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랄한 라라
마광수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우선은 호기심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즐거운 사라>로 마광수 열풍이 불어댔을 때도 나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문학이라는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작가로써 표현의 자유조차 박탈당하는가 싶어 아주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한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생각했을 때 뭐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던 까닭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광수 열풍은 식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종의 축복이라면 축복일테지만 그를 위해 구명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일종의 성공이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책장의 소개글에서  '제대로 읽어보고 평을 해달라'는 말처럼 나는 그의 작품을 한번쯤은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긴 장편의 소설이 아닌 그가 틈틈이 생각나는대로 옮겨 적었을 단편 모음이라는 말에 아마도 더욱 호기심이 발동했으리라. 꾸며진 글보다는 순간적인 느낌으로 자신의 생각을 적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 자신만의 표현이 아닐까 하는 어리숙한 정의를 내려보면서 말이다.

<사라>를 만나보지도  못한 채 <라라>를 만나본 후의 소감은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사라>를 만나보고 싶다! 는거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라라>속에 <사라>가 어느정도는 살아 있었을거라고 생각되어지지만, 강도의 차이만이 있을거라고 생각되어지지만, 그래도 <사라>의 그 무엇이 왜 그토록 세상을 달구었는지가 궁금하다는 말이다. <라라>속의 <사라>는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마도 사람들은 들어내지 말고 함부로 보여주지도 말라고 했던 그런 것들에 대해, 혹은 내가 말하고 싶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대리만족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 책속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관음증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보지 말라고 하는 것과 숨기고 싶어하는 것은 굳이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사람의 이중적 심리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던 상황이었을거라고 지레 짐작해버리고 만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시끄러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표를 찍게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지금같은 세상속에서 性을 이야기한다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그리고 그 性을 표현함에 있어 은유적이지 않고 직설적이어서 문제가 된 거라면, 정말 단순히 그게 문제였다면 세상은 너무 짙은 선그라스를 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그가 정말 性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그렇게 살아왔든 그냥 상상속에서 그렇게 살기를 원했든 간에 그것도 아니면 그가 꿈꾸는 性생활이 그랬든간에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라는 거다. 이 책으로 인한 우리의 젊은이들이 걱정이 되었다면 굳이 이 책이 아니라해도 청소년들에게 위해를 끼칠만한 책은 얼마든지 있을테니 말이다. 세상이 바뀌면 거기에 맞게 우리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아직은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시기상조였을 거라는 위로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한 말은 도대체 이건 뭐야? 했었다.  왜 이렇게 낯뜨거운 표현을 해야만 하는 거지? 하다가도 그럴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고... 하지만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법이 조금 역겹기도 했었던 건 사실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표현해야만 그 느낌이 살아나는 것은 아닐텐데..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뭐랄까,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앞에서 일종의 작위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까? 

모를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라라>의 발랄함이 읽혀지기보다는 <사라>를 잃었던 마광수라는 사람의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된 것 같다. <사라>로 인해 그 자신에게 생겨났던 일들에 대한 변화를 읽을 수 있었으며 자기 자신을 변호해주고 싶어하는 안타까움이 읽혀지기도 했다. 책속의 글 중에서 '<슬픈 사라>를 쓴 죄' 나 '심각해씨의 비극' 같은 글을 통해 그리고 다른 몇편의 글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직은 아닐까? 하다가도 그래도 그건 아니지! 하는 그런 안타까움 말이다. 그랬기에 <사라>를 다시 <라라>로 환생시킨 것일게다. 감시와 검열에서 자유로워지고 독자들에게 재미있게 읽혀지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속에서 아직도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저항의식이 느껴진다면 억지일까?  사실 말이지 지금의 젊은이들은 표현하는 데 있어서 참 대담하다. 솔직하게 자신의 욕구와 원하는 것을 말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할 줄도 안다. 때로는 그 표현함이 너무 쉽고 가벼운 것만 같아 안스러울 때도 있을만큼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세대이기도 하니 이런 책이 나왔다고 한들 굳이 감시와 검열이 따라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책 제목을 자세히 바라보면  '발랄한' 의 'ㄹ'이 뒤집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마음 한 켠일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나는 책속에서 만날 수 있던 <라라>의 모습들을 여기에 다시 옮겨 적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것은 그만의 생각이고 표현일테니 말이다.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잘 모르겠다는 거다. 그가 말하는 유미주의적이라거나 탐미주의라는 말을 이해하기엔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예술이 무엇인지조차 내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거였다. 마치도 한편의 포르노라는 정의를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다지 재미도 없다. 재미있게 읽혀졌으면 하는 작가의 바램이 무색하리만치. 그래서 그럴까?  나 역시 작가에게 반대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왠지 자신만의 생각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까닭이다. 

모든 사람들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랑만을 꿈꾸며 살까?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겠지만 굳이 직설적이여야만 제대로 된 '性的'표현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표현함에 있어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살짝 감춰둠으로해서 더 아름다운 느낌을 갖게 하는 것도 많다. 어쩌면 너무나 가식적인 우리들의 모습에 칼을 대고 싶어했던 건 아니었을까?  수없이 많은 가면을 바꿔가면서 세상을 살기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했던 건 아니었을까?  체면과 겉치레의 틀에 갇혀 사는 우리 모두에게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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