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 라이프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역(驛)은 사람이 들고 나는 장소. 오늘도 센다이 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러시 라이프>에서는 센다이 역에서 한 번쯤 스쳐 지나갔을 인간 군상들의 돌고 도는 인생과 기막한 사연들이 신나게 펼쳐진다. 역에는 늙은 개가 있고, 에셔의 그림이 그려진 포스터가 있으며, 하늘 높이 솟아있는 전망대가 있다. 그런 역의 풍경은 누가 봐도 동일하지만 보는 사람의 현재 처지와 품고 있는 사연에 따라 그 느낌은 달라지는 법이다. 여기 역 주변을 서성거리는 다섯 명의 사람이 있다. 우리가 살면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인줄 알았던 이가 훗날 소중한 인연으로 다가오거나 끊고 싶은 악연으로 얼룩지는 것처럼, 서로를 전혀 몰랐던 이 다섯 명의 사람은 무심결에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몇 십억년의 겁을 지나야 겨우 옷깃 한 번 스치는 인연을 만들 수 있다고 불가에서 그러지 않았던가. 과연 이 다섯 명의 인연은 어떤 것일지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최고 속도가 240킬로미터나 되는 신칸센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목적지는 연쇄 토막 살인사건으로 흉흉한 분위기의 센다이 시. 화가 시나코는 엄청난 부자 화상에게 팔리다시피 한 처지이다. 도둑 구로사와는 평소대로 작업(?)에 열중하다 빈 집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인물을 만난다. 카운슬러 교코는 유부남인 축구선수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의 남편과 축구선수의 아내를 죽이려 계획을 짜고 있다. 자살한 아버지의 기억으로 고통받는 가와라자키는 신흥 종교의 교주에게 마음을 의탁하며 위로받고 있는데, 교단의 중견 간부로부터 뜻밖의 제의를 받는다. 실직자 도요타는 역 주변을 빈둥대다 그곳을 떠돌아다니는 늙은 개와 친구가 된다. 이상 다섯 명의 인물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데 각각의 이야기로 다섯 편의 소설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모두 기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주인공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헤어지고,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지 기발한 이야기가 쉴새없이 펼쳐진다.

 

몇 년 전에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라는 영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낡은 총을 둘러싸고 그것을 훔치기 위한  여러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얽키고설킨 실타래처럼 보여지다 결말에 이르러 시원하게 풀리는 구조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러시 라이프>는 바로 이런 구조를 차용했다. A라는 인물이 무심코 행한 일이 B에게 영향을 주고, 그런 식으로 모든 일들이 꼬이고 막힌다. 이 작품에서는 멀쩡하던 시체가 잠시 뒤 토막이 나있고, 토막난 시체가 들러붙어 거리를 활보하게까지 되는데, 이 모든 미스터리는 최종장에서 확실하게 풀려 버린다. 등장인물들의 행적을 하나하나 확인하다 보면 마치 퍼즐을 푸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가 제대로 들어맞구 있구나, 하는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엄밀히 말해 추리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원래 추리소설을 좋아했던 작가 이사카 고타로가 추리소설의 자장 아래 작품들을 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국내에 나온 <칠드런>이라는 작품도 은행터는 과정에서 꽤 근사한 트릭을 사용했고, 이 작품에서도 거의 초자연적으로까지 보이는 기괴한 일들도 종국에는 모두 논리적으로 해결을 보고 있다.

 

1971년생인 젊은 작가, 이사카 고타로의 복잡한 이야기를 직조하는 능력은 발군이고 날렵한 복서의 스탭을 보는 듯한 경쾌한 전개도 돋보인다. 거기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미묘한 깨달음을 주는 성장소설의 느낌도 배어 있어 여러모로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다. 국내에는 단 세 편 <칠드런> <러시 라이프> <중력 피에로>가 나와 있지만 작가의 역량을 확인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무엇보다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로도 매력이 있어 이사카 고타로라는 작가의 등장은 거의 신의 선물로까지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천재(天才)라는 말은 이사카 고타로 같은 작가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더욱 놀라운 건 2000년 작인 이 작품에서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는 가면을 쓴 은행강도의 이야기가 2년 뒤 <칠드런>에서 사용됐다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들이 교집합과 합집합을 이루며 일종의 이사카 고타로 월드를 형성하고 있다는 건데, 향후에 쓸 작품들까지 염두에 두고 집필을 하는걸 보면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젊고 재능 넘치는, 한 마디로 대단한 작가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이사카 고타로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지만, 10년쯤 뒤에는 동아시아의 모든 독자들이 그의 작품에 열광할 것임을 예언하는 바이다.

 

많은 차들이 모여 정체 현상을 일으키는 러시 아워라는 시간대. 인생도 그렇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전부 각각의 인생이 있으며, 그 많은 인생이 모이고 모여 러시 라이프를 형성한다. 우리는 이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얼결에 누군가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누군가에게, 저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사는 누군가에게, 인생이 뒤흔들릴 만큼 커다란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 말이다. 일본의 젊은 작가 이사카 고타로의 이 작품은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사는 우리 한국의 독자들의 인생에도 작은 영향을 줄 만큼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을 보증한다.

 

 

-츠카모토가 시내를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행객들이 산적에게 살해당하는 얘기야. 여행객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결국 모두 죽어. 그래서 어딘가 비밀스런 장소에 다음에 올 여행객들을 위해 산적들의 약점을 적어두는 거야. 덕분에 다음 여행객들은 산적을 물리칠 수 있었지. 승리한 거야."

"해피엔딩입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아. 이번엔 산적 쪽에서 새로운 패거리를 몰고 와서 여행객들을 죽여 버리고 말았거든."

"비극입니까?"

"어떻게 생각해? 나도 처음엔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또 다른 시점에서 보면 완전히 달라져."

"다르다고요?"

"여행객은 세균이고 산적은 항생물질. 예를 그렇게 든 거지. 새로운 항생물질에 의해 세균이 박멸된다는 이야기야."

"예?"

"이런 단순한 이야기도 뼈대에 조금 손을 대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게 돼. 정의나 악, 그런 것은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반전이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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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26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러시 라이프인가 봐요^^

상복의랑데뷰 2006-05-26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구 이겼네요 ㅋㅋ 저도 조만간 읽어볼 생각입니다~

jedai2000 2006-05-26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그렇죠. 아주 뛰어난 소설입니다. ^^

상복의 랑데뷰님...축구 간만에 재미있었습니다. 꼭 읽어보세요. 아주 좋은 작품이예요.

페일레스 2006-05-27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이거, 뽐뿌질이 장난이 아닌데요? 간만에 사서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 생겼네요 흐흐.
얼마 전에 [우부메의 여름]을 다 읽었는데, 교코쿠 나츠히코라는 작가도 장난이 아닌 것 같아요.
좀 늘어지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jedai2000 2006-05-28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히 말씀드려서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은 꼭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요즘 아주 출간 러시입니다. 기존에 나온 <칠드런>과 이번에 나온 <러시 라이프>, <중력 삐에로> 그리고 오늘 나왔다는 <사신 치바>까지 일본에서의 인기가 한국에서도 이어질 모양입니다. 여러 작품들이 이사카 고타로 월드를 이루고 있으므로 그의 작품 여러 편을 보실수록 재미는 배가될 것입니다. 꼭 읽어보세요. ^^

글구 교고쿠 나츠히코도 매력적이죠. 한때 일본에서 '교고쿠 신드롬'이라는 용어까지 생겼다고 하니까요. 국내에도 그 신비로운 분위기나 엽기적인 사건들, 묘한 등장인물들로 인해 인기가 높죠. 물론 늘어지는 부분이 많지만 뭐 그건 교고쿠 스타일로 잘 봐주자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