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붉은 손가락>은 <용의자 X의 헌신>으로 5전6기 끝에 마침내 나오키상을 탄 히가시노 게이고가 수상 이후 처음 발표한 장편소설입니다. 사실은 예전에 써뒀던 단편의 설정을 확대하고 분량을 늘려 만든 책이라고 하지만 저 같은 게이고 팬에겐 단편이든 장편이든, 재활용이든 뭐든 나와주기만 하면 그저 좋습니다. 예전에 <붉은 손가락>의 발표 직후에 한 인터뷰를 봤는데, <용의자 X의 헌신>이 천재 버전이라면, <붉은 손가락>은 평범한 아저씨 버전이라며 두 작품의 유사성을 밝히더군요. 작품을 다 읽어보니 과연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두 작품 모두 간절히 지키고 싶은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남자, 그리고 그와 대결하는 경찰을 그리고 있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주고 싶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라면, <붉은 손가락>은 어쩌면 훨씬 더 애타게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등장한다고도 할 수 있으니, 그건 바로 아들입니다. 비록 어린 여자아이를 유괴해 성폭행하려다 실패하자 분을 못 이겨 죽여버린 인간 이하의 아들이지만 그래도 내 분신인데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와 비난이 이제 중학생인 아들의 작은 몸에 쏟아지는 걸 지켜보는 것은 견딜 수 없습니다. 결국 평범한 오십대의 회사원인 아키오는 아들을 위해 시체를 유기할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범죄라고는 예전에 불륜밖에 저질러본 적이 없는 그가 제대로 해낼 리가 없죠. 곧 경찰의 의심이 아키오 가로 향하게 되고, 마침내 아키오는 귓가에 속삭이는 악마의 계략에 굴복합니다. 잘만 되면 아들이 의심받을 리도 없고, 누구도 크게 다치지 않고 끝날 수 있는 그 계략과 맞서는 상대는 민완 형사, 가가 교이치로. 굉장한 형사라는 평판대로 가가는 점점 아키오 가를 감싸고 있는 비밀의 실체에 접근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익숙한 맛을 전부 간직한 수작입니다. 이야기를 크게 벌리지 않고도 여전히 핵심만을 파고드는 날렵한 진행은 물론이고, 끝날 때쯤 슬쩍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감동 코드와 기존에 썼던 작품들의 설정을 슬쩍 가져오는 버릇-<호숫가 살인사건>을 연상시키는 일가족이 합심해 시체를 유기한다는 플롯, <용의자 X의 헌신>에서 보여준 트릭과 반전, <편지>에 나온 가족주의 등-까지 히가시노 게이고 종합 선물세트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간단히 미스터리의 소장르로 구분했을 때는 범인이 먼저 등장해 사건의 세세한 부분 하나까지 독자에게 미리 제시하고, 뒤에 나오는 탐정이 범인의 트릭을 하나하나 부수는 도서 추리소설로 볼 수 있습니다. 도서 추리소설은 범인이 혐의를 피하기 위해 정교하게 만드는 트릭들을 범인의 시점으로 제시하기에 그만큼 독자가 몰입하기 쉽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범죄에 대한 은밀한 욕구가 숨어 있기 마련이므로 대리만족도 주죠. 물론 탐정의 입장에서 봐도 재미있습니다. 이미 독자도 범인과 공범이 되어 철벽 같은 트릭을 함께 만들었으므로 이걸 어떻게 깨부술지 지켜보는 것도 충분히 호기심이 가죠.

 

이 점에서 <붉은 손가락>의 핵심 트릭을 만드는 이, 즉 독자가 몰입해야 하는 인물을 이 시대의 평범한 아버지이자 회사원으로 설정한 것은 아주 탁월합니다. 회사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고부간의 갈등이나 아들이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등의 귀찮은 집안 문제에는 시선을 돌리는 아키오는 대부분의 중년 남성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더구나 경찰의 수사 기법이나, 경찰이 어느 정도까지 과학적으로 증거를 수집하고 파악할 수 있는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니 내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고, 독자들도 따라서 애가 몹시 탑니다.

 

게다가 그가 지켜야 할 사람이 인간쓰레기인 아들이라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비록 살인을 저질렀다지만 거의 순백으로만 묘사되는 <용의자 X의 헌신>의 여인과는 달리 아키오의 아들 나오미는 지켜줄 가치가 없는 아이입니다. 난폭하고, 무책임하고, 게임 중독증이라 현실 감각도 없죠. 여자아이를 죽여놓고도 귀찮으니까 대충 마당에 던져놓고 올라가서 게임을 할 정도거든요. 아마도 이 작품을 읽고 나오미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 독자는 없을 겁니다. 또한 아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줘 성격을 망쳐버린 어머니 야에코도, 우유부단한 아키오도 전부 짜증나죠. 한 마디로 문제 더럽게 많은 집구석입니다.    

 

대책없이 순수한 한 여인에 대한 비장한 사랑으로 헌신하는 남자가 나오는 <용의자 X의 헌신>이 비현실적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데 반해, 정말 징글징글하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 어쩔 수 없이 지켜줘야만 하는 <붉은 손가락>은 그만큼 더 현실과 밀접하게 닿아 있습니다. 이는 작품에서 게이고가 주로 제기하는 문제들인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을 위해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 희생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등등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제목에서 결정적인 힌트를 자주 제공하는 작가답게 <붉은 손가락>이라는 제목 자체에 상당한 단서가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붉은 손가락'과 관련된 결정적인 정보를 미리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가가 형사가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면서 슬며시 제시하는 터라 완전히 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히가시노 게이고는 결말부에서 트릭이나 반전보다는 감동에 집중합니다.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과 그런 어머니를 애써 외면했던 그간의 잘못에 대한 회한을 바탕으로 울리는 내용이라 어쩌면 신파라는 쓴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유치하고 못 쓴 신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걸 아주 잘 하는 작가니 작품 완성도에는 조금의 흠집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가 이번 작품에서 모정과 가족애라는 감동 강박증에 매몰되었다는 말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게이고같이 성공한 작가가 가족에 관한 신파로 울린다 한들 또 어떻습니까. 요즘같이 가족의 가치가 땅끝까지 떨어진 세태에 이런 이야기는 많이 나올수록 좋은 것 아닐까요?

 

히가시고 게이고의 작품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되는 시리즈 캐릭터 가가 교이치로 형사가 멋지게 사건을 해결하는 <붉은 손가락>은 크게 흠잡을 데 없는 적당한 트릭에 눈물이 쏟아지는 커다란 감동, 청소년과 노인 문제에 관한 진지한 시선까지 겸비한 읽어볼 만한 수작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용의자 X의 헌신>보다 오히려 이 작품이 더 나오키상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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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8-1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투요!!!

jedai2000 2007-08-17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 역시 비슷하네요.

비연 2007-08-17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작품이죠^^

jedai2000 2007-08-18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좋은 작품입니다. 많이 추천하고 싶어요 ^^

비로그인 2007-09-0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투요

jedai2000 2007-09-0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초롬너구리님...나오키상 재심의 들어가야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