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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이레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십대에 처음 만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나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그의 작품을 찾아가며 읽던 시간은 소중했다. 그는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라고 말해주었으며
더욱 근원적인 물음에 다가서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의 그림과 자필, 사진 등으로 엮은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사두기는 좀 되었는데 바로
읽어보지 못했다. 대신 박완서의 <호미>를 읽고 나서 바로 이어 읽으니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자꾸만
소로우의 <월든>이 생각났다. 같은 이레 출판사의 책인데 <월든>의 경우 일 년에 한 번씩은 다시 읽
는데 이제 이 책도 추가해야 할 거 같다. 그만큼 담겨있는 내용이 마음을 가득 채운다.
산과 강, 나무와 잎사귀, 뿌리와 꽃, 이 모든 자연의 형상은 우리 안에 그 원형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
은 영원성을 지닌 영혼, 우리가 비록 그 본질은 알지 못하나 사랑의 힘, 창조의 힘으로 느끼는 그 영혼
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ㅡ 27쪽, <외면 세계와 내면 세계>
정원을 가꾸는 일은 낭만보다는 노동에 가깝다. 그저 알아서 자라는 자연을 나만의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날마다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활의 활력이 된다면 헤세처럼 즐거움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여간 괴롭지 않을 것이다. 자연에 가까운 정원을 추구한 헤세의 정원이 좋았다. 인공잔
디에 인공조각물 등으로 진열한 정원을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헬리오트로프의 향기는
열광적으로 춤추다 풀어헤친 여인의 머리칼처럼
촉촉이 빛나는
검고 기이한 털을 가졌다.
ㅡ 43쪽, 향기에 관한 글 中 <헬리오트로프의 향기>
과연 어떤 향일지 여러 번을 떠올려보았다. 그래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떠올리다 보면
기억에 오래도록 남기 때문 임을 안다. 나중에라도 헬리오트로프의 향기를 직접 맡을 기회가 올지도 모
르니 말이다. 꽃과 나무에 관한 시와 글은 음미하면서 읽으니 새록새록 자연의 모습에 다가서는 느낌이
들었다.
책표지 사진 밑에 헤세가 친필로 "내가 가꾼 몬타뇰라의 진미. 해바라기는 화가와 새들에게 최고의
진수성찬이다" 라는 글에 웃음이 고였다. 해바라기 하면 고흐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헤세도 해바라기
의 모습에 반했음이 틀림없다. 하긴 그가 반하지 않은 자연이 어디 있으랴마는...
현명하다는 것은
현자들에게는 연금술이자 유희인 것이다.
세계가 거칠고 격렬한 충동에 지배되는 동안에도,
그러니 우리는 겸허해지자. 가능하면
세계가 질주하며 흘러가는 시대 속에서도
저 영혼의 고요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ㅡ 159쪽, <정원에서 보낸 시간>
6운각으로 쓰인 <정원에서 보낸 시간>도 재미있게 읽었다. 6운각이란 이름은 이 책의 설명을 통해 알
았지만 이런 식의 글쓰기를 좋아한다. 호메로스나 오비디우스, 괴테 등이 사용한 적 있는데 시문학에
쓰여진 운율이라 한다. 책장을 덮고서도 다시 찾아 읽었다. 그리고 책 뒤쪽에 단편인 <꿈의 집>과 <아
이리스>도 집중해서 읽었다. 특히 <꿈의 집>은 전쟁 때문에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는데 완성되어 한 권
의 책으로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단편 또한 진지하며 사색적이다.
삶이 유혹하는 소리, 어린 시절부터 날마다 그를 부르며 그의 발걸음을 끊임없이 앞으로, 또 앞으로 몰
아세웠던 그 유혹의 소리는 점차 저세상에서 부르는 죽음의 소리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 소리를 따라
가는 것이 생의 유혹에 대답하는 것과 별다를 바 없이 아름답고 기이하게 느껴졌다.
ㅡ 222~223쪽, 미완성 단편 <꿈의 집>
"중요한 것이란 도대체 뭐지요?"
"소박함이란다."
ㅡ 249쪽, 미완성 단편 <꿈의 집>
위의 대화를 읽고 소로우의 <월든>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소로우도 말하지 않았던가.
진정으로 간소하게 살라고.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화려하거나 많은 무엇이 아
니라 단순하고 소박한 것일지도 모른다. 없는 것을 원하기보다 가진 것을 버리기가 더 어렵지 않던가.
흙을 태우는 헤세는 그 의식이 신성하다고 말했다. 늙은 작가의 사진을 보며 늙어간다는 것과 죽음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직은 내가 풀어가야 할 것이 더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알맞은 시기가 오면 흙내음(살아있다는 생생함)과 흙 태우는 행위(소진되어 더러는 새롭게 혹은 無로)
만으로도 아무런 말이나 생각도 필요치 않으리라.
정원이나 전원생활에 관한 책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천천히 음미하면서 다시 읽으면 그 맛이 달라질
것이다. 때로는 운율에 맞춰 읽어도 좋겠다. 무심코 대한다면 넘쳐나는 지루한 글자의 나열을 탑으로
쌓은 것밖에 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경험한 자연의 이미지와 소리와 향기를 총동원해서 대할
때 이 책의 담백한 맛이 마음으로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