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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인종차별이 꼭 미국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농촌의 총각들이 국내에선 배우자 찾기가 힘들어 베트남이나 필리핀 등의 처녀들과 국제 결혼을 통해 부부로 살게 된 것도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필연적으로 혼혈 자녀들이 태어나게 되는데, 그 아이들이 검은 피부색과 한국 사람과는 다른 외모로 인해 놀림을 받고 심하게는 차별대우까지 받고 있는 것을 TV 다큐멘터리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것은 향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비화될 소지가 다분한 한국 사회의 고약한 암세포 중 하나이다. 대체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동남아시아의 노동자나 먹같이 까만 피부를 가진 흑인들만 보면 나도 모르게 움찔하는 사람이나, 무식하고 가난한 나라 사람이라고 경멸하는 사람들에게 <앵무새 죽이기>라는 책을 권해주고 싶다.
<앵무새 죽이기>는 1960년에 출간된 하퍼 리의 자전적 장편소설로 출간 당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문학 부분 퓰리처상을 탄 작품이다. 위에서 인종 문제를 들먹이며 거창하게 소개했지만 한 편의 성장소설로도 따뜻하고 품위있는 작품이라 남녀노소 누가 봐도 좋을 듯하다.
작품의 배경은 1930년대 초, 대공황의 여파로 움츠러들대로 움츠러든 미국 남부의 앨러배마 주이다. 이 작품은 변호사인 아버지를 둔 오빠 제레미(젬) 핀치와 여동생 스카웃(진 루이즈) 핀치 남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통해 미국 남부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직은 어린 스카웃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순과 편견이 작품의 주제를 극명하게 형상화하는 듯 하다.
여름방학을 맞아 젬과 스카웃 남매는 사방으로 놀러다니며 온갖 놀이에 빠져 정신이 없다. 그러다 옆집 이모네 머물러 온 딜이라는 소년을 만나 세명의 아이는 삼총사가 되어 신나는 나날들을 보낸다. 그런데 스카웃 집 앞에는 래들리씨의 집이 있다. 그 집에는 부 래들리라는 남자가 사는데, 그는 일종의 정신병에 걸려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산다. 그런데 부 래들리를 둘러싼 소문은 흉흉하기 그지없다. 부 래들리가 그의 엄마에게 가위를 휘둘러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는 등의 소문이 퍼진다. 이 소문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아이들은 부 래들리 놀이를 집 마당에서 하며 논다. 고딕 멜로드라마같은 엉터리 연극 말이다. 그런데 방학이 끝나고 학교 갔다 집에 돌아온 스카웃과 젬은 집 앞 나무등걸 속에 츄잉검과 고장난 시계, 행운의 동전 등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스카웃 남매는 그 해 여름, 부 래들리의 존재를 도처에서 느끼게 된다.
여기까지가 1부의 내용이다. 2부에서는 아빠가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혐의를 받은 흑인 톰 로빈신의 변호를 해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아빠는 백인 남성들의 테러 위협을 받기도 하고, '깜둥이 애인'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모욕을 받지만 정의롭고 진중한 변호사로서 질게 뻔한 변호에 최선을 다해 임한다. 그러나 누가 봐도 톰 로빈슨이 무죄임이 분명하지만, 백인 배심원들의 판결로 인해 유죄를 받게 된다. 이제 어느 정도 '사내'아이가 된 젬은 분노하지만 아빠는 그게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쓸쓸하게 가르친다.
"젬, 무슨 일이냐?"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말이에요?"
"나도 몰라.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어. 전에도 그랬고 오늘 밤도 그랬고, 앞으로도 또다시 그럴 거다. 그럴 때면 -- 오직 애들만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구나. 잘 자거라."
이런 대목도 있다. 흑인 톰 로빈슨을 열렬히 변호하는 아빠의 모습에 감동받은 흑인들이 십시일반 먹을 것을 놓고 가는 감동적인 대목 말이다.
우리는 아빠를 따라나갔다. 부엌 테이블에는 가족 모두를 파묻고도 남을 만한 음식이 가득 쌓여 있었다.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며, 토마토며, 콩이며, 심지어는 머루까지 있었다...
캘퍼니아 아줌마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와 보니 뒤쪽 계단 주위에 놓여 있었지요. 저들은 -- 변호사님께서 하신 일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저들이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죠?"
아빠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려 잠시 동안 말을 잊지 못하셨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정말 우리 바로 옆에서 살아 숨쉬는 듯한 생생함을 보여준다. 아빠 애티커스 핀치의 정의감과 신중함, 따뜻함은 특히 돋보이고, 천방지축 스카웃은 정말 내 여동생같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조금씩 머리가 커가는 젬 도령은 또 어떤가. 거짓말쟁이 딜도 무지 귀엽다. 모디 아줌마의 사려깊음과 밉살맞지만 사실은 멋진 인생을 사셨던 듀보스 할머니, 미스터리를 간직한 부 래들리까지 어느 한 사람 허투루 나오는 인물이 없다. 이렇게 따뜻한 인물들이 사는 마을을 만들어낸 작가 하퍼 리의 필력은 정말 대단해 존경심이 절로 우러난다.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외치는 힘이 있는 작품이며, 어린 소녀가 자신의 눈만이 아닌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는 마음을 배우게 되는 감동적인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이것 저것 다 떠나서 스카웃과 젬의 어린 날의 한 순간은 우리 모두의 어린 날을 생각나게 만든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었던 어린 날의 순수한 모습 말이다. 우리는 어느덧 컸지만 어린 날의 그 용기와 순수를 모두 잃고 말았다. 아쉬운 일이지만 세상 물정에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이 책을 통해 옳지 않은 일을 보면 울먹여야 했던 어린 날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한 번 미소지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시길...
작가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를 통해 미국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부상했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의 샐린저처럼 두 번 다시 작품을 내지 않고 있다. 인터뷰를 통해 밝히길 '첫 작품이 그렇게 성공하면 두 번째는 내려올 수 밖에 없다'고 했다는데 <앵무새 죽이기>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작품을 낼까봐 글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실제로 두 번째 작품을 쓰고 있다고 하는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발표하지 않(못하)고 있다. 작가로서의 또 하나의 업적은 동향의 작가 트루먼 카포티를 도와 그의 걸작 <차가운 피>의 집필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트루먼 카포티는 <앵무새 죽이기>의 사랑스러운 거짓말쟁이 꼬마 딜의 모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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