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불 블랙 캣(Black Cat) 22
C. J. 샌섬 지음, 이기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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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년 전부터 추리소설의 폭넓은 출간 열기로 인해 수많은 추리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영미, 일본, 프랑스나 독일처럼 나라도 다양하고, 퍼즐, 스파이, 하드보일드, 스릴러 등 장르도 천차만별이죠. 이중에서 역사 추리소설은 멀게는 <장미의 이름>부터 최근의 <다빈치 코드>(팩션이지만 팩션도 넓게 보면 역사 추리소설의 범주에 들어가겠죠?)까지 간간이 슈퍼 베스트셀러가 되곤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소설을 보면서 단순한 재미를 넘어 뭔가 얻어가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군요. 심심풀이로 소설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역사에 대한 몇 가지 지식을 얻는 걸로, 그냥 하릴없이 소설 보면서 시간 때운 게 아니라는 변명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요? 제 생각에는 소설에서 재미만 얻어도 충분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 독자들은 지나치게 깐깐한 거 같네요^^ 

 
그런데 역사 추리소설을 통해 실제로 얼마나 많은 걸 얻을 수 있나를 생각해보면 약간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아시다시피 역사라는 건 어느 특정한 시대의 의복이나 음식 같은 미시적인 부분이든, 정치, 경제 같은 복잡한 것들이든 제대로 다루자면 책 한 권 분량은 훨씬 넘게 필요할 테니까요. 그러니 기둥 줄거리가 따로 있는 소설에서 제아무리 깊이 있게 역사를 그리려고 발버둥쳐봐야 결국은 단순한 배경 노릇밖에 못하게 되지요. 일종의 주마간산이라고 할까요.  물론 '역사 추리소설'에서의 '역사'가 공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읽어봐야 소용없다, 앞으로 읽지 마라, 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주장은 그래도 안 읽는 것보단 읽는 게 낫다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 제가 <수도원의 죽음>이나 <어둠의 불>을 읽지 않았더라면 중세 영국에서 있었던 수도원 해산이나 비서장관 토머스 크롬웰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을 텐데, 이 책들을 읽음으로써 그래도 단편적으로나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으니 약간의 수확은 되는 셈이지요. 결론적으로 잘쓴 역사 추리소설은 재미와 더불어 미약하나마 소득도 얻을 수 있으니 평이 좋은 놈으로다가 골라서 많이들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C. J. 샌섬의 '매튜 샤들레이크 시리즈'는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헨리 8세 치하를 배경으로 합니다. 헨리 8세는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을 하고, 앤 불린과 재혼하고 싶어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이혼이 허락되지 않죠. 헨리 8세는 왕이 되서 이혼도 못하고 살 바에는 차라리 교황으로부터 독립하고 내가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겠다, 고 결심하고 영국국교회를 성립합니다. 이 선언이 바로 유명한 '수장령'입니다. 그동안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받는 영국 내 가톨릭 성직자들의 탐욕과 전횡에 불만이 많던 개혁 세력은 이러한 왕의 독립 결심을 이용하여 위세가 당당한 가톨릭 성직자들의 직위를 해제하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일에 나서게 되죠. 이것을 역사적으로는 '수도원 해산(Dissolution)'이라고 부른답니다. 수도원 해산을 주도한 개혁파의 우두머리가 비서장관 토머스 크롬웰입니다. 크롬웰은 거대한 영국의 수도원들을 하나씩 해체하고 재산을 국고로 환수시키는 일에 여념이 없는데, 그 과정 중에 스칸시 수도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자신의 심복인 곱추 변호사 매튜 샤들레이크를 파견해 사건을 해결하라고 명합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시리즈 1권 <수도원의 죽음>의 줄거리로, 토머스 크롬웰과 수도원 해산은 실제고, 매튜 샤들레이크와 스칸시 수도원의 살인사건은 가상입니다.
 

이 정도만 알아두면 시리즈 제2작 <어둠의 불>을 읽기에 충분합니다. 전작에서 토머스 크롬웰과 사이가 벌어진 샤들레이크는 런던에서 평범한 변호사로 살아가는데, 사촌 남동생을 살해한 죄로 체포된 엘리자베스라는 소녀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그러나 소녀가 법정에서 결코 입을 열지 않고 증언을 거부하자, 판사는 무거운 돌을 배에 얹어 척추를 부러뜨려 죽이는 압살형을 선고합니다. 과연 중세는 사람 목숨을 목숨으로 보지 않던 시대에 틀림이 없군요. 그때 안 태어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토머스 크롬웰의 명령에 따라 압살형은 2주간 연기되는데, 그는 샤들레이크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소녀의 죽음을 2주간 연기해줬으니, 그 기간 동안 소녀의 무죄를 증명할 증거를 찾아보게나. 그 대신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게.' 크롬웰의 부탁이란 과거 비잔틴 제국에서 이슬람의 전함을 불태웠던 '그리스의 불'이라는 화염 무기를 찾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헨리 8세는 그리스의 불 이야기를 듣고는, 2주 안에 그것을 찾아 대령하라고 크롬웰에게 명을 내린 상태입니다. 만약 그리스의 불을 찾지 못하면 크롬웰은 몰락할 것이 분명합니다. 샤들레이크는 단 2주라는 짧은 시간 안에 영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크롬웰을 무너뜨리려는 정치 세력들의 방해 공작을 피해 그리스의 불을 찾아야 하는 난해한 미스터리를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의 죽음>은 616페이지, <어둠의 불>은 670페이지로 어마어마한 분량의 압박에 읽는 과정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하겠습니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남은 분량을 확인하기 일쑤였으니까요. 원래 샌섬은 역사 공부를 한 사람이라는데, 학자 출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필력이 좋은 작가입니다. 어려운 표현이나 상징은 최대한 배제하고, 가급적 쉬운 묘사나 표현, 비유를 써서 크게 막히는 부분없이 술술 잘 읽힙니다. 다만 이 작가는 주인공의 행적을 거의 시간대 별로 상세하게 그리는 버릇이 있어 분량이 지나치게 많아지죠. 누굴 만나러 갔다가 허탕치고 그냥 돌아온 얘기라면, 다른 작가는 "나는 A를 만나러 갔지만 자리에 없어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한 줄로 끝낼 겁니다. 그러나 샌섬은 A를 만나러 가는 길에 본 런던의 풍경이나 저잣거리의 물건 등을 세세하게 짚어주기에 필연적으로 페이지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야기를 앞으로 진행시켜 나가는 효율성의 관점에서는 빵점이라고 하겠지만, 중세 런던의 시대 분위기나 정취를 느끼고 싶은 독자에게는 매력적인 장면들일 테니, 아무래도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른 평가가 나올 듯하네요.


또한 순수하게 추리소설만의 기준을 적용했을 때, 미스터리 구조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약점도 눈에 띕니다. 두 개의 사건은 비교적 처음부터 범인이 뻔하게 드러나고, 아예 용의자들 자체도 몇 명 없어요. 사건 해결에 필요한 단서들을 모으는 과정도 우연에 의지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샤들레이크야 중세인이니 이 책의 핵심 미스터리인 그리스의 불의 정체를 당연히 모르겠지만, 현대인인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뻔하고요. 칠흑같이 시꺼만 색에 자그마한 불씨라도 닿으면 큰불로 번지는 액체. 더구나 로마에서는 만들 수 없었지만, 비잔틴 제국에서는 만들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독자 누구나 아는 건데, 정작 주인공들은 몰라서 계속 헤매니 답답함만 가중될 따름입니다(샤들레이크는 중세 유럽인이기에 지식의 한계가 있지만 독자들은 아니니까요). 

 
솔직히 길기만 하고 지루한데다 추리소설적인 재미까지 별로니 별 세 개, 평작 정도로 평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는데, 막상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는 평가가 확 달라지더군요. 실제 일어났던 역사의 빈 공간 속에 흥미로운 가상의 이야기를 위화감없이 맛깔나게 버무린 필력이 일단 감탄스럽고요. 한때 개혁 세력의 일원이었던 주인공 샤들레이크가 자신들의 개혁이라는 것도 사실은 끝없는 정치투쟁의 악순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 또 자신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고통받는 서민 한 명 한 명을 성심성의껏 돕는 역할을 하면서 이 사악한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로잡겠다는 결심을 하는 결말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역사 '추리소설'보다는 비교적 상류층이라도 곱추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마음 한구석에 열등감을 안고 사는 샤들레이크 변호사의 영혼의 성장기로 읽으면 더 흥미로울 소설입니다. '살인과 폭력이 횡행하는 암울한 시대에 주인공 샤들레이크의 정직함과 인간미가 빛난다'라고 평한 추리소설 거장 콜린 덱스터의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는 함께 개혁의 꿈을 꾸고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해 청춘을 바쳤지만 여러 한계로 결국 몰락해버린 옛 동지를 향해 피를 토하듯 하는 샤들레이크의 절규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먹먹한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 느낌을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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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합
타지마 토시유키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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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직장인이 가장 부러워하는 학생의 특권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역시나 방학이 떠오른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두 달 가까이 통째로 쉬면서 마음껏 뛰어놀기도 하고, 하릴없이 방 안에 뒹굴뒹굴 누워 지낼 수 있는 방학은 학생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호사가 아닐까. 그런데 경험상 방학이라고 늘 기분 좋은 순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 초등학교 몇 학년 여름방학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님이 나를 시골 외가댁에 한 달가량 머물게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엄마가 모처럼 손이 많이 가는 날 돌보는 일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런 계략(?)을 꾸민 게 아닌가 싶은데, 외삼촌들은 전부 대학생이라 말도 안 통하고 또 엄마가 장녀인 탓에 당시에는 이모네 아들딸들은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같이 놀 또래 하나 없는 시골에서 한 달을 버티려니 숫제 죽을 맛이었다. 당시 시골집 평상에 누워 하루하루 시간만 죽이며 눈물 짓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운 좋게도 <흑백합>의 주인공 스스무는 나 같은 고문을 당할 필요가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1952년 현재, 스스무는 도쿄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열네 살 소년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아버지의 옛 동료에게 초대를 받아 그 아저씨의 오사카의 롯코 산 별장에서 한 달간 머물게 된다. 아저씨에게는 스스무와 동갑내기인 카즈히코라는 아들이 있어, 둘은 금세 친해진다. 두 친구는 롯코 산 이곳저곳을 탐험하며 매일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어느날 표주박 연못이라는 곳을 갔다가 거기서 자신을 '연못의 요정'이라고 주장하는 아름다운 한 소녀를 만난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는 스스무, 카즈히코와는 달리 카오루라는 소녀는 오사카에서도 유명한 부잣집의 고명딸. 그 나이에 신분이나 재산의 격차 따위가 무슨 의미람. 세 동갑내기 소년소녀는 매일같이 롯코 산을 누비며 점점 가까워지는데, 안타깝게도 스스무와 카즈히코가 하필 둘다 카오루에게 반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긴다. 둘 중의 한 명은 쓰디쓴 눈물을 흘려야 하잖아.

 

가본 적은 없지만 작가의 생생한 묘사 덕분에 수려한 풍광이 눈에 보일 듯 선명한 롯코 산을 배경으로 소년소녀의 풋사랑이 펼쳐진다. 고전적인 애정의 삼각 관계라 뻔하다고 생각할 독자들이 있겠지만, 삼각 관계의 당사자들이 딱 그 나이 대 소년의 행동과 사고를 보여 사랑에 미숙했던 어린 날의 추억도 떠오르는가 하면, 흡사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를 보는 듯한 애틋함과 아련함이 있다. 삼각 관계의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오해하다가 잠 못 들지 못하는 밤이 계속되기 일쑤인 법. 예컨대 두 소년은 카오루의 집에 초대되어 그녀의 방에서 놀게 된다. 의자가 하나밖에 없어 카오루는 스스무에게는 자신이 평소에 쓰는 의자를 주고, 카즈히코에게는 고모의 화려한 벨벳 의자를 가져다준다. 스스무는 훨씬 좋은 고모의 의자를 카즈히코에게 준 것을 그녀가 카즈히코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열등감에 빠지지만, 카즈히코는 평소에 카오루가 쓰는 의자를 스스무에게 준 것을 두고 그녀가 스스무를 더 스스럼없이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좌절한다. 분명 카오루는 별 생각없이 의자를 나눠준 것일 테지만, 사랑을 경쟁하는 두 소년은 어디 그런가. 끊임없이 우리 중 누굴 더 좋아할까, 하고 고뇌하는 두 소년이 참을 수 없이 귀엽게 느껴진다.

 

이렇게 삼각 관계로만 진행되다 끝나면 어찌 이 작품이 200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7위에 올랐겠는가. 풋풋한 십대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와 맞물려 하나의 살인 사건도 있다. 살해당한 이는 카오루의 둘째 삼촌. <흑백합>은 1952년 현재의 아이들 장과 나치스가 지배하던 1935년 베를린, 전쟁이 한창인 1942-45년의 장이 병행된다. 과거의 장에서 현재 아이들이 만나는 어른들의 옛 이야기가 설명되는데, 독자들은 이 옛 이야기들을 통해 지금은 단지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들로만 보이는 그들에게도 잔혹한 사랑의 엇갈림이 있었다는 걸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이 주로 내세우는 소년소녀들의 순박한 풋사랑이 유독 명징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이유는 그들과 대비되는 어른들의 은원 관계가 그만큼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백합은 원래 하얀 꽃인데, 검을 흑(黑)자를 앞에 붙인 게 아마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스포일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소녀들은 누구 하나 살인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저 어느 여름방학의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일 뿐. 과거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어른들의 어두운 비밀을 알아차리기에 그들은 너무도 순수하고 맑은 존재였던 것이다. 단순히 미스터리로만 보자면 요즘은 잘 안 쓰는 평범한 서술 트릭을 사용한 것이나, 독자에게 모든 정보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감점 요소가 있지만 용의자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뭐 했나를 차분차분 따지는 그런 본격 미스터리는 아니기에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곳곳에 복선이 있어 다 읽고 바로 한 번 더 읽으면 좋을 썩 괜찮은 미스터리 소설이다. 

 

작가 타지마 토시유키는 1948년생으로 실제 주인공들과 열 살 차이 정도밖에 나지 않는다. 스스무들과 비슷하게 1950년에 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 막 전쟁의 참상을 벗어나 점차 발전 일로의 길로 나아가는 당시 오사카의 모습을 정확하게 스케치해낸다. 작가는 미스터리부터 모험소설까지 다양한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한 가지 안타까운 소식이 있다. 원래 10년 전에 한쪽 눈을 실명했다고 하는데, 점차 남은 눈의 시력도 사라져가자 실의에 찬 나머지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계획한 모양인지 맨션, 가재도구도 전부 처분하고, 전기, 인터넷 등도 모두 해약한 채 사라졌다고 하는데, 벌써 4개월째 소식이 없어 좋은 소식을 기다리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두 눈이 멀쩡한 우리가 시력을 상실한 작가를 두고 무책임한 자살이라고 무턱대고 비난하는 건 안 될 말이고,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도 마지막 작품으로 <흑백합>같이 여름날의 추억이 한없이 투명하게 빛나는 작품을 남긴 것에 작가 생활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주는 감흥에 흠뻑 빠져 책장을 다 덮은 새벽 3시부터 잠이 오지 않았으며, 죽기 전에 나도 이런 걸 꼭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담배만 뻑뻑 물었을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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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홈즈걸 2 : 출장 편 - 명탐정 홈즈걸의 사라진 원고지 명탐정 홈즈걸 2
오사키 고즈에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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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작이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인지 속편도 출간되었다. 속편 <명탐정 홈즈걸의 사라진 원고지>는 무려 장편! 이번 이야기는 교코와 한때 같이 일했던 미호라는 아가씨의 편지로 시작한다. 미호는 현재 나가노의 고서점 '마루우도'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서점에서 때때로 유령이 출몰해 영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단다. 더구나 그 유령은 27년 전에 유명했던 작가 기타야마를 살해한 후 체포되어 감옥에서 병사한 제자 아키오로 보인다는데...이번에도 역시 서점에서 벌어진 미스터리다. 서점의 영업을 방해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서점 탐정단 교코와 다에는 휴가를 맞아 마루우도로 향한다. 유령의 정체도 밝혀내고, 27년 전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끝간 데 없이 소박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전편과 흡사하다. 다만 27년 전에 일어난 기타야마 사건이, 그가 자고 있는 사이 누군가 침입해 칼로 난도질해 죽였다는 끔찍한 내용이라 전편보다는 정통적인 미스터리 색채를 보이고 있다. 전편이 소소한 일상의 미스터리였다면, 이번 작품은 그것보다는 조금 더 나간 살인 코지 미스터리 정도라고 할까. 단 3박 4일 동안의 휴가 동안 모든 걸 밝혀내는 내용이라 제법 속도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실은 조금 지루한 느낌도 받았다. 27년 전 기타야마 사건과 관련된 당사자들을 하나하나 만나서 당시 일에 관한 증언을 듣고 점차 단서를 모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구성인데, 뭐랄까 탐문 과정에서의 배리에이션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관련자 A를 만난 다음 차를 타고 이동해 B를 만나고 끝나면 또 자리를 옮겨 C...이런 내용이 계속 반복되니까 좀 물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작가라면 처음부터 모든 관련자들을 한자리에 모은다거나, 몇 명의 관련자는 전화나 서면을 이용해 증언을 얻기도 하는 등 변화무쌍하게 처리했을 텐데, 이 작가는 그런 점이 좀 아쉽다.

 

아니면 어차피 사건을 파헤치는 인물이 셋이니까 첫날부터 교코가 A를 만나고, 다에는 B, 미호는 C...이런 식으로 몇 명씩 나눠 관련자들을 인터뷰해서 나중에 그 결과를 취합하면, 실은 하루 안에도 충분히 해결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가. 탐문 과정에서 별다른 사건도 없이 그냥 주구장창 옛날 이야기만 듣는 셈이니까 솔직히 그 과정을 축약하면 단편으로도 충분히 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작가 오사키 고즈에는 <한쪽 귀 토끼>라는 작품이 국내에 이미 소개된 바가 있는데, 평범한 아동용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작품에서도 오래된 일본 고택에 관한 작가의 애호 취미를 느낄 수 있었는데, <명탐정 홈즈걸의 사라진 원고지>에서도 역시나다. 기타야마 저택에 관한 묘사가 특히 뛰어나다. 모든 단서를 모은 다음 다에가 펼쳐낸 마지막 추리는 꽤 괜찮은 수준이었지만 그 추리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평범해 어느 정도 감점 요소가 있다. 다만 이번 작품은 '책을 파는 사람'에 포커스를 맞춘 전작과 달리, 그 '책을 쓰는 사람'에 시선이 맞춰져 있어 흥미로운 부분이 분명히 있다. 특히 결말에 제시되는 작가의 업보라는 테마와 교코가 책이란 무엇인가를 깨닫는 장면들은 몹시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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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홈즈걸 1 -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 명탐정 홈즈걸 1
오사키 고즈에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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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적 꿈은 서점 주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책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동네 서점에 가면 책을 붙들고 몇 시간이고 나올 줄 몰랐다. 그러다 보다 못한 서점 아저씨가 안 사려거든 좀 가다오, 핀잔을 주면 겨우 안 움직이는 발을 떼며 나오기 일쑤였으니. 갖고 싶은 책을 살 수 있는 돈이 없었던 시절이기에, 서점에 산처럼 쌓인 책들을 바라보며 군침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서점을 해서 마음놓고 책을 읽어야겠다는 상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에 많은 인기를 모았던 <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코너에서는 우승자에게 서점에서 자신이 들고오고 싶은 만큼 책을 주는 혜택을 주었는데, 나도 한 번 저런 기회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에 꿈까지 꿨을 정도. 그러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서점이란 역시 동경과 추억, 황홀한 꿈으로 온통 파랗게 채색된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뿐이랴. 예전에는 동네 서점이 사랑방 역할도 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우리 아파트 상가에 있던 서점에 가면 책 한 권 사놓고, 서점 주인 아저씨가 쌍팔년도에 데모했던 이야기 듣느라 몇 시간을 앉아 있다 오곤 했으니까.
 
 

그러나 2010년 3월 현재, 나는 꿈만으로 동네 서점을 한다는 게 얼마나 수지가 안 맞는 장사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다. 열혈 운동권 출신 아저씨가 하던 동네 상가 서점은 이미 도산한 지 오래. 그 아저씨는 간 곳을 모른다. 물론 나는 요즘도 가끔 서점을 가곤 하지만, 책표지나 만든 꼴만 확인하고 냉큼 집에 들어와 인터넷으로 주문을 한다. 집에서 편하게 받아볼 수 있고, 각종 할인이나 적립금, 이벤트 등이 온라인에서 훨씬 풍부해 굳이 서점에서 책을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게 다 편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바뀌어버린 생활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가끔 서점에 얽힌 즐거운 옛 생각이 날 때면 가슴 한구석의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이렇듯 조금쯤은 예전에 분명히 있었던 훈훈함과 재미가 사라진 시절에 우연히 만난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은 서점이라는 공간을 너무도 따뜻하게 그리고 있어 읽는 동안 너무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서점에 얽힌 사건은 서점이 해결한다'는 모토를 내세운 일종의 서점 미스터리인 이 작품은 총 다섯 편이 수록된 단편집. 주인공은 6년차 나름 베테랑 서점 직원 교코와 날카로운 추리력을 지닌 아르바이트생 다에(실제 사건들은 전부 다에가 해결한다). 불후의 명콤비 홈즈와 왓슨을 떠올리게 만드는 두 파트너가 역앞 중규모의 '세후도 서점'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파헤친다. 그러나 기껏해야 책값으로 몇 만 원 정도가 오가는 서점에서 강도나 살인 같은 초강력 범죄가 일어날 리 있겠는가. 치매로 거동을 못하는 할아버지가 사다달라고 한 책을 찾아준다거나(다만 할아버지가 병으로 말씀도 잘 못해 책 제목을 적어준 쪽지가 암호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다), 손님이 병원에 있을 때 너무도 좋은 책을 추천해준 이름 모를 세후도 서점 직원을 밝혀낸다거나, 서점에서 준비한 판촉물을 훼손한 범인을 알아내는 등의 소소한 내용이니 일상의 미스터리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건 자체의 강도가 약한 편이라, 치밀한 추리나 경천동지할 반전...그런 건 없다. 어디까지나 안락한 분위기와 서점에 관한 공감 가는 정서로 승부하는 진짜 서점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을 듯.

 

무난하고 잘쓴 단편들이라 누가 읽어도 만족스럽겠지만, 책과 관련된 직업을 가졌던 나는 딱 두 배의 재미를 더 느꼈다. 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전차남>이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등 일본에서 꽤 화제가 되었던 책들이 자주 언급되니,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흥미로울 듯하다. 특히 첫 번째 단편에 나오는 중요 단서 중 하나인 신초샤(일본 메이저 출판사 중 하나)의 판다 마스코트와 문고본 카탈로그 책자 같은 건 실물을 본 적이 있기에 읽는 동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막기 힘들었다. 미스터리로서도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지만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역시 서점이나 서점 일에 관한 정밀한 묘사가 아닐까 싶은데, 작가는 실제로 서점 직원으로 13년이나 일했다고 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서점 직원이 하는 일을 그려낸다거나 평소 서점에서 일하면서 느낀 생각 등을 적재적소에 녹여내 한 편의 직업 소개서로도 충분할 정도다. 주인공 교코는 서점에 깊은 애정을 가진 평범한 직장인으로, 요즘 유행하는 소설들의 등장인물처럼 온갖 자의식이나 트라우마로 가득찬 우울한 내면 세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한,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구김살 없는 보통 아가씨라 오히려 한층 더 호감이 가는 것이다. <명탐정 홈즈걸의 모험>은 서점이라는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잘 알지 못하는 세계를 손에 잡힐 듯 분명히 보여주고, 단지 책을 사랑하는 손님들을 돕기 위해 별난 모험에 뛰어드는 두 아가씨의 매력이 가득한 정말 사랑스런 서점 미스터리다.

 

p.s/ 책 말미에 실제 서점 직원으로 일하는 아가씨 네 명의 인터뷰가 꽤 길게 수록되어 있는데, 이게 또 무척 재미있다. 이 책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손님들보다 더 골 때리는 실제 손님들의 일화라거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책을 읽고 나서 느낀 공감대 등이 아가씨들 특유의 끝없는 수다로 계속된다. 개인적으로 첫 직장이었던 출판사는 당시 영세한 곳이라 편집자인 나도 영업을 도우면서, 실제 서점 아가씨들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중 국내 굴지의 서점 아가씨가 참 네가지가 없어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한 적이 있는데, 이 인터뷰를 보니 서점 아가씨들 고충도 만만치 않더라. 우리는 한 사람이지만, 그분들이 만나야 할 출판사 사람은 하루에도 수십 명이 넘을 테니 어찌 모두 친절하게만 대할 수 있겠는가. 바빠서 그런 거라 이해해줄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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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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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벽두부터 올해 최고의 기대작 중 한 편이 출간되었다. 2005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제5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에 빛나는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가 바로 그 작품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2006년작 <용의자 X의 헌신>처럼 그해를 대표하는 일본 미스터리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작가는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군 중 한 명인 노리즈키 린타로. 이 작가의 작품은 그간 국내에서는 단편 몇 개만 겨우 소개된 데 그쳤는데, 특히 잡지 <판타스틱>에 실렸던 <도시전설 퍼즐>과, <계간 미스터리>에 수록된 <이퀄 Y의 비극> 같은 단편들은 짧은 분량에 비해 아주 재미있었고 그 수준도 높았다는 기억이 난다. 참고로 <도시전설 퍼즐>은 제55회 일본추리작가협회 단편상을 받은 바 있다. 이 두 단편을 비롯해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탐정으로 활약하는 주인공은 추리소설가 노리즈키 린타로로 실제 작가와 같은 이름이다. 추리소설 황금기를 빛나는 작품들로 수놓았던 작가 엘러리 퀸(프레드릭 더네이, 맨프레드 리, 사촌형제의 합작 필명)이 주인공 탐정의 이름을 역시 엘러리 퀸으로 한 것과 같은 설정이라 흥미롭다.


아마도 노리즈키 린타로는 거장 엘러리 퀸의 대단한 팬인 모양인지, 엘러리 퀸(추리소설가, 탐정)과 리처드 퀸(엘러리의 아버지, 경감) 부자가 협력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플롯도 그대로 빌려왔다. 주인공 노리즈키 린타로(추리소설가, 탐정) 또한 아버지 노리즈키 사다오 경시의 도움을 받아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는 경찰 내부의 정보를 입수하곤 한다. 코난 도일 사후에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탐정 셜록 홈스 이야기를 다른 작가들이 이어 쓰듯(이런 장르를 '패스티시'라고 한다고), 엘러리 퀸을 일본을 배경으로 새롭게 부활시켰다고 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추리하는 스타일도 비슷한데, 노리즈키 린타로도 엘러리 퀸처럼 번뜩이는 천재성에 의거한 추리가 아니라, 엄정한 논리에 따른 소거법을 주축으로 삼고 있다. 범행 시간에 A는 빨래를 널고 있었으므로 제외, B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으므로 아님, 그러므로 범인은 알리바이가 없는 C. 대충 이런 식으로 가능성이 없는 용의자를 하나하나 제거시켜 나가고,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범인임이 틀림없음을 증명하는 식이다. 여담으로 '일본의 엘러리 퀸'을 표방하는 또 한 명의 유명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도 비슷한 스타일이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주인공 노리즈키 린타로와 매력적인 여대생 에치카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한다. 알고 보니 에치카의 아버지는 유명한 전위조각가 가와시마 이사쿠. 그는 실제 사람의 몸에 석고붕대를 감아 그 사람의 외양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라이프캐스팅 조각 기법의 명인이다. 이사쿠는 암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딸 에치카를 본뜬 마지막 작품을 제작 중이다. 필생의 걸작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작품의 완성과 동시에 생명의 불이 꺼져버리고 만다. 이사쿠의 장례식이 끝나고 에치카를 비롯한 유족의 슬픔이 사라지기도 전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사쿠의 유작, 즉 에치카를 그대로 본뜬 조각상의 머리만 잘려 도난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편 에치카는 고등학교 시절에 저질 사진가에게 스토킹을 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사쿠의 위세가 만만찮을 때라, 다시는 사진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손을 썼는데 이제 이사쿠가 가고 없으니 걸릴 것이 없다. 혹시 그 사진가가 이번에야말로 진짜 에치카의 머리를 잘라 죽이겠다는 메시지를, 에치카를 꼭 닮은 조각의 머리를 잘라 가져가는 것으로 표현하려는 게 아닐까? 노리즈키 린타로는 에치카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사건에 개입하는데, 결국 에치카는 누구도 보지 못한 사이에 실종되어 버린다.

 
보통 애거서 크리스티나 밴 다인 등의 작품을 보면 탐정은 사건이 이미 벌어지고 나서 범행 현장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다. 벌써 일어난 살인 사건의 현장을 발생 후에 조사하고, 관계자들의 증언을 청취해 점차 증거가 쌓이면 그걸 추리의 재료로 삼아 진실에 도달하는 게 본격 추리소설의 일반적인 흐름이라면, 이 작품은 조금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린타로는 사건다운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에치카를 알고 있었고, 사건의 시작점부터 이미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경찰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나설 만한 강력 사건이 벌어진 것도 작품의 중반을 지난 무렵이라 통상적인 추리소설의 진행과는 무척 다른데, 실제로 사건은 그 시점에서부터 벌어진 게 아니라 책의 맨 첫 장부터 서서히 그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작가는 범행-탐정 도착-조사-추리-범인 도출의 순서대로 착착 흘러가는 추리소설의 일반적인 진행이 지나치게 소설적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실제의 범죄와 수사는 이렇게 시간의 흐름이나 일의 순서에 따라 구획되지 않는다. 가장 극단적인 인간의 행동이니만큼 이 범죄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범행 당사자, 수사관 등)의 의지와 실수, 악의와 오해 등이 뒤섞여 무질서하게 돌아간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를 무 자르듯 가볍게 구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실제적인 범죄의 양상과 흐름에 포커스를 맞춘 작가의 탁월한 구상은 깊은 고민의 산물인 듯해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야쓰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나 시마다 소지의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처럼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본격 미스터리는 그만큼 소구점이 명확해 집중이 잘 된다는 장점도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장소 한 군데서만 모든 일이 벌어져 좀 지루하게 느껴지는 단점도 분명하다. 반면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탐정 린타로가 사건과 관련된 곳곳의 장소를 방문하고, 제법 많은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일일이 청취하는 과정이 비중있게 묘사되어, 흡사 하라 료나 작중에서도 가끔 언급되는 로스 맥도널드의 하드보일드를 읽는 기분이었다. 특히 로스 맥도널드의 모 작품과는 줄거리도 아주 비슷해, 직접적인 모티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한마디로 관련자 D의 증언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다른이 E의 증언에 따라 그 가설의 헛점이 노출되면 새로운 가설을 세우는 등 탐문이 중요한 수사 기법으로 사용된다. 덕분에 본격 추리소설에 더해 하드보일드의 재미까지 느낄 수 있었다(실은 '하드'까지는 아니고 '소프트'보일드에 가깝다). 작가의 문체는 비교적 유머도 적고 문장도 담백한 편이라 확 읽히는 맛은 적지만,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증언을 듣고, 가설을 세우고 허무는 과정이 자주 반복되어 적어도 지루할 틈은 없었다. 또한 사건의 암부에 불륜과 배신 등 일그러진 가족 관계가 깊숙이 도사리고 있어 시쳇말로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한 다소 꺼림칙한 재미도 충분하다. 이래저래 재미만큼은 확실한 소설이라고 보장한다.

 
마지막으로 작가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면, 추리소설 작가이면서 평론가이기도 하단다. 신본격 미스터리를 제창한 아야쓰지 유키토와 같은 교토대학교 미스터리 동호회 출신으로, 유키토와 마찬가지로 걸작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시마다 소지의 추천을 받아 데뷔했다.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출신 작가들이 줄줄이 데뷔하면서 신본격 미스터리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었는데, 그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다고 보면 될 듯. 작가로서 한창 때인 20대의 아야쓰지 유키토가 다소 무리한 아이디어나 트릭이라도 이거 되겠다 싶으면 밀어붙이는 맹장 타입이었다면, 평론 활동을 주축으로 미스터리의 존재 의의나 구성 원리 등을 이론적으로 파고들며 가끔 한 번씩 완성도 높은 작품을 발표하는 노리즈키 린타로는 후방에서 신본격을 뒷받침하는 책사 정도가 되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도 10년만에 발표한 소설이라는데, 다음 작품은 좀더 빨리 만나봤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아야쓰지 유키토, 아리스가와 아리스, 야마구치 마사야, 아시베 타쿠 등 신본격 작가들이 국내에 제법 소개된 이때, 처음으로 노리즈키 린타로의 미지의 대표 장편을 만날 수 있어 무척 행복한 시간이었다. 린타로 탐정이 잘린 머리 석고상에 얽힌 모든 비밀을 밝히는 마지막 30페이지는 아껴 읽을 만큼 흥미진진했고, 린타로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인물이 진실을 알고 나서 느끼는 깊은 회한은 모든 독자들로 하여금 때때로 우리의 삶을 슬픔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오해라는 괴물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진실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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