 게이코의 친구 노릇을 하며 4학년 아이로 돌아간다. 고아원에서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한 겐지는 4학년이 되고 싶은걸까.

 

겐지와 게이코는 1년을 조금 넘게 기묘한 동거를 계속한다. 게이코는 겐지와 더불어 그 공장의 유일한 종업원이자 겐지를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옆방 남자, 야타베에게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지만 겐지의 주먹맛만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웃음, "야타베 씨는 귀머거리야." 하지만 언젠가는 야타베 씨가 나를 발견하고 구해주리라는 게이코의 희망은 거의 종교적인 믿음의 경지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결국 게이코를 구한 사람은 우연히 겐지의 방을 들여다본 공장 사장 내외.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결국 구출된 게이코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야타베 씨의 방에 들어가본 것이었다. 거기서 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걸 보고 좌절하며 충격을 받는 게이코. 야타베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고 몰래 훔쳐보며 게이코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게이코는 겐지의 손에서 도망쳤지만 한 번 그녀를 손에 넣었던 어둠이라는 존재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그녀를 따라다니며 고통을 선물한다. 열 살 소녀에게 칼날처럼 내리꽂히는 사람들의 편견 섞인 시선, 겐지와 무슨 일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비열한 호기심, 커다란 사건으로 인해 균열을 일으킨 가족 관계 등이 모두 그녀의 삶을 뒤흔들지만 가장 혹독한 붕괴는 그녀 내부에서 일어난다. 무엇이 성인 남자가 열 살 소녀에게까지 성욕을 느끼게 만드는가, 성욕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그렇게 끈적할 수 있을까, 하는 자문에 자답을 거듭하게 되고 어느새 십대 소녀는 성에 집착하고 성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는 성적 인간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잔학기>의 전반부가 게이코가 유괴됐던 열 살 때의 시점에서 진행된다면, 후반부는 고등학생이 된 게이코의 이야기다. 그녀는 현실의 암흑을 잊기 위해 밤의 꿈에 탐닉하게 되고 꿈속에서 이야기를 짓는 데 몰두한다. 겐지와 야타베, 그리고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상상하고 또 상상해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통제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게이코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겪었던 사건에 대해 점차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둘씩 알게 되고, 당연히 그녀의 이야기도 변해 간다. 이 부분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어떻게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소설을 완성해 나가는가 하는 질문의 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기리노 나쓰오의 내밀한 창작의 비결을 슬쩍 털어놓는 것 같아 재미있게 느껴진다.   

 

다른 작가들이라면 처절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던 소녀가 결국 세상과 화해하는 식의 감동적인 결말을 그리겠지만 기리노 나쓰오는 다르다. 한 번 어둠을 맛본 사람은 다시는 빛으로 돌아가지 못하다는 염세적인 세계관과 혼란스런 외부와 내부의 사건을 맞아 조금씩 일그러져가는 정신의 균형, 마음속의 어둠이 불러오는 광기를 극한까지 묘사함으로써 우리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잔혹한 한 순간을 선물한다. 이런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이 너무 어둡고 우울해서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느릿하게 시작하다 점차 속도를 올려서 결말에 이르러 완전히 독자를 압도하는 그녀의 영리함과 칼로 베이는 듯한 느낌까지 주는 날카로운 인간 관계에 대한 통찰력, 날렵하고 빼어난 문장력에 주목한다면, 취향을 떠나 이 일본의 중년 여성작가가 보기 드문 놀라운 실력의 작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손꼽히는 거장이라 그녀의 작품이 속속 영역되고 있지만, 아마도 10년 후쯤에는 전 세계가 그녀의 작품에 찬사를 보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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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 예니체리 부대의 음모
제이슨 굿윈 지음, 한은경 옮김 / 비채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2007년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소설상을 받은 작품. 작가 제이슨 굿윈은 비잔틴 제국과 동양에 관심이 많아 몇 편의 논픽션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소설은 처음이다. 1800년대 초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그리는 일종의 팩션 미스터리로 볼 수 있을 이 작품으로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소설가로 데뷔자하자마자 성공 가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겠다. 수많은 옥석 중에서 고르고 골라 뽑은 수상작은 그만큼 완성도를 보증해준다고도 할 수 있어 실망하는 경우가 적은데, 안타깝게도 이번 작품은 미국추리작가협회의 안목에 솔직히 납득을 하지 못하겠다.

 

추측해보건데, 각고의 노력으로 19세기의 이스탄불을 실감나게 재현한 이 작품의 성취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을까. 과연 이스탄불의 궁정부터 뒷골목까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실제로 보고 온 듯한 작가의 실감나는 묘사와 활달한 필치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지나치게 과도한 감이 있다. 작가후기를 통해 본인도 어느 정도 인정하듯이 아직까지 작가의 장기는 오스만 투르크의 사회나 역사, 문화 등을 알기 쉽게 전하는 것이지 이야기는 아니다. 환관 탐정 야심이 맡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데, 어찌나 이것저것에 대한 설명이 많은지 이제 오스만 제국에서 사람들이 흔히 먹는 요리법과 커피의 유래, 무두질하는 법 등에 대한 설명은 집어치우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외치고 싶어진다.

 

물론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이런저런 지식들을 많이 얻는 걸 좋아하는 분도 많을 테니까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취향이다. 하지만 적어도 미스터리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작품으로서는 단서를 주의 깊게 배치하지 못했고, 야심이 진상을 깨닫는 과정에서도 증거가 부족했으며(특히 할렘에서 일어난 보석 도난사건과 살인사건), 사건이 풀려가는 대부분의 과정이 우연에 의지하고 있고, 중요하게 등장하는 일종의 암호같은 시도 아무 설명없이 그냥 사라진다. 그 시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한 독자들은 당연히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미스터리를 처음 써본 작가가 애거서 크리스티 영화를 많이 만든 제작자 등의 조언을 받아 집필했다고 하는데, 다음 작품을 쓰기 전까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세 번쯤 더 통독하기 바란다.

 

다만 그래도 이 책을 끝까지 읽었던 것은 예니체리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1400년대부터 400년간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이끈 특수부대였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그들은 당연히 부패하게 되고 결국 나라를 좀 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결국 서양식 군대를 양성한 술탄은 예니체리의 막사를 포격하고, 훗날 '신성한 날'이라고 명명되는 그날 예니체리의 영욕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야 말았다. 이 책은 예니체리가 몰살되고 10년 후에 시작된다. 어느 날 예니체리를 물리친 서양식 신위병 군대의 장교 4명이 실종되고 도시 곳곳에서 한 명 한 명씩 시체로 발견된다. 술탄의 할렘 궁정에서는 술탄의 모후 발리데의 보석이 사라지고, 왕의 여자 한 명이 목졸려 죽는다. 안팎으로 시끄러운 이 사건들을 해결할 사람은 비록 없이 살지만 약삭빠르고 능력있는 환관 탐정 야심뿐.

 

남성적 가치관이 지배했던 19세기 동양에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환관은 멸시받는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움츠러들지 않고 기운차게 살아가는 야심의 배짱과 유머는 보기 좋다. 간단히 말해 야심의 인간적인 매력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사회상에 우선을 둔다면 만족스런 독서가, 반전이나 미스터리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저 그런 작품이니 자신의 기호와 취향을 잘 판단하고 선택해서 즐거운 독서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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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사랑 - 다섯 영혼의 몽환적 사랑 이야기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인상깊게 읽은 [꽃밥]의 작가 슈카와 미나토의 신작이라 큰 기대를 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읽어보았다. 작가는 [꽃밥]으로 2005년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일본에서 호러소설 작가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인데, 막상 작품을 보면 그다지 공포스럽지는 않다. 괴이하고 신비한 이야기 혹은 약간 소름끼치는 이야기 정도로 볼 수 있을 텐데, 일본의 오랜 기담, 괴담 문학 전통의 계승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제법 아니 꽤 잘 쓰는 작가다. 다소 노골적인 제목, [새빨간 사랑]을 달고 나온 이 단편집은 버려진 마론 인형처럼 처연한 느낌을 주는 금발머리 소녀가 표지를 장식한다. 과연 이 소녀는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지 절로 궁금해진다.

 

<영혼을 찍는 사진사>는 투병 중인 동생이 결국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자 절망하는 언니가 주인공이다. 이제 갓 스물인데 한 순간도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동생의 운명에 슬퍼하는 언니를 보다 못한 그녀의 남자친구가 묘한 정보를 가져오는데, 죽은 사람을 예쁘게 장식한 다음 사진 속에 담아 내내 아름다운 모습으로 망자를 추억하게끔 한다는 장의사가 있단다. 언니는 결국 장의사와 연락해 동생이 결코 입어볼 수 없었던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동생을 잘 돌봐주던 간호사가 집으로 찾아오고 그 장의사와 관계된 무서운 비밀을 털어놓는다. 공포영화나 소설을 많이 본 분들이라면 대개 아시겠지만 이쪽 장르, 은근히 교훈적이다. 청춘 난도질 호러 영화가 난잡한 성관계를 즐기는 10대들이 주로 당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공포 영화의 피해자는 금기를 어기는 사람들이다. <영혼을 찍는 사진사>의 교훈은 망자는 기억 속에 아름답게 묻어야지 너무 과도한 애도의 표현은 좋지 않다, 뭐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독특한 소재와 분위기가 몰입감을 더해주지만 결말은 조금 아쉽다.

 

<유령소녀 주리>는 제목에 상당한 스포일러가 있다. 은둔형 외톨이처럼 방에만 틀어박혀 학교도 가끔 가는 한 소녀가 있다. 엄마의 푸념에 견디다 못해 모처럼 학교를 나가는데, 이게 웬 일 학생들이 그녀를 보지 못하네. 알고보니 그녀는 진짜 유령소녀였다. 누군가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다. 살아 있을 때는 뭐든지 귀찮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다시 올 수 없는 순간들이 그립기만 할뿐이다. 어떤 순간에도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그녀에게 정말 모든 걸 바쳐서라도 해내고 싶은 일이 생기지만 실체가 없기에, 만질 수 없기에 결국 실패하고 만다. 책에서 묘사되는 이 순간의 절망감은 너무 아프게 느껴져 지금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혹시 있다면 이 단편을 보라고 권해주고 싶을 정도다. 괴로워도 슬퍼도 살아 있어야 남도 돕고 자신도 도울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고 보니 이 단편에도 교훈이 있는걸.

 

<레이니 엘렌>은 미스터리 팬들을 열광으로 몰아넣었던 기리노 나쓰오의 [그로테스크]와 같은 소재를 그린다. 대기업을 다니는 미모의 여사원이 밤에는 매춘을 일삼다 피살되어 일본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바로 그 사건. 일단 기리노 나쓰오가 그토록 멋지게 요리해낸 소재를 또 한 번 다룬다는 것 자체가 작가의 두둑한 배짱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어차피 장르가 완전히 다르니까 부담은 약간 적었을 것이다. 러브호텔 밀집지역에서 채팅으로 만난 두 중년남녀, 싸구려 잠자리를 준비중이다. 남자는 대학교 때 만나 짝사랑했던 같은 과 여자친구를 회상한다. 그 여자친구와는 맺어지지 못했지만 그후 매스컴을 통해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된다. 미모의 커리어우먼이자 매춘부가 된 여자친구는 결국 밤거리를 떠돌다 목 졸려 살해되고 말았다. <레이니 엘렌>에서는 러브호텔 거리를 가득 메운 풍선을 통해, 이 도시를 부유하는 정체불명의 욕망을 그린다. 우리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을 바로 그 욕망을.

 

<내 이름은 프랜시스>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단편이었다. 마치 에도가와 람포를 연상케 하는 이상성욕을 소재로 다룬 작품인데, 화자인 젊은 여성이 중학교 때 스쳐 지나간 같은 반 여자친구에게 테이프를 녹음해 보내면서 그녀의 목소리로만 진행되는 특이한 설정이다. 이단 종교에 매몰된 가족을 둔 그녀의 최대 고민은 원인 모를 도벽이다. 어떻게도 참을 수 없는 이 도벽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도쿄로 도망을 치게 되고 몸을 팔면서 생활한다. 매춘 생활 중 만난 남자는 유달리 신사적이고 성품이 훌륭하지만 한 가지 기묘한 요구를 하는데...끈적끈적한 분위기와 기묘한 인간군상들,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변태성욕을 그려 독자를 훌륭하게 빨아들인다.

 

<언젠가 고요의 바다에>는 소품이다. 초등학생 남자 주인공이 우연히 젊은 남자와 알게 된다. 그의 집에는 지구의 누구도 보지 못했던 기묘한 어떤 것이 살고 있는데, 그 생물(?)을 키우는 데는 품이 무척 많이 든다. 이 작가는 [꽃밥]에서 '요정생물'이라는 정체불명의 생명체에 집착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근사하게 지은 바가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름다운 그 생물(?)에 홀려 생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짤막하게 수록작을 살펴보았다. 작품들이 일정 수준 이상은 전부 되어 있고, 내용도 다 재미있어 금세 읽힌다. [꽃밥]과 비슷하게 공포와 사랑, 에로틱한 정서, 욕망 등의 내밀한 인간 본성을 그리는 것도 인상적이다. 다만 [꽃밥]의 이야기들은 전부 유년시절의 풍경을 담아내 어딘지 아련한 느낌이 좋고 우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면이 있는데, 성인들이 주인공인 [새빨간 사랑]은 그만큼 노골적이라 약간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판정은 [꽃밥]이 위다. 하지만 둘 다 재미있다. 지루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이야기를 애타게 찾고 있는 독자라면 슈카와 미나토라는 이름을 기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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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5-23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밥을 읽어야겠군요. 그나저나 그로테스크와 같은 소재는 정말 님 말씀처럼 작가의 배짱인것같네요^^

jedai2000 2007-05-24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밥>이 더 좋습니다. <그로테스크>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고 당시 사건이 워낙 충격적이긴 했나 봐요 ^^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
나가시마 유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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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인 나가시마 유의 2005년도 작품으로 두 개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다. 평소에 순문학을 거의 읽지 않는데도 200쪽 남짓한 페이지도 부담이 없고, 또 너무 미스터리에만 편향된 독서를 하는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책을 잡았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표제작인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무쓰미라는 한 평범한 직장 여성이 직장 동료를 알게 되고 서서히 그가 마음속에 자리잡지만 결국 바라만 보다 끝나는 짝사랑 이야기인데 커다란 드라마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들이 영화처럼 우연과 우연이 겹쳐 결국 인연으로 맺어지는 드라마틱한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좋아하게 되는 과정도 그냥 미소지을 때 어쩐지 쓸쓸함이 감도는 옆얼굴이 마음에 들더라, 하는 식의 소박한 이유가 대다수다.

 

이 작품에서 무쓰미가 남자 동료에게 처음 마음을 주게 되는 순간은 그가 노래방에서 자메이카의 레게 아티스트 밥 말리의 <No Woman No Cry>를 부르는 걸 보고 나서부터다. 일단 노래 자체도 무난한 히트곡이 아니고 시쳇말로 뭔가 있어 보이는 노래인데다가, 다른 사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자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라고 해석될 그 제목을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라고 말하는 그 남자가 신비하게 느껴진다. 사실 남자가 무식해서 제목을 잘못 해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는 그런 무난한 이유는 통하지 않는다. 왜 이 남자는 그렇게 해석한 것일까, 혼자 상념에 상념을 거듭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보기도 하며 설레여 한다. 누구나 노래방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왜 이 노래를 불렀을까, 무슨 뜻일까 하며 혼자 갖은 상상을 하며 괜히 흐뭇해지고 때로 쓸쓸해하며 망상에 빠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대다수의 사랑을 현실적으로 절묘하게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무쓰미의 내밀한 심리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작가는 결국 말하지 못하고 남자를 떠나보내는 여자의 절망을 극적으로 그리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관찰할 뿐인데 그래서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도 무쓰미에게 애정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여자도 모르고, 작가도 모르고, 독자도 모른다.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의 에피소드처럼 내일이면 다시 만나지 못할 이별을 속으로만 삭이는 무쓰미의 모습이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이외에도 현대의 직장 여성으로서 출퇴근 시간과 일하는 과정 속에서 무쓰미가 느끼는 여러 가지 단상도 비슷한 삶을 사는 독자들에게 큰 공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뱀처럼 긴 줄을 이루며 출근하는 사람들, 서로 알지 못하기에 나란히 서지 못하고 앞뒤로 서서 행렬을 이룬다. 하나로 길게 이어져 있지만 실상은 단절되어 있다. 어느 비오는 날 출근길에 땅바닥에 덮여 있는 나무판자를 누군가 물이 튀기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깔아두었다는 걸 깨닫고 감동받는 무쓰미. 역시 우리는 선의로 이어져 있어, 라고 기뻐하지만 그 감격을 이야기할 상대는 출근길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역시 없다. 결국 혼자인 것이다. 아마 나를 비롯해 이 에피소드에 공감할 독자들이 무척 많을 거라 믿는다.

 

'센스없음'은 표제작보다 더 인상적이고 더 기억에 남는다. 남편이 바람이 났다는 걸 발견한 아내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집안 정리를 한다. 남편이 빌려놓은 성인비디오를 반납하지 않으면 연체료가 쌓이는 걸 알고는 비디오를 갖다주러 대여점이 있는 역까지 걷는다. 남편이 그동안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던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 눈내린 거리를 사진에 담으며 그저 걷는다. 결국 파국으로 끝난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느껴지는 환멸감과 곧 헤어질 거면서 남편의 성인비디오를 갖다주기 위해 걷는 상황의 묘함, 오랜만에 눈길을 걸으며 떠오르는 예전 학창시절의 달콤씁쓸한 기억까지 여자의 혼돈스런 사고가 내내 이어진다. 역시 끝까지 큰 사건은 없고 그저 걸을 뿐인 한 여자의 내면을 따라가는 작품인데도 여운이 굉장히 크고 깊다. 나가시마 유의 작품은 처음 읽어봤지만 담백한 심리 묘사와 현실적이면서도 뭔가 마음을 적시는 여운에 깊이 탄복하고 말았다. 재미로 보는 소설은 아니지만 가끔씩 이런 풍의 소설을 읽으며 마음에 비를 내리게 하는 경험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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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검시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반가운 작가의 반가운 작품입니다. 이미 국내에 [사라진 이틀]과 [클라이머즈 하이]가 소개된 요코야마 히데오의 미스터리 연작 단편집으로 미스터리 팬이라면 아주 반색을 할 만한 작품이라고 보증합니다. 사실 요코야마 히데오가 일본에서의 명성이나 판매에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에서 많이 평가절하된 게 사실인데, 앞서 나온 두 작품이 미스터리보다는 '감동'에 무게가 실린 작품이고, 또 중반부까지의 놀라운 재미에 비해 결말이 좀 급작스럽고 서둘러 감동 한 마당으로 마무리되는 경향이 있어 시작부터 결말까지 완벽하게 뛰어난 작품만을 사랑하는 한국 독자들의 한뼘 높은 눈높이를 통과하지 못한 경향도 있긴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멋진 작품'에서 '앞부부만 완벽한 작품'. '끝이 좋으면 다 좋은 작품', '끝은 아쉽지만 정말 재미있는 작품'까지 전부 좋아하는 제게는 요코야마 히데오는 최고의 스토리텔러로 남아 있지만 말예요. 결말이 좀 아쉽더라도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비할 데 없이 재미있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결말만 약간 시시하다고 "쓰레기네, 형편없네" 하고 말아버린다면 끝까지 책을 읽느라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너무 비참해질 테니까요.

 

[종신검시관]을 읽고 든 생각은 어쩌면 요코야마 히데오는 단편에 더 맞는 작가가 아닐까 하는 것과 한국에서는 오히려 그의 단편이 더 먹히겠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편에서 거대한 이야기를 주체 못해 다소 작위적인 감동으로 맺는 것보다, 짧지만 집중력 있는 이야기를 스트레이트하게 펼쳐 보이며 완벽하게 마무리짓는 단편들은 작가에게 낙인처럼 따라다니는 결말의 약점을 지적할 수 없게 만듭니다. 더구나 [종신검시관]은 우리 미스터리 팬들이 무척 좋아하는 퍼즐 풍의 본격 미스터리죠. 예전 좋았던 시절의 명탐정의 풍모를 재현하는 검시관 구라이시 요시오가 시체 검시 현장에서 발견한 단서를 바탕으로 명추리를 전개해 수사관들이 내놓은 결론을 뒤짚고 진짜 범인을 찾아내는 구성으로 전개되는 8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종신검시관' 구라이시는 L현경 수사과에서 매우 특이한 존재입니다. 경찰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보직 변경을 피할 수 없지만 그만은 예외입니다. 경찰 생활의 시작부터 끝까지 검시관으로만 활약해 명예로운 종신검시관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워낙 검시 능력이 뛰어나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그동안 맡은 사건을 퍼펙트하게 처리해낸 게 종신검시관이 된 가장 큰 이유지만, 상사한테도 거침없이 반말을 날리며 말도 안 되는 명령은 그냥 무시하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안하무인에 독불장군이라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야쿠자 같은 행동에 보스 기질이 있어 젊은 수사과들이 그를 선생님처럼 몹시 따라 별명도 '교장 선생님'이고 그 구라이시 스쿨의 수많은 제자들이 몸바쳐 그에게 충성하기 때문에, 또 높으신 분들도 그를 아끼기 때문에 그의 위치는 여지껏 무풍지대입니다. 이 작품집에서는 구라이시와 함께 일하게 된 다른 등장인물들의 눈을 통해 그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몇몇 단편에서는 거의 몇 장면 나오지도 않지만 워낙 매력적인 캐릭터라 그의 카리스마가 작품 전체를 압도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느낌마저 듭니다.

 

8편의 미스터리는 일본어를 아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암호나 트릭을 만들기 위해 다소 억지스런 상황을 설정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무리없이 짜여져 있습니다. 첫번째 수록작인 <붉은 명함>은 고전기의 본격 미스터리가 연상되는 단순하지만 깔끔한 트릭이라 권할 만한데, 무엇보다 최고작은 4번째 작품 <전별>입니다. 이야기는 은퇴를 며칠 앞둔 형사부장이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십여 년 전부터 여름과 겨울에 날아오던 연하장이 갑자기 끊기자 궁금해한다는 사소한 에피소드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형사부장의 알려지지 않은 과거를 바탕으로 구라이시가 조사해 밝혀낸 진실은 절로 눈물이 터지는 감동스런 비밀을 안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뚝뚝하게만 보였던 구라이시의 인간적인 면모가 슬쩍 나타나는 이 단편은 긍지와 사명감을 가지고 평생을 봉사한 노형사들의 우정과 애틋한 모정이 함께하며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줍니다. 이 단편 하나만으로도 만족할 독자들이 많이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결코 편견에 휘둘리지 않은 채 양옆 시야가 가려진 경주마처럼 증거만 주시해 진실과 대면하는 구라이시의 전문가적인 면모에 빠질 수도 있고, 거칠과 투박한 말과 무뚝뚝한 행동으로 속마음을 감추지만 큰 못이 언젠가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것처럼 어느새 작품 전체를 포근히 감싸는 구라이시의 인간적인 매력에 포로가 될 수도 있으며, 책 속에 제시된 단서를 잘 분석해 범인을 맞추는 순수한 추리소설적인 즐거움도 얻을 수 있습니다. 미스터리의 범주 안에서 이렇게 만족스런 단편집은 근래 별로 나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시간과 여유가 되시는 분들은 꼭 구라이시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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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1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리뷰를 읽다가 왔습니다. 정말로 제가 참조할 만한 글들이 많이 있어서 즐찾 등록합니다. 다시 와서 찬찬히 읽겠습니다 ^^

jedai2000 2007-07-02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갑습니다. 저도 즐찾 등록할게요.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읽을 만한 것들이 몇 개는 될 거예요.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