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e - 시즌 2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2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지식 e를 만난 것은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TV채널을 돌리던 중 시나브로 시선을 잡은 영상과 짧은 글. 곧 끝났지만 여운이 길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가끔 마주치는 지식 e는 가슴으로 만나는 한 편의 시처럼 그렇게 남게 되었다. 그런 지식 e가 책으로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책은 좀 늦게 본 편이다.

TV특성상 영상으로 시선을 끌었던 반면, 책에서는 영상이 빠진 자리를 대신해 뒤편에 실린 글과 깔끔하고 세련된 편집이 보충하고 있었다. 결국, 감동은 퇴색되지 않은 채 놓쳤던 이야기까지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희/노/애/락으로 나눠진 감동은 결코 설득하려 들지 않고 현실 사회의 문제점과 예술 등에 관해 보여준다.

프라이멀 요법,「시사저널」그리고「시사IN」창간 이야기, 매니패스트, 영국요리사 제이미 올리버 등 많은 이야기 속에서 내가 실제로 본 방송은 거의 없었지만 제이미 올리버는 본 기억이 났다. 학교급식개혁 모습에서 정크푸드를 퇴치하고 아이들의 입맛을 결국 돌린 그의 모습과 이를 지원한 정부의 모습에서 우리의 현실이 떠올랐다. 간간이 뉴스에 보도되는 비위생적 급식 등이 오버랩되면서 어디에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결과가 확연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진리 또한 되새기게 되었다.

'제정신으로 정신병원 들어가기' 편에서는 강제로 입원한 <채식주의자>의 연작소설 마지막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다. 전태일, 사
진작가 최민식 등 관심 있었기에 가슴이 쓰리기도 했다.

시즌 2를 먼저 읽었지만 순서는 상관없었다. 더구나 시즌 2의 끝부분에 지식 e를 만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이들이 만드는 프로그램인지 궁금했는데 의문이 조금은 풀렸다고 할까.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물론 더러는 내용이 더 길어지거나 깊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앞으로 차차 보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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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 2008-03-30 18:44   좋아요 0 | URL
저희집엔 텔레비젼을 치워버려서 볼 기회가 없었지만
무척 감동적인 내용이라고 하는 얘긴 많이 들었습니다. ^^

은비뫼 2008-03-30 23:34   좋아요 0 | URL
아, 텔레비젼을 치우셨군요. ^^ 하긴 필요하다 싶으면 시간 나실 때 인터넷으로 보셔도 되니까요. 아이들 때문에 치우신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방송은 짧은 시간이지만 영상과 음악 등을 적절하게 이용해서 멋지더군요.
 
밥은 굶어도 스타일은 굶지 않는다 - 4억 소녀 김예진의 발칙한 상상 & 스타일
김예진 지음 / 콜로세움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내게는 스타일이 멋진 여동생이 있다. 그녀의 스타일은 어디를 가도 눈에 띄며 인정받는다. 그래서 기획사에서 러브콜도 여러 번 받았을 정도인데 그래서 의상, 가방, 구두 등에도 관심이 남다르다. 언젠가는 의류쇼핑몰을 창업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고 마침 그럴 때 립합신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김예진 하면 4억 소녀라는 말보다 여동생이 먼저 떠오른다. 물론 동생은 아직 직장생활을 하며 의류쇼핑몰 쪽 생각은 접은 상태이다.

 립합 사이트에 가 본 적이 있는데 사실 그 사이트의 옷들은 내 취향도 아니고 동생 취향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토록 인기가 많고 장사가 잘된다는 것은 그녀의 스타일이 그만큼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말일 것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미 그녀는 스타일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이 있었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와 비교하자면 정말 극과 극이다. 엄마가 입혀주는 공주옷이나 입었던 누구와 달리 초등학생 때 이미 집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 갔다가 돌아올 때 또다시 엄마가 입혀 보낸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는 것을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더니 그 짝이다.

 이 책에서 만난 김예진은 생각보다 글도 잘 쓰고 열정이 넘쳤다. 방송과 소문으로만 익히 들었던 4억 소녀가 아니었다. 그 끝없는 열정과 노력이야말로 젊은 그녀를 활활 타오르게 한 원동력이다.


…환상은 어느새 현실이 되어 내가 원하던대로, 내가 상상했던 그림대로 움직였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했다(내 예상과는 달리!). 하지만 중요하고도 분명한 건 내가 원하던 그 순간이 오기까지는 철저히 나 혼자였다는 사실이다. (91쪽.)

 
 그녀는 아직 어리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립합을 지지하는 버팀목이다. 그 열정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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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화의 뉴욕 일기
엄정화 지음 / 삼성출판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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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이자 배우인 엄정화가 홀로 뉴욕에서 지내며 기록한 일기형식의 글. 일단 서두에서 밝히듯 그녀는 이 책의 제의를 받았을 때부터 솔직하게 쓰기로 다짐했으며 이를 실행했다. 작년에 읽은 배두나의 도쿄놀이처럼 특정 팬들에게는 어쩌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읽기에는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더구나 화려한 엄정화를 내세웠지만 그녀만큼 책은 화려하지 않다. 물론 그녀의 솔직함이 어느 정도 지면을 채우지만 책의 편집은 정말로 별로였다. 그래서인지 엄정화의 개성과 감각이 크게 드러나지 않은 느낌이며 오로지 그녀의 글과 사진이나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주내용은 일기지만 팁으로 뉴욕의 곳곳을 소개하는데 음식점과 박물관 등은 뒤편에 주소, 전화번호, 홈페이지가 정리되어 있다. 타다오 안도가 디자인했다는 레스토랑은 나도 가보고 싶어졌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엄정화의 쓸쓸함으로 가득하다. 외롭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니 말이다. 동그란 자신의 눈이 싫어서 최대한 길어 보이게 그려본다는 별거 아닌 거 같은 사소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또 입은 울어도 눈은 절대 울면 안 된다는 말에서 험난한 연예계에서 버텨온 그녀의 저력이 드러나면서도 강인하게 버티려는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특히 개인적으로 이 책에 타이포그래피가 적절하게 배합되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편집이나 글씨체부터 사진의 색감까지 다 별로였던 까닭이다. 보통 이런 책은 화보 수준으로 멋지게 구성하지 않나 싶었다. 그래야, 상업적으로 돈이 될 터이니 말이다. 

 독자들이 이런류의 책을 보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이보다는 더 괜찮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전문작가가 아님을 알기에 글은 이만하면 뭐 개인의 이야기니 넘어간다. 역시 책의 구성이 문제라고 나는 끝까지 생각하며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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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추리작가 10인 단편선 밀리언셀러 클럽 79
엘레나 아르세네바 외 지음, 윤우섭 외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러시아 추리물이라는 말을 듣자 대번에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추리물 하면 영미권이나 일본의 책이 떠오르게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러시아가 배경이라면 몹시도 추운 긴 겨울이 떠오른다. 예상은 적중했다. 이 책 대부분의 풍경은 겨울이며 크리스마스, 새해 등을 전후로 일어난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색다른 것은 각 단편의 작가가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추리물과 여성작가라! 정말이지 부러운 일이다. 장르소설이 폭넓고 다양해지는 가운데 독자는 물론 작가도 더욱 풍성해지는 현상은 흥분되는 일이다. 국내 추리소설도 더 풍요로와지기를 빌어본다. 독자들이 많으니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자, 이제 열 편의 단편을 만나보자. (아랫글부터는 아주 약간의 스포일러 주의. 물론 결정적인 건 밝히지 않습니다.)

1. 니나의 크리스마스 기적
주인공 니나는 오래전 잃어버린 딸이 있다. 어느 날 우연하게 광장에서 구걸하는 마샤라는 소녀를 만나고 그 아이가 자신을 똑 닮았음을 느낀다. 결국, 마샤를 잃어버린 딸이라고 생각한 니나는 개인탐정 알렉세이에게 의뢰를 부탁한다. 이 사건을 풀어가는 추리자는 탐정인 알렉세이로 따뜻하고 잔잔했다. 범인은 늘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공식이 깨지지 않는다. 노숙자, 구걸하는 아이들의 세계를 약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며 첫 단편인데 기억에 남는다.

2. 공포의 인질 또는 내 고독의 이야기
제목이 독특해서 과연 어떤 이야기일지 관심이 쏠렸던 단편. 주인공 폴리나의 남편이 살해당하고 남편의 친구 바짐은 어느 날 사라진 폴리나를 찾게 된다. 여기서 사건을 풀어가는 추리자는 폴리나. 예민한 그녀답게 그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범인처리방법은 냉정하고 깨끗했다. 그녀의 독백부분이 인상적이다.

3. 천사가 지나갔다
제목만 보면 왠지 톨스토이가 떠오른다. 러시아의 대문호라 그럴까.
노작가의 심장을 멈추게 한 링거병 바꿔치기를 의심하는 의사 슈마코프가 추리자로 이 단편은 추리물 같지 않은 끝맺음이었다. 그의 집착이 더 강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조금은 시시하게 느껴져서 음식으로 치면 간이 덜 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래인용 말에 무척이나 동감했다.



도대체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나? (148쪽)


4. 이지웨이!
추리소설작가 알료나가 추리자. 그녀의 시원시원한 이야기는 러시아의 혹독한 눈보라와 대조적으로 따뜻한 결말로 끝난다. 제목의 이제웨이는 가방상표 이름이다.

5. 새해 이야기
주인공의 건방증 심한 친구는 돈을 잃어버려서 그 돈만큼 액수를 채워야 하고, 남편과는 이혼 직전의 상태로 주인공은 친구들이 더 소중할지도 모를 그런 사람으로 보인다. 산타클로스처럼 나타난 사람의 선물 그리고 역시나 해피엔딩. 새해 하면 무언가 희망차고 새로운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게 사람들의 심리. 그에 부응하듯 이 단편도 따뜻하고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크리스마스와 새해 사이에서 기적이라 불릴 수 있는 일이 생긴다.

6. 행복한 크리스마스
주인공 다샤가 추리자로 친구의 남편 살인사건을 풀어간다. 자살로 위장한 타살이라고 판단한 그녀는 차근차근 사건을 해결하는데 재미있었다. 제목처럼 역시 해피엔딩이다. 가만 보면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는 하나같이 돈, 유산 때문이다. 하루라도 사건·사고 없이 지나갈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서글퍼진다.

7. 복수의 물결
이 책에서 유일한 남매작가의 글. 이들은 늘 합작으로 글을 쓰는가 보다.
주인공이자 추리자인 료샤는 대학등록금이 필요해서 수입이 많은 대저택의 하녀 일을 하게 된다. 어느 날 파티에서 주인이 살해되고 안주인은 포상금을 내건다. 료샤는 추리를 시작하고 결국 살인범을 찾아낸다. 전형적인 복수 이야기였다. 그러나 복수라는 것은 사실 동기가 있다. 돈보다 더 큰 상처를 입어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던 것. 범인을 찾아 이야기를 듣고 아직 순수하고 어린 료샤의 선택은?? 재미있게 읽었다.

8. 러시아식 성탄절
추리자 스베틀라나는 우연한 기회에 유명인들과 성탄절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녀의 추리가 시작된다. 로맨스도 살짝 가미된 이 단편은 더빙 된 외국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이었는데 괜찮았다.

9. 마지막 유언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아내 아냐와 남편 르보비치. 새해를 맞아 아내는 친구 내외를 초대하고 부엌에 거위요리를 꺼내러 갔다가 살해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 책에서 유일하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이런!!

10. 예정된 살인
어느덧 이 책의 마지막 단편. 러시아의 단면이 살짝 느껴졌는데 마피아, 살인 등은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그러나 이 책의 모든 단편이 그렇듯 폭력이나 잔인한 장면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다.



 전반적으로 탐정이나 형사 등의 전문인이 일을 해결하기 보다 아마추어인 주인공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로 우리 주변의 그 누군가이거나 혹은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비일상적인(-살인은 정말이지 비일상적이라 말하고 싶다.) 사건 그리고 잔잔한 전개는 무섭거나 긴장감을 주지 않고 에피소드처럼 소소한 재미를 준다. 그래서 자극물에 마음이 약하거나 추리물에 입문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반면에 극적 긴장감을 원한 독자라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러시아가 배경이고 여성추리작가들의 따뜻한 시선이 담긴 책이라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래서 가볍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물론 변해가는 러시아의 흐름도 느껴져서 좋았다. 내게 먼 나라로만 생각된 곳 러시아는 늘 영화에서의 이미지로만 남았는데 이 책으로 조금 더 다가선 거 같다. 싸이코살인마가 등장하지 않아 마음이 불편할 필요가 없는 책이니 옆에 간식을 두고 편하게 만나기를. 봄이 오는 길목에서 지나간 긴 겨울을 잠시 떠올리듯 그렇게 읽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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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 2008-03-28 00:08   좋아요 0 | URL
오호....옆에 간식처럼 두고 볼 수 있는 책이라고요? 땡깁니다, ㅋㅋ

은비뫼 2008-03-28 01:57   좋아요 0 | URL
앗, 몽당연필님! ^^* 맥주 한 잔 옆에 두고 읽어도 될... 흐흐흣.
 
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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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글인 독서일기 형식의 책.
내가 꼬맹이였던 1986년부터 1989년까지의 기록으로 당시 문학의 시대상이 반영되었다는 특징을 안고 있다. 그것은 이채롭지만 선뜻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그 시대를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우리는 부여받았다.

 때로 준비하고 있던 에세이의 목차도 나오기도 하고, 불문과를 졸업하고 번역서, 연구서를 내어서인지 불어단어도 만날 수 있으며 프랑스 문인을 비롯한 여러 작가와 작품이 언급된다. 그중 우리 문학에 대한 내용을 보자면 시와 시인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책을 읽고 쓴 일기지만 그 밖의 영화, 여행, 병 등에 관한 내용 또 뜻밖에 일기지만 사적인 이야기를 배제해서 감성적이기보다 비평적이다.

 문학적으로 트인 한 지식인의 통렬한 비판과 관심을 엿볼 수 있었기에 즐겁고 부러우면서도 그의 사유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은 두고두고 읽어야 한다. 그가 언급한 책 중 읽지 못한 책이 많다는 사실이 약간 우울하지만 그의 의식을 쫓아가는 경험이나마 간접적으로 이어갔다.

 짧고 맛있는 글쓰기란 이런 것일 터. 짧은 글에 핵심을 박아두는 능력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흉내는 낼 수 있을지언정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방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다. 훔치고 싶은 사유와 비평으로 가득해서 정말이지 책이 너덜거릴 때까지 읽고 탐구하고 싶다.

 또한, 그해에 나온 신간서적을 많이 읽는 모습에 반성했다. 나는 읽었던 책을 다시 읽거나 읽고 싶은 책만을 찾아 읽는다. 우리 작가의 책도 생각보다 많이 읽지 않았다. 내 딴에는 거품이 빠진 후 읽겠다는 심보지만 다 핑계일지도 모른다. 그 저변에는 읽을만한 책만 읽겠다는 생각이 깔렸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으로 판단한단 말인가. 좋은 서평이 많은 책을 선택하는 쪽으로? 그렇게 간단하게 책을 골라서 읽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제대로 된 판단이 설 수 있도록 깊이 있게 책을 대하고 싶다.

 일단 김현의 책과 교감하려면 상당한 내공을 더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러나 일단은 부담없이 내가 느낄 수 있는 것들부터 시작하는 것이 이 책을 오래도록 함께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더욱 폭넓은 사유를 지향하거나 책읽기의 방향에 회의를 느끼는 독자 모두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 아래 글들은 처음 읽었을 때 메모해 둔 것들의 일부.


가능성 있는 글을 읽는 밤은 즐겁고, 즐겁다.

(15쪽, 1986년 1월 14일.)



근원은 없고 흔적만이 있는 의미, 근원은 없고 시작만 있는 문학…

(16쪽, 1986년 1월 27일.)



자리매김이라는 말이 나는 싫다. 자리매김이란 관계 맺기, 관계 지우기 보다 훨씬
고착적이어서, 한번 자리가 맺어지면 변경하기가 힘들다. 변화를 전제하지 않은 자
리매김이란 딱지 붙이기에 다름아니다.

(19쪽, 1986년 2월 14일.)


삶이 아름다울수록, 죽음의 원통함은 더 절실하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41쪽, 1986년 8월 17일. 알베르 카뮈의 <안과 겉>)


▲ 나 역시도 좋아하는 구절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푸풋-)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란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같이 앉아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54쪽, 1986년 11월 21일.)


▲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김현 선생에 대해 낯설음이 조금은 가시는 느낌이었다.
사람은 자기 멋대로 생각한다. (푸풋-)


가난한 사람들은 눈에 금방 띄는 환부이지만, 진짜 아픈 부분은 몸의 다른 곳이다.
그곳을 보지 못하는 한 총체성은 얻어지지 않는다. 사회라는 거대한 몸 속의 가장
아픈 부분은 정치와 돈이 만나는 자리이다.


(63쪽, 1987년 1월 6일. 시인 복거일씨가 들려준 말.)


나는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
에 도달하게 되었다.


(89쪽, 1987년 3월 22일.)


장자의 무용지용에 대한 퉁명스러운 반론: \"그래 그렇게 오래 살아 뭐하자는 게요, 제기랄.\"

(150쪽, 1988년 4월 11일.)


새벽에 행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더 커진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 살아 있다.

(282쪽, 1989년 12월 12일.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
그는 그다음해인 1990년 6월에 세상을 등진다.)

**다시 돌아보는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이 책은 작년 5월에 처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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