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없음이 오히려 할 일이거늘

사립문을 밀치고 졸다가 보니 

그윽이 새들은 나의 고독함을 알아차리고

창 앞을 그림자되어 어른대며 스쳐가네
 
 
 
 「법어집」에서 경허스님의 선시.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자꾸만 되뇌어 보게 하는 시.
 
 
 
  ⓒ 박항률 화백의 작품. The Dawn (http://www.hangryul.com/)


  
 -4340.10.30.불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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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우 단편선
애드가 알랜 포우 지음, 이수연 삽화 / 꿈꾸는아이들(2006)
나의 점수 : ★★★★

포우를 만나는 입문서로 부담없는 책.


여름에 강변역에 갈 일이 있었다. 그때 테크노마트 건너편 길거리 자판에서 만난 책.
여기에서는 모든 책을 반값이나 혹은 그보다 저렴하게 팔고 있다. 책의 종류는 다양하지 않아 헌책방보
다는 선별에 있어 폭이 줄어들지만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읽을 책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한 권쯤 사볼
만 하다. 꿈꾸는아이들이란 출판사는 처음 접했지만 고전시리즈를 갖추고 있었다. 삽화도 깔끔했고 무
엇보다 손에 딱 잡히는 크기와 두께로 부담이 없었다. 청소년 세계 명작이란 타이틀로 제목만 보아도
유명한 명작들. 그러나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 보니 그 어디에도 정보가 뜨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아
쉬웠다.

이 책에는 포우의 6가지 단편을 담고 있다. 먼저 <<어셔가(家)의 몰락>>으로 시작한다. 내가 어린 아
이였을 때 주말의 영화로 본 기억이 난다. 어찌나 강렬했던지 잊을 수 없었다. 예고편을 보는 것만도 무
섭던 시절. 밤에 보는 어셔가의 몰락. 그 속에 어렴풋이 계단을 오르던 사람의 모습은 망령 같았다. 흰
옷과 창백한 얼굴은 전설의 고향의 처녀 귀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는 포우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그
기이한 영화의 원작자는 작품 속에 묘한 마력을 갖고 있다. 영화에 갇혀 있던 기억은 책을 만나 재조합
된다. 인물의 표정과 분위기는 물론 심리묘사가 탁월하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동원되어 미
학적인 세계가 되는 것이다.

다음 작품은 <<모르그가의 살인>>으로 이 작품은 언제 읽어도 정말 재미있는 추리물이다. 사건을 풀
어가는 뒤팽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사건이 종결된다. <<검은 고양이>>는 너무도 유명한 작
품으로 포우를 몰라도 검은 고양이는 괴담처럼 떠돈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고양이 괴담에서 제외할 수
없는 작품. 특히 마지막 반전이 압권. 워낙 알려진 작품이라 어려서부터 접했으니 책으로 만나도 기겁
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만약 모르고 책을 접했다면 꽤 무서웠을 것이다. 이어지는 <<도둑맞은 편지>>
역시 모르그가의 살인에서 뛰어난 추리능력을 보인 뒤팽의 또 다른 활약상이 이어진다. 그리고 또 다른
추리물인 <<범인은 너다>>는 쉽게 다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마지막으로 <<살아 있
는 시체>>
는 어셔가의 몰락처럼 묘사와 인물의 성격이 기이하고도 환상적이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작
품인데 역시나 마지막의 반전을 놓칠 수 없다. 또 이 책의 삽화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도 여기에 실려
있으며 책 겉표지 뒷장에도 있다. 우울한 포우의 글과 달리 부드러운 수채화 삽화이다.


그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심리상태가 불안정하며 기이한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내 속에도 우울과 몽상에 많은 부분이 빠져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갖고 있는 부분인데 그 부
분이 뛰어난 포우. 그의 재능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소재에
따라 영감을 주기도 한다.

포우를 아직 접하지 못했다면 이 책으로 입문해도 괜찮겠다. 청소년용이니 아이와 읽거나 가볍게 시작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우울과 몽상>을 붙잡고 씨름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덧붙임, 함께 들으면 좋을 음반으로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Tales of Mystery and Imagination 」
추천한다. 포우의 단편이나 시를 주제로 만든 앨범으로 곡마다 분위기 또한 독특하다. 가사도 음미해볼
만해서 영문사이트에서 포우의 단편이 올려진 곳이 많으니 참고하거나 책을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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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쓸쓸함은 그대 강변에 가서 꽃잎 띄워라
내 쓸쓸함은 내 강변에 가서 꽃잎 띄우마
그 꽃잎 얹은 물살들 어디쯤에선가 만나
주황빛 저녁 강변을 날마다 손잡고 걷겠으나
생은 또 다른 강변과 서걱이는 갈대를 키워
끝내 사람으로는 다 하지 못하는 것 있으리라

그리하여 쓸쓸함은 사람보다 더 깊고 오랜 무엇
햇빛이나 바위며 물안개의
세월, 인간을 넘는 풍경
그러자 그 변치 않음에 기대어 무슨 일이든 닥쳐도 좋았다

ⓒ 시: 김경미, <쉬잇, 나의 세컨드는>/ 일러스트: 카가야(http://www.kagayastudio.net)

-4340.10.28.해의 날. 시를 전해준 친구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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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 - 파피루스에서 e-북, 그리고 그 이후
니콜 하워드 지음, 송대범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책읽기를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책의 역사가 궁금할 것이다.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기라도 하듯 이 책
은 제목에서 모든 것을 말한다. '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 정말 잘 지었다.

 인류문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 등을 비롯해 많은 것이 책을 통해 전해졌다. 그러나 그 책이란 것의
역사는 다른 것에 비해 정작 자료가 적다고 생각된다. 이 글의 저자는 상당히 많은 참고자료를 통해 책
의 모든 것을 말한다. 재료인 파피루스, 소가죽부터 인쇄술, 미래의 오디오북, e-북까지 나온다.

 처음에는 지루할 거로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가속도가 붙었다. 읽을수록 빨려드는 매력은 책의 활자가
나를 잡아끈 것이 분명하다. 옛날에는 교회의 성직자들이나 책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대중에게 전해지고 지금은 누구나 책을 읽고 또 쓸 수도 있는 시대니까.

 책이 인쇄되어 나오기까지의 수고를 돌아보면서 그 속에 담긴 많은 사람의 지식과 땀의 결실을 온라인
주문 하나로 받아서 넙죽넙죽 넘겨보는 게 미안했다. 직접경험이 아닌 간접경험은 대부분 책을 통해
배워왔다. 공부할 때도 무언가의 지식에 목마르면 단연코 책이 우선이었으니까.

 그런 책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의 개혁을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뜨린 도구였다는 것. 인쇄기가 없었다
면 종교개혁은 그렇게 크게 번지지 못했을 것이란 말도 과연 일리가 있다. 사람은 언어를 만들고 그 언
어를 듣기만 해서는 기억의 한계가 있으니 그래서 기록하고자 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손으로 쓰던 것에서 벗어나 인쇄라는 획기적인 것을 발견했다. 특히나 전문분야인 수학이나 과
학, 의학 등에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을지는 뻔하다. 이렇듯 이 책에서는 책의 역사가 차근차근 설명
되어 있다.

 그 진화는 아직도 진행형이며 현재는 오디오북, e-북까지도 나와있다. 오디오북은 사용해 본 적이 없지
만 나이가 들어 더는 책읽기가 힘들어질 때 이용해 보고 싶다. 아이 교육에도 어느 정도 활용하면 괜찮
을 거 같다. e-북은 가끔 지루할 때 사무실에서 이용했는데 눈이 아프다는 거 빼고는 괜찮았다. 지금 읽
는 책을 완전하게 대체하진 않을 거 같다. 여러 방편이 있고 자신이 선택하는 것일 뿐. 물론 미래의 책
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는 없다. 나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테니까. e-북의 경우는 나무를 원
료로 사용하지 않으니 친환경적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아직 보완해야 할 것이 남았다. 그러고 나면 더
대중화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인상적이던 글이 읽어 옮겨본다. '페이퍼백 혁명 현상'에 대해 논평한 글이다.

대중의 독서 습관의 이런 혁명이, 앞으로 우리 출판계가 대중의 기호를 더 타락시키는 쓰레기의 홍수로
범람하게 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저가 고전을 더 많이 갖게 된다는 의미인지는 우리 사회와 문화의 발
달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ㅡ 267쪽, 제6장 미래의 책中 1951년 미국 소설가 하비 스와도스의 말.



 당시 대중은 페이퍼백이란 기막히게 휴대하기 편리하고도 싼 책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들고 다
녔다. 그런 폭발적 관심에 걱정되어 내심 말한 내용인데 지금 같으면 고민거리도 아닐 문제다. 그러나
어쩌면 출판사들은 아직도 고민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독자들은 다양한 출판의 홍수 속
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부가 마케팅만을 믿고 책을 구매하지도 않으며 베스트셀러만을
찾지도 않는다. 그만큼 독자도 세분화되고 있으니까. 그러니 결국 독자를 알아야 살아남을 것이다.

 잠시 이야기가 딴 길로 샜는데 각설하고 이 책은 나처럼 책에 욕심 없는 이에게도 소장할 가치가 있었
다. 단, 서양의 서체 이야기는 조금 낯설었다. 도무지 내가 알 수 없는 서체라 호기심이 일었던 것이다.
물론 책에는 옮긴이가 각주를 달아서 풀어둔 부분도 있어 꽤 도움이 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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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
최인호 지음, 김점선 그림 / 열림원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최인호의 글. 그리고 김점선의 꽃그림. 원숙미 넘치는 두 예술가의 만남은 책표지처럼 화사한 기분좋음
이다. 참으로 잘 어우러져 이 책은 꽃으로 수놓아졌으며 삶에 애정을 가진 이들의 향기마저 느껴진다.

 최인호 하면 유명작가로 그의 책을 읽지 않았어도 드라마, 영화의 원작이 그였던 것이 꽤 많아 익히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해신, 별들의 고향 등 이름만 들어도 인기가 많았던 작품들이다. 그런 그가 이 책
에서 산문형식을 빌어 재미있고도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아프고 나더니 더 아름다워진 김점선의 꽃그림을 볼 수 있다. 사실 나는 그의 작품
을 보고 예쁘다는 생각보다는 흥미롭고 시(詩)적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책의 꽃그림은 하나하나
가 다 아름다웠다. 십자모양에서 피어나는 꽃은 그녀의 영혼에서 끌어내는 열정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꽃밭을 들여다보니 그의 일상과 생각부터 소중한 이들, 은사. 그리고 아내의 이야기가 살갑다.
특히나 인상적인 건 아내에 관한 이야기들. 아내의 현명함과 그런 아내를 사랑하는 작가의 애틋함은 본
받을 만하다. 세월을 오래도록 견디며 서로 친구처럼 정을 쌓아오지 않은 젊은 작가였다면 이런 글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불친절을 고치는 방법을 가르쳐줄까요?" (아내)
"그게 뭔데?" (작가)
"간단해요. 그건 내가 더 친절하게 그 사람을 대하는 거예요." (아내)

ㅡ 55쪽, 나는 왜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中



 진정한 사랑이란 달콤한 시간뿐 아니라 씁쓸한 시간 또한 함께 지내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으로
서로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오롯하게 이해하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을
여러 해 이어온 세상 모든 노부부의 모습은 뒷모습만으로도 매우 아름답다.


 또한, 산문의 특성답게 작가의 인간미가 느껴져서 읽는 내내 포근했다. 그뿐 아니라 작가의 정치에 관
한 생각이나 솔직함과 유모까지 도드라졌다. 갑자기 봄쯤에 읽었던 박완서 작가의 <호미>가 살짝 겹쳤다.


 자연스레 내 꽃밭은 어떤 상태일지를 돌아보았다. 지금을 올곧게 보내야 미래의 어느 날에 내 삶을 돌
아보며 여유 있게 웃을 수 있을 텐데. 꽃만 가득인 거보다는 적당히 잡초도 나고 그늘도 있고 나비나 벌
도 쉬었다 가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러기 위해서 역시나 오늘을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을 아쉽지 않을 만큼 갖고 있다 하여도 마음에 꽃씨 하나 심을 자리가 없다면 얼마나 가난한가.
이제라도 꽃씨 혹은 자그마한 어떤 씨앗이라도 뿌리내릴 수 있도록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내 심장에
흐르는 새빨간 피처럼 붉은 꽃잎이... 볼의 홍조처럼 발그레한 짙은 복숭앗빛 열매가 가득 여물어 타인
에게까지 그 향기를 날려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 꽃밭의 울타리부터 걷어치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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