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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사랑 - 다섯 영혼의 몽환적 사랑 이야기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인상깊게 읽은 [꽃밥]의 작가 슈카와 미나토의 신작이라 큰 기대를 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읽어보았다. 작가는 [꽃밥]으로 2005년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일본에서 호러소설 작가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인데, 막상 작품을 보면 그다지 공포스럽지는 않다. 괴이하고 신비한 이야기 혹은 약간 소름끼치는 이야기 정도로 볼 수 있을 텐데, 일본의 오랜 기담, 괴담 문학 전통의 계승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제법 아니 꽤 잘 쓰는 작가다. 다소 노골적인 제목, [새빨간 사랑]을 달고 나온 이 단편집은 버려진 마론 인형처럼 처연한 느낌을 주는 금발머리 소녀가 표지를 장식한다. 과연 이 소녀는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지 절로 궁금해진다.
<영혼을 찍는 사진사>는 투병 중인 동생이 결국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자 절망하는 언니가 주인공이다. 이제 갓 스물인데 한 순간도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동생의 운명에 슬퍼하는 언니를 보다 못한 그녀의 남자친구가 묘한 정보를 가져오는데, 죽은 사람을 예쁘게 장식한 다음 사진 속에 담아 내내 아름다운 모습으로 망자를 추억하게끔 한다는 장의사가 있단다. 언니는 결국 장의사와 연락해 동생이 결코 입어볼 수 없었던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동생을 잘 돌봐주던 간호사가 집으로 찾아오고 그 장의사와 관계된 무서운 비밀을 털어놓는다. 공포영화나 소설을 많이 본 분들이라면 대개 아시겠지만 이쪽 장르, 은근히 교훈적이다. 청춘 난도질 호러 영화가 난잡한 성관계를 즐기는 10대들이 주로 당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공포 영화의 피해자는 금기를 어기는 사람들이다. <영혼을 찍는 사진사>의 교훈은 망자는 기억 속에 아름답게 묻어야지 너무 과도한 애도의 표현은 좋지 않다, 뭐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독특한 소재와 분위기가 몰입감을 더해주지만 결말은 조금 아쉽다.
<유령소녀 주리>는 제목에 상당한 스포일러가 있다. 은둔형 외톨이처럼 방에만 틀어박혀 학교도 가끔 가는 한 소녀가 있다. 엄마의 푸념에 견디다 못해 모처럼 학교를 나가는데, 이게 웬 일 학생들이 그녀를 보지 못하네. 알고보니 그녀는 진짜 유령소녀였다. 누군가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다. 살아 있을 때는 뭐든지 귀찮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다시 올 수 없는 순간들이 그립기만 할뿐이다. 어떤 순간에도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그녀에게 정말 모든 걸 바쳐서라도 해내고 싶은 일이 생기지만 실체가 없기에, 만질 수 없기에 결국 실패하고 만다. 책에서 묘사되는 이 순간의 절망감은 너무 아프게 느껴져 지금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혹시 있다면 이 단편을 보라고 권해주고 싶을 정도다. 괴로워도 슬퍼도 살아 있어야 남도 돕고 자신도 도울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고 보니 이 단편에도 교훈이 있는걸.
<레이니 엘렌>은 미스터리 팬들을 열광으로 몰아넣었던 기리노 나쓰오의 [그로테스크]와 같은 소재를 그린다. 대기업을 다니는 미모의 여사원이 밤에는 매춘을 일삼다 피살되어 일본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바로 그 사건. 일단 기리노 나쓰오가 그토록 멋지게 요리해낸 소재를 또 한 번 다룬다는 것 자체가 작가의 두둑한 배짱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어차피 장르가 완전히 다르니까 부담은 약간 적었을 것이다. 러브호텔 밀집지역에서 채팅으로 만난 두 중년남녀, 싸구려 잠자리를 준비중이다. 남자는 대학교 때 만나 짝사랑했던 같은 과 여자친구를 회상한다. 그 여자친구와는 맺어지지 못했지만 그후 매스컴을 통해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된다. 미모의 커리어우먼이자 매춘부가 된 여자친구는 결국 밤거리를 떠돌다 목 졸려 살해되고 말았다. <레이니 엘렌>에서는 러브호텔 거리를 가득 메운 풍선을 통해, 이 도시를 부유하는 정체불명의 욕망을 그린다. 우리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을 바로 그 욕망을.
<내 이름은 프랜시스>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단편이었다. 마치 에도가와 람포를 연상케 하는 이상성욕을 소재로 다룬 작품인데, 화자인 젊은 여성이 중학교 때 스쳐 지나간 같은 반 여자친구에게 테이프를 녹음해 보내면서 그녀의 목소리로만 진행되는 특이한 설정이다. 이단 종교에 매몰된 가족을 둔 그녀의 최대 고민은 원인 모를 도벽이다. 어떻게도 참을 수 없는 이 도벽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도쿄로 도망을 치게 되고 몸을 팔면서 생활한다. 매춘 생활 중 만난 남자는 유달리 신사적이고 성품이 훌륭하지만 한 가지 기묘한 요구를 하는데...끈적끈적한 분위기와 기묘한 인간군상들,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변태성욕을 그려 독자를 훌륭하게 빨아들인다.
<언젠가 고요의 바다에>는 소품이다. 초등학생 남자 주인공이 우연히 젊은 남자와 알게 된다. 그의 집에는 지구의 누구도 보지 못했던 기묘한 어떤 것이 살고 있는데, 그 생물(?)을 키우는 데는 품이 무척 많이 든다. 이 작가는 [꽃밥]에서 '요정생물'이라는 정체불명의 생명체에 집착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근사하게 지은 바가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름다운 그 생물(?)에 홀려 생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짤막하게 수록작을 살펴보았다. 작품들이 일정 수준 이상은 전부 되어 있고, 내용도 다 재미있어 금세 읽힌다. [꽃밥]과 비슷하게 공포와 사랑, 에로틱한 정서, 욕망 등의 내밀한 인간 본성을 그리는 것도 인상적이다. 다만 [꽃밥]의 이야기들은 전부 유년시절의 풍경을 담아내 어딘지 아련한 느낌이 좋고 우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면이 있는데, 성인들이 주인공인 [새빨간 사랑]은 그만큼 노골적이라 약간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판정은 [꽃밥]이 위다. 하지만 둘 다 재미있다. 지루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이야기를 애타게 찾고 있는 독자라면 슈카와 미나토라는 이름을 기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