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책표지를 넘기자마자 작가의 환한 웃음이 나를 웃게 한다. 그 모습은 고모와 닮았다.
그래서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김매듯이 살아왔다. 때로는 호미자루 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후비적후비적 김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거둔 게 아무리 보잘것없다고 해도 늘 내 안팎에는 김맬 터전이 있어왔다는 걸
큰 복으로 알고 있다.

ㅡ 책머리에 쓰인 작가의 말.



앞부분의 내용은 전원생활을 하며 느낀 자연과의 교감 등이 담겨있다. 사실 처음에는 전원생활이 담긴
내용으로 알고 있었는데 작가의 산문집에 여러가지가 담겨 있었다. 삶에서 호미질을 멈출 수 없었다는
작가의 마음가짐이 들어 있는 이 책은 그래서 호미라는 이름으로 나와 만나게 되었나 보다.

사람들은 항상 필요 이상으로 바쁘다. 그래서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과 자연과 대화하는 시간이 사려졌
다. 사실 하늘이란 어디에나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마주할 수 있으며 자연 또한 전원이 아니어
도 사무실이나 집 혹은 거리의 가로수와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언제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다. 퇴원하고 집에서 회복하는 동안 봄이 오고 있었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기에 나의 유일한 즐거움은 창문을 통해 뒷배란다 너머를 보는 일이었다. 앙상한 나무에서 새싹이
돋고 있었고 햇살은 적당하게 따뜻했다. 봄의 생명력은 내게까지 삶을 나눠주었고 자연을 바라본다는
자체만으로 나는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참 고마웠다. 그래서 식물을 그리는 일을 좋아했다. 아마도 그
때의 영향으로 식물에 큰 관심을 쏟기 시작한 거 같다. 작가가 목련 나무와 소통하는 모습에서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자연에서 나고 자라며 돌아가니 별개가 아닌 동행자다.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

원예가 발달한 나라에서 건너온 온갖 편리한 원예기구 중에 호미 비슷한 것도 본 적이 없는 걸 보면 호
미는 순전히 우리의 발명품인 것 같다. ㅡ 49~50쪽.


호미는 왼손잡이를 배려해 왼호미라는 게 있었다고 하니 그만큼 우리와 호미의 관계는 밀접했나 보다.
지금에야 생소하지만 흙에서 벌어먹고 살아온 공생관계였으니 말이다. 모종삽만을 만져본 내게 호미는
낯설었지만 기회가 온다면 손에 착하고 감기는 맛을 알고 싶다.

작가의 빨려들게 하는 유려한 글솜씨와 솔직함이 편했고 성숙한 사람에게서 풍기는 성찰의 시간이 좋
았다. 이 부분에서는 대놓지 않고 다만 자연의 모습을 관찰로만 쓴 글 속에 들어 있는 은유도 내게 깨
달음을 주었다.


그리운 침묵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더 불행한 경우를 가정하고 위로받는다는 것은 치사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자위
의 방법이다. ㅡ 86쪽.


침묵이란 지친 말, 헛된 말이 뉘우치고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게 아닐까. ㅡ 94쪽.

작가의 평소 생각이나 신념이 소탈하게 드러나는 글에서 친근함을 느꼈다. 산문집의 매력이라 생각한
다. 사람냄새가 난다는 것이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그가 나를 돌아 보았네

작가의 소설 속에 나오는 식민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 역시나 데뷔작인 <나목>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었다.


내가 문을 열어주마

엄마에게 시작해서 이이화 선생, 박수근 선생, 김상옥 선생, 이문구 선생 그리고 딸에게 전하는 말까지
이어진다. 나이가 들면 걸어온 세월을 정리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마음에 담은 이들을 돌아
보게 된다.

가족 그리고 친구에 이르기까지 나도 그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었다. 잊혀진 인연에게까지도 가끔
은 그러고 싶다. 누군가를 미워한 시간보다 감사한 시간이 더 많았든가도 의문이다. 아니 감정조차 없
지 않았던가 싶다. 작가의 나이에 소녀처럼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으려면 마음부터 정갈해야 할 것이
다. 군더더기를 털어버리고 너그럽게 살고 싶다. 그러면 나도 소중한 사람들에게 웃음을 던져줄 수 있
을지도 모르니까. 이 책 엄마에게 읽으시라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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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3-09 16:27   좋아요 0 | URL
적은 나이가 아님에도 아직 전 뒤를 돌아보고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그냥 어떻게 늙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답니다.^^

은비뫼 2007-03-09 21:48   좋아요 0 | URL
^^ 저도 제대로 생각해보진 못하겠더군요. 아직은 때가 아닌지...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