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다, …다, …다. 다들의 행진이 이어지는 김훈의 간결한 문장. 때로는 문장의 끊어짐에 속도감이 붙는
다. 미화시키지 않은 꾸밈없음은 애써 어렵게 의식적으로 돌려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활자가 너무도
빨리 지나감이 느껴지는 순간 멈추게 된다. 제어하지 않으면 작가의 글을 곱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의 글에서는 관찰과 분석이 느껴진다. 모든 것에 관심을 둔 관찰력이 아니었다면 분석해내지
못하는 부분을 그는 여지없이 잡아낸다. 때로 그것이 단어를 조합한 짜맞춤 같지만 의식없는 서투른 흉
내가 아니기에 재미가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조악하기 그지없어서 참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
래서 작가는 말한다. 「 나의 떨림으로 너의 떨림을 해독할 수 있다. 」(31쪽,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中)
그 특유의 유머러스한 말. 아니 이 말을 다른 작가가 했다면 감각적인 느낌이었을 텐데 김훈이 말하니
왠지 익살스럽다.

올해 출판된 <남한산성>의 치욕에 관한 이야기도 언급된다. 미리 구상하고 있었던 그의 치욕에 관한
이야기의 요점은 한마디로 그 치욕을 긍정하자는 것이다. 책장에서 넘겨주기를 갈망하며 기다리는 <남
한산성>과 마주하기란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읽어야겠다고 하면서 여태 손에 잡지 않을 걸 보니
진달래 꽃빛의 표지 안에 든 역사를 객관적으로 읽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다. 그렇더라도 여
름이 가기전에는 뚜껑을 열어보아야겠다고 재차 다짐한다.


내 말은, 그 견딜 수 없는 치욕을 치욕으로써 긍정하자는 말이다.
치욕을 긍정하는 또 다른 치욕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 또한 감당되어야 할 치욕인 것이다. (105쪽, 늙은 기자의 노래 中)



후반부에는 기형도에 관한 문학평론과 인터뷰가 이 책을 마무리 짓고 있다. 기형도와 김훈 둘 다 좋아
한다. 아주 오래전에는 기형도 주위의 인물 김훈이었는데 이제 먼저 간 시인보다 살아있는 작가의 책을
잡는 일이 손에 익었다. 그렇더라도 가을이나 초겨울 이유없이 기형도 시집 속으로 나는 다시 흡수될
것임을 안다. 동시에 이제 더는 시인의 주변인이 아닌 또 다른 한 명의 작가로 김훈을 기억할 것이다.
둘 다 과대평가 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으나 정작 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시간이 멈춘 시인
은 그런 평가에서 해방되었으며 ㅡ 저세상에서는 평가에 상관없이 시를 짓고 있을 테니. ㅡ 노(老)작가
는 그런 평가를 들리지 않다는 듯 꼬장꼬장하게 글쓰기에만 전념한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인터뷰 읽는 재미가 쏠쏠하기 시작했다. 늘 느끼지만 이렇듯 거침없이 술술 풀어져
나오는 그의 방식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평소 생각이 습관이어서 언제든 그에 관해 어떠한 질문을 하
더라도 확고하게 대답할 수 있는 모습. 또한, 쉽게 단언할 수 없는 문제는 그렇다고 말하는 거침없는 모
습이 작가 김훈이다.

이 책은 김훈의 평소 생각이 여실히 드러난다. 신변잡기적이기도 해서 그만큼 친근하게 느껴지는데 그
런만큼 편하게 읽을 수 있다. 문학적 가치보다 작가의 말발과 글발이 더 흥미롭다. 깊이보다 한 작가의
주변에 관한 이야기를 써내려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 하여 깊이가 없다는 것은 아니며 그를 친근
하게 느껴지게 한다. 문장가인 그의 모습에 더한 것이 바로 유머러스한 말이다. 평소 그의 인터뷰 등을
자주 접했다면 익히 알고 있겠지만. 오죽하면 제목도 <밥벌이의 지겨움>이랴. 밥벌이의 괴로움도 아니
고 말이다. 일부로 고상한 척 하지 않는 모습이 좋다. 게다가 밥벌이의 고단함에 치여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절망이기보다 지겨워도 그렇게 살아가듯 써둔 모습이 좋았다. 작가는 한없이 우울함에 빠지게
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그까짓 거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듯하다. 돈이 좋다고 거침없이 말하며 지긋지
긋해도 별수 있느냐는 식이다. 그나저나 작가는 내용의 절망이 아닌 그의 깔끔한 문체로 나를 절망에
빠뜨린다. 별수 있나. 이미 김훈의 글에 맛 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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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22 11:42   좋아요 0 | URL
후... 김훈의 글에 매료된 적도 있었고
솔직하고 직선적인 그의 화법도 맘에 든적 있었지만
이제 전 김훈의 문체가 너무 느끼하단 생각밖에 안드니...:)

그것과 별개로 리뷰는 참좋네요 추천!

twinpix 2007-08-22 22:44   좋아요 0 | URL
친구집에 꽂혀 있는 걸 보고 조금 읽어봤는데 흥미가 가더라고요. 이 리뷰를 읽으니 더욱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잘 읽고 갑니다.

잉크냄새 2007-08-23 12:52   좋아요 0 | URL
저도 이미 김훈의 글에 맛이 들렸답니다. 전작주의는 아닌데 김훈의 책은 하나둘 계속 쌓이고 있지요.

은비뫼 2007-08-23 21:23   좋아요 0 | URL
낙서가// 리뷰도 아니고 김훈 이야기만 한 거 같네요.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체셔고양이// 전 아직 김훈의 작품을 더 읽어야 할 거 같습니다. 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 간결함에 깃든 생각이 좋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체셔고양이님.

twinpix// 그러셨군요. 친구분께 빌려서 읽어보시고 마음에 들면 구입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잉크냄새// 저도 전작주의는 아니지만 가끔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책을 우르르... 그런데 <남한산성>은 손에 잘 안잡혀서 아직도 못 읽었습니다. 훔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