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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3월
평점 :
작년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로 국내 독자들에게 첫 선을 보인 시라이 도모유키의 신작...이지만 실은 이 작품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가 작가의 데뷔작이란다. 실상 1800년대부터 쓰여져온 본격 추리소설의 여러 장치들이 이젠 고갈 단계라서 좀비물이나 타임루프 등 독특한 특수설정을 가미해 새로운 맛을 전달하는 게 최근 일본 본격추리의 유행인데 그중에서도 시라이 도모유키는 독보적인 상상력을 자랑한다. 전작에서는 감염병으로 죽여도 죽지 않는 살아 있는 시체들의 탐정놀이였다면, 이번에는 인간의 클론을 배양해 식용으로 쓰는 근미래를 다루고 있다.
식인이라는 핵심 테마만 들어도 끔찍하지만 전작에서 엽기적인 특수설정을 밀어붙여 말초적인 재미만 추구하는 게 아닌 본격 추리소설가로서의 실력을 톡톡히 보여줬기에 믿고 읽어보았다. 결과는 충분히 믿음에 부합하는 재미있는 본격 추리소설이었고, 시라이 도모유키 작가는 데뷔작부터 비범한 구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상황이 더 복잡하게 꼬여 있고 트릭의 가짓수도 많았던 전작보다는 살짝 못 미치는 감이 있었지만, '클론'이 상용화된 세계에서의 규칙들을 적절히 이용해 한 방을 크게 날리는 이번 작품도 못지않게 좋았다. 전작이 소나기 펀치라면 이번 신작은 온힘을 모아 결정타를 제대로 던지는 느낌이라서 취향에 따라 이 작품을 더 좋아하는 분들도 많을 것 같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고민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혐 주의'라고 쓰여 있는 제목을 클릭할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 종일 뇌리에 남아 찝찝할 게 뻔한 끔찍한 영상이나 사진일 텐데도 왠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한쪽 눈을 감고서라도 슬쩍 보게 되는 게 사람 심리가 아닐까. 시라이 도모유키는 바로 이런 악취미로 독자를 유인하는 데 명수라서 모든 작품에 비정상적이거나 극도로 자극적이고 혐오스러운 테마를 깔고 간다. 이 정도의 엽기성이라면 작가들의 든든한 지원군인 2차 판권(아니메, 영화, 드라마 등)을 팔기도 어려울 텐데도 꿋꿋하게 악취미 외길만 걷는 작가의 근성과 똘기에 박수를 보낸다. 빈말이 아니라 이렇게 꿋꿋하게 한 우물만 파는 작가라면 당장은 인정을 덜 받아도 결국은 하나의 사조를 창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시라이류 엽기본격 같은 이름으로 말이다ㅋ
악취미니 엽기니 혐오니 했지만 본격 추리소설로서는 단연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기본적으로는 알리바이 깨기 트릭인데 남녀 두 서술자의 챕터가 번갈아 진행되면서 독자를 자연스레 미스리딩에 빠뜨리는 기법도 훌륭하게 써먹었다. 책장을 다 덮고 맨 앞으로 돌아가서 하나씩 복기해보면 참으로 교묘하게 안배된 서술이 많구나 하는 걸 절감하게 된다. 특수설정이든 일반설정이든 추리소설이라고 라벨을 붙이려면 무엇보다 트릭이 좋아야 하는데 이 작가는 그 점은 부족함이 없다. 그냥 잘쓴 추리소설로 봐줘도 좋고, 특수설정 미스터리란 어떤 것인가 알고 싶어서 봐도 좋고, 왠지 '혐 주의'가 땡길 때 봐도 좋다. 개인적으로는 고만고만한 추리소설에 질린 점도 있어서 한 번씩 이런 걸물이 나오면 너무 반갑다. 진심으로 응원하고 앞으로 다른 작품들도 만나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