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메르의 모자 - 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본 17세기 동서문명교류사
티모시 브룩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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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책을 덮고 잠시 생각하던 순간까지도 나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역시 중국이야기인가? 하다가도 한편의 그림 앞에서는 잠시 숨을 고른다. 이건 어쩌면 세계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또한번 하게 된다.  그림 한편을 앞세워 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어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어쩌면 그림이 안고 있을 그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하지만 왠일인지 스스로 그런 설정들을 늘어놓으면서도 느껴지지 않는 책 속 세상 이야기가 저 먼곳 어디쯤의 이야기로만 전해져 왔던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베르메르'라는 이름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름속에 자연스럽게 따라왔던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작품속 이미지 '진주 귀고리 소녀' 의 강렬했던 그 인상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까닭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림과 겹쳐졌던 역사속의 한 시대적 배경이 주었던 그 강렬함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까닭일런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도 어쩌면 그 작품에서 비롯되어진  느낌들을 연계받았으면 하는 기대심리가 작용했을거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림을 따라가는 세계사인지 아니면 세계사의 흐름속에 그림을 끼워넣었는지 그것은 모르겠다. 단지 한편의 그림속에서 역사 따라잡기를 시도한 것만은 확실하게 보여진다. 그 역사 따라잡기의 중추적 역할은 단연코 중국이다. 서양과 동양의 마주침을 중국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문화적인 교류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부와 가치관의 변화를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중국사를 공부했던 작가의 이력답게 중국을 주체로 세계사의 변화를 읽어냈다는 것이다.  유럽사람들에게는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던 중국이 안고 있던 이미지들, 그리고 그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힘겨워했던 중국의 모습..  이미 오래전에 읽었던 《암스테르담의 커피상인》이라는 작품이 생각났다. 커피를 둘러싸고 벌어지던 무역의 현장속에서 그들만의 생활상을 엿보던 재미도 쏠쏠했던 작품이었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게는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은 참으로 많았다.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는 약간 의아스럽기도 했던 비버 펠트 모자가 부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보면서 슬며시 웃어보기도 한다. 은은한 빛을 발하던 중국 자기에 빠져들어 감탄을 자아내던 유럽 사람들, 좀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싶어하던 그 시대의 사람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모험을 떠나기도 한다. 그 모험속에서 새롭게 만날 수 있었던 세상은 놀라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넓혀지는 교역망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알아가던 순간은 아마도 또다른 시대를 만들어내기 위한 진통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동양과 서양이 서로를 바라보던 시선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와중에서도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은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그 흐름속에 아주 짧게 등장했던 조선의 빗장은 역시 굳게 닫혀 있었다.  포로의 입장이었지만 조선식으로 손님이었던 서양인이 조선사람으로 반평생을 살았다는 일화를 보면서 개방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읽지 못했던 우리의 가치관이 아쉽기도 했다.

서로 필요한 것들을 나누기 위해 무역을 시작했고 그 무역이 발전함에 따라 변해가는 사회의 모습..  그야말로 빛이 있으니 그림자도 생겨났다. 해적이 있었고 많은 배들이 난파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던 비극을 낳기도 했다. 좀 더 많은 일손이 필요했기에 아프리카의 엉뚱한 흑인들이 노예로 전락해야만 했고 사람이 하나의 물건처럼 부의 척도가 되어야 했던 아이러니를 낳기도 했다. 작가가 보여주는 그림속의 세상이야기는 큰 파도를 불러오기 위한 하나의 작은 포말이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단지 그 변화의 물결속에는 많은 아픔이 있었다는 것, 그 변화의 물결속에는 늘 힘없는 자들의 외침이 있었다는 것, 그 변화의 물결속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희생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할 따름이다. <델프트의 풍경>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젊은 여인> <지리학자> <저울을 든 여인> <카드놀이>... 작가가 보여주는 그림의 제목들이다. 저 그림들속에 녹아든 세계사를 바라다 보았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속에서 나는 <진주 귀고리 소녀>의 눈빛이 전해주었던 그 애잔함을 느끼지 못했다. 소소한 일상을 그려냈다는 책설명글처럼 다가왔던 것들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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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에 물들다 1 - 흔들리는 대지
아라이 지음, 임계재 옮김 / 디오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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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에 물들다는 제목을 보면서 그리고 책표지를 보면서 평상적인 느낌으로 色에 관한 이야기겠거니 한다. 영화를 통해서 보았던 色에 관한 느낌은 대체적으로 내게 너무 강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던 것 같다. 어느 색을 막론하고 色이 품고 있었던 것이 아픔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무리일까?  책표지로 선택되어진 빨갛고 파란 色을 바라보면서 책장을 열었다.  티베트..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하는 나라라는 말이 있듯이 나 역시도 기회가 오게 된다면 이 나라를 한번쯤은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세계적인 이슈로 떠올랐던 티베트의 독립 이야기보다는 내게 한발 먼저 다가왔던 라싸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달라이라마라는 인물에 대해, 티베트라는 나라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안고 있었던 종교적인 삶의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던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이 영상처럼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리속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자유인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쉽게 저지르는 실수에 대해 특정한 규칙을 정해놓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경험 많은 사냥꾼이 만드는 함정보다 더욱 확실하다.(30쪽)
참 아이러니하다.  자신들의 그 특정한 규칙으로 인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하니 그것이 참 미묘하다는 말이다. 어째서 그럴까?  타인에게 통제받기 싫어하면서도 누구나 통제하길 원하는 그 모순이 어쩌면 우리 인간의 속성은 아닐지... 처음엔 양귀비라는 이쁜 이름을 가진 붉은 색이 그들을  찾아왔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지만 책속에서 보면 단연코 그들은 원했다.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그래서 물들기 시작한 그들에게 또하나의 色은 어쩌면 변화의 色이었을 게다. 그 붉은 색이 전해주었던 끝없는 욕망의 나락속으로 그들은 빨려들어갔다.  그들속에 파고들던 色의 환상앞에서 하나 둘씩 무너져 내리던 그들의 삶.. 나는 그 삶이 서러웠다. 누구보다도 높이 그리고 누구보다도 견고한 城을 쌓기 위해 그토록 힘겨운 시간과 싸움을 하는 그들의 삶이 서러웠다. 하지만 작가는 그 서러움을 우리의 주인공 바보아들을 통해 걸러내 주고자 한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한 아이가 그 순수함을 바탕으로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속에는 참으로 많은 삶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었다.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닌 서로 엉키어 함께 어울어지는 그런 삶이...

투스.. 일종의 부족장이면서도 나름대로는 왕의 의미까지도 포용하고 있는 그들의 투스제도 아래에서는 결코 투스가  될 수 없었던 바보아들은 둘째였다. 느끼는대로, 보여지는대로 그리고 주는만큼만 받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할 줄 알았던 그 바보아들에게는 사랑과 멸시가 함께 따라다녔다. 무너져가는 그들의 시간앞에 우뚝 버티고 선 희미한 희망과도 같았다. 그 희망이 서서히 밀려들어오는 중국이라는 거대 물결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때로는 숨한번 크게 들이켜며 변화에 물들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정해 줄 수 없었던 그 바보를 인정해 주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늘어갈수록 아무도 흉내낼 수 없었던 바보 도련님의 순수는 하나씩 허물어져 간다. 너는 똑똑한거냐, 아니면 진짜로 바보인거냐? 묻고 있었던 아버지조차도 사실은 바보라고 믿고 싶어할 만큼 우리는 모두 그 욕망이 없는 상태의 순수한 영혼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권력과 힘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마이치의 강력한 투스.. 그가 불러 들였던 붉은 색과 백색의 욕망은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세습되어지던 권력의 힘을 나누어 갖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하면서 바라보았던 바보아들에게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던 까닭은 또 무엇이었을까?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불공평했지만 강력했던 그들의 신분제도조차 바보아들앞에서 자연스럽게 무너지는 걸 보면 현실은 끝없는 힘과 욕망을 허락하지는 않는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현실이 무너져내리는 과정은 아주 자연스럽다. 당연히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왜 종교가 우리에게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미워하는 원한을 가르쳤는가?'..(1권 250쪽)
티베트는 불교국가이다. 그들의 삶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더라도 그들에게서 불교라는 종교를 떼어낼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책속에서는 그 종교를 이야기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 종교적인 의미를 통해 보여주고 싶어했던 건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틀, 너무 견고한 그들의 삶의 테두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변화가 어느날 갑짜기 찾아 왔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 둘씩 변화를 불러오기 위한 전주곡이 울리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인정하기 싫었던 것일게다. 혀를 두번씩이나 잘려가면서 끝내는 말을 잃어버리게 되는 수도승 웡버이시와 바보 도련님의 말없는 대화는 참으로 경이롭다.  그의 혀가 잘림으로써 그들에게 다가오던 미래의 色은 무채색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자신도 모르는 예지능력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오직 한사람 바보 도련님에게 말없이 그 길을 일러주는 그의 의미가 내게는 왠지 신비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주 불편한 진실을 아주 편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모순을 보게 된다. 아플 때 아프다고 소리지르는 것보다 그저 조용히 그 아픔을 참아내는 모습은 더욱 더 안스럽게 느껴진다. 바로 이 책이 그런 것 같다. 이미 다가와 버린 슬픔을 소리내어 울기보다는 참아내기 위한 서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色으로 표현되어지던 욕망의 시작과 끝..  붉은 색의 황홀함으로 피어났다가 백색의 허망함으로 꽃과 함께 시들어버린 그들의 욕망은 너무 헛되고 헛된 것이었음을 바라본다. 자신이 죽을 때를 이미 알고 있는 바보에게는 죽음조차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와야 할 것들은 온다. 가야할 것들이 가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어떤한 것이 되었든 보내고 맞이하며 변화하는 삶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단지 그 먼지같은 욕망과 터럭같은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니 그것이 서글픈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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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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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도 원주민이 산다?  정말 그랬다면 과연 그들은 지금 어디로 떠난 것일까?  변화라는 말, 혹은 진화라는 말을 생각한다. 과연 우리에게 변화와 진화는 꼭 필요한 것일까?  그 변화와 진화라는 말 뒤켠에는 아마도 우리가 잠시도 떠나보낼 수 없는 어떤 것, 편리함이라거나 편안함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 편리함이라거나 편안함을 추구하면서 우리가 지나왔던 모든 것들은 하나의 추억, 하나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겠지... 처음 이 책의 소개글을 읽으면서 왠지 가슴이 찡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정말 그랬다. 그저 그런 만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짧은 흐느낌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일전에 아들녀석의 손을 잡고 인천에 있던 '달동네 수도국 박물관'을 찾았을 때도 나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었는데 이 책속에 들어서는 순간 글자를 따라가는 나의 눈길은 역시 더디기만 했다. 아픔일까?  작가가 말해주고 있는, 어쩌면 지금은 존재의미조차 희미해져가고 있을 대한민국 원주민들이 안고 있는 그 기억이라는 이름은 진정 아픔이었을까? 하지만 이 책속의 원주민들은 하나같이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진정 아픔은 아니었다고...

동네 어귀에서부터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바짝 긴장했던 기억이 내겐 있고, 기르던 개를 '퍽'소리나게 때리며 환하게 웃던  동네아저씨가 미워 그 날 이후로는 저만치에 아저씨가 보이면 인사 안하겠다고  되돌아갔던 기억도 내겐 있다. 눈만 오면 너도 나도 경쟁하듯이 연탄재를 깨뜨려대던 언덕길의 풍경도 이제는 저 먼 기억속으로 던져버렸는가? 똥퍼! 를 외치며  똥지게를 지고 가던 똥퍼아저씨.. 머리카락 팔아요! 하던 구슬픈 목소리의 주인공.. 칼 가알어~, 우산 고쳐어~~... 돌아보면 정겨운소리들이다. 돌아보면 가슴 켜켜이 쌓인 먼지 같아서 풀썩거릴 때마다 기침이 난다. 그런 시절을 살아냈던 사람들이 원주민이라고 한다. 어쩌다가 우리는 지나쳐버린 것에 대한 홀대를 배웠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지나간 것들이 있기에 지금이 있음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작가가 보여주는 시절속의 주인공들은 그런 세월을 살아냈으면서도 특별할 게 하나도 없다고, 이쁜 이야기만 그려달라고 한다. 뭐가 이쁜 이야기일까?  벌써 그렸다고 덤덤하게 한마디씩 툭 뱉어내듯하던 작가의 그 심중이 어찌보면 재미있기도 하다. 이렇다 할 그야말로 특별한 이벤트 한번 없이 살아냈던 시절이었음에도 그들은 그것이 행복이었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쯤에서 나는 또 나자신에게 반문해본다. 그 시절이 정말 행복이었는지.. 하지만 단연코 나는 그것이 행복이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저 그 시절에는 모두 다 그렇게 살 수 밖에는 없었던 거라고 위안삼아 투덜거릴 뿐이다. 

어쩌면 만화였기에 더 간절한 느낌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긴 장문으로 표현을 하든, 짧은 단문들이 서로 얽혀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든 같은 이야기였을지라도 단 한컷의 그림이 주는 느낌과는 판이하게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다보지도 말아야지 했던 기억속으로 다시한번 들어갔다 오니 새삼스러운 즐거움과 가슴아픔이 함께 뒤엉키고 말았다. 엉킨 실타래같은 가슴 한켠을 쓸어내리며 책장을 덮었지만 나는 그 시절속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내 지난 날의 그 기억들은 진정 행복이었을까? 되물어보지만 역시...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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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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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한다. 사전적 혹은 사회적인 의미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어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따로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조차도 왠지 웃음이 난다. 우리의 주인공 니은이 엄마,아빠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그 시간속에는 어른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 있다. 그 어른이라는 것이 어느 한순간에 습득해버릴 수 있는 자격증같은 것이라면 몇날 며칠을 밤새워가며 공부를 해서라도 그 자격증을 따고 싶은 게 그때의 니은이 마음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한꺼번에 너무 크게 다가온 상실감을 '이것이다'하고 정의내리기 전에 우리는 이미 그녀에게 이겨낼 수 없는 무게로써의 어른을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커다란 삽이 허공에서 나와 가슴을 한 삽씩 퍼내었다. 아픈 것도 아니고 슬프지도 않은데 심장을 한 삽씩 잃어버리는 허전함만 생생했다.(23쪽)
아픔... 그것은 아픔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게를 알 수 없는, 크기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우물같은 그 느낌속에 빠져서 헤어나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는 니은이를 통해서 몇년전 아버지를 보내드렸던 때가 생각났다. 다른 집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다 보지 못하면 눈을 감지도 못한채 헐떡이며 기다려주었다는 데 우리 아버지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가버리셨다. 위독하다는 말에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지 몇분도 안되어 나는 아버지의 부음을 들어야 했었다. 눈물조차도 없던 그 이별의 순간이 떠올랐다.  니은이에게 현실이지만 현실적이지 않게 다가왔던 부모의 교통사고 소식은 어쩌면 아무런 감정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나 자신 하나만의 감정속에서 허우적거렸다는 게 옳은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주변인물을 통해 들려 주었던 '어른이 되기 위한 작전'들은 차라리 눈물겨웠다.  장포수 할아버지와 왕고래집 할머니처럼 어떤 일이 내 앞에 놓인다해도 그저 무덤덤한 눈길로 바라보아야 할 것.. 무표정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 아프더라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

" 니은아, 니가 시원하게 못 울어서 몸이 아픈 거다. 슬픔이 몸 안에서 돌아다니면서 몸을 두드리는 거지" (64쪽)
정말 슬플 때는 크게 울어버리라고 했었다. 차라리 울어버리고나면 속은 후련할 거라고도 했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크게 한번 울지 못하는 니은이의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수증기를 내뿜던 압력밥솥..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니은이는 결코 울지 못할것만 같았었다. 아직은 니은이에게 달라붙지 못한 그 현실감각이란 놈이 저만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자기 몫의 슬픔이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서글픔 때문이기도 하리라.. 아직은 어린 니은이의 철없는 어른되기가 주변사람들에게는 안타까웠을까?  말없이 니은이의 슬픔을 대신 안아주었던 그들이 있었기에 허물처럼 그렇게 하나 둘씩 슬픔을 인정하며 벗어버릴 수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키우던 개가 할아버지 뱃속으로 들어가던 날 개뼈를 묻어주며 울어다는 이유로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고 했었다. 그리곤 20년동안을 한번도 울지 않았다던 엄마의 마음은 아마도 슬픔보다는 상실감이었을 게다. 자신의 마음을 잃어버린 상실감, 태어나서 온 마음을 다해 주었던 그 情을 잃어버린 상실감이 무엇보다도 컸을게다..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정해둔 규칙 같은 건 있어.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그 네 가지만 안해도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220쪽)
처용과 황옥놀이를 하던 엄마 아빠의 기억을 통해서, 그리고 처용포의 수많은 전설을 통해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설정이 내 가슴속에 너무 깊이 파고 들었다. 처음엔 그저 아이의 단순한 성장통이려니 하다가, 어른이기에 겪어야 했을 사회적인 모순성들에 아파했고, 그 모순들이 엮어내던 갖가지 삶의 형태를 받아들이며 제 몫으로 하기 위해 힘겨워하던 많은 사람들때문에 더 아파해야 했다.  고래가 죽어가는 순간 마지막 숨을 쉴 때 피가 섞인 빨간 물기둥이 솟아오르지, 그것을 우리는 꽃이 핀다고 말한단다... 그래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거저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루어지기 위해서 혹은 이루어내기 위해서 거쳐가야할 고통의 한 순간이 분명코 오리라는 그 진리.. 징징거려서도 안되고 변명하거나 핑계대지도 말며 잘 풀리지 않는다고 누군가를 원망해서도 안되는 그런 규칙들이 필요한 때, 바로 그런때가  어른되기 작전이 이루어지는 때가 아닐까?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일은 왜 중요해요?"
"그것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지. 잘 떠나보낸 뒤 마음속에 살게 하기 위해서다"
"나도 기억하는 방법을 몰라서 저 물건들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내 인생을 낡은 물건들을 쌓아두는 창고로 만든 셈이지. 잘 떠내보내고서 기억하고 있으면 되는 걸" (236쪽)
그랬던 장포수 할아버지도 자신속에서 살아숨쉬던 그 신화같은 삶을 잘 떠나보내지 못했다. 니은이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들을 살아내고서도..  이제 다시는 고래잡이를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래잡이를 하던 때의 자신과 떨어질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어느 새벽 그렇게 전설 같았던 할아버지의 고래배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삶의 버팀목으로써 그것들을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내고나서 기억하기 보다는 차라리 안고 사는 게 할아버지에게는 더 쉬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나가 버린 것은 전설이 된다. 우리가 사용하지 못하고 버린 시간이나 사용하고 버린 시간이나 똑같이 전설이 된다. 고래잡이를 하며 살아가던 마을에 비행기가 날았고 그 비행기가 정유공장을 토해냈으며 그 정유공장은 오염과 폐수를 토해냈다. 그 오염과 폐수로 인하여 자신이 살아왔던 시간들이 죽어버릴까봐 시뻘건 언덕위에 나무를 심던 할아버지.. 다시 아버지를 생각한다. 어쩌면 자식들 보기에 부족한 삶이었다기보다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던 그 옛날의 시간들을 용서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늘 아픔이었던 나의 아버지.. 어쩌면 내게는 또하나의 전설로 남아 내가 사용해야 할 시간속에서 불쑥 불쑥 그렇게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바다를 찾아다니는 파도가 되지 않을라고 그런다"
"파도가 바다를 찾아다닌다고?"
"우리 스님이 그러더라. 파도가 온 바다를 돌아다니며 보소. 이보쇼. 바다가 어디 있는지 아오? 그런다고. 내 평생 그 꼴이 아니었나 싶다" (246쪽)
너무 무겁다. 책을 덮었으면서도 나는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를 못한다. 너무 무거워서 다시  들어올릴 수가 없다. 니은이를 통해 들었던 처용포의 슬픈 이야기속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었다. 우리가 살아낸 시절속의 아픔,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지금의 시련, 우리가 살아내야 할 먼 시간속의 애달픔이 하나로 녹아져 있음이다. 니은이 얘기를 하는가 싶었는데 이건 내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다. 니은이가 겪어내야 할 운명같은 걸 말하는 줄 알았는데 이건 내 운명의 시간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장포수 할아버지를 대면시켜서, 왕고래집 할머니와 대면시켜서 나 자신을 한번 더 돌아보라고 한다. 바다를 찾아다니는 파도가 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어른일까? 내 삶의 등짐을 내가 지고 가니 나는 어른이 분명할게다. 그런데도 나는 그 신화같은 삶의 고리들이 싫을 때가 많다. 나이 오십을 바라보면서도 그 삶의 고리들이 하나씩 끊어져버렸음 할 때가 있었다. 이제부터라도 니은이가 기억하고자 했던 어른되기의 규칙을 나도 따라해봐야 할까보다.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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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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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언제부터 읽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책이었다. 아주 오랜동안을 책꽂이에 꽂힌 채 그 앞을 수도없이 왔다갔다 하던 나를 바라보았을 저 책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선은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알고 싶었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이웃종교로 읽는다는 그 다음말에 왠지 마음이 동했던 처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종교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가장 먼저 나는 왜?라는 질문부터 하게 된다. 그 끝없는 물음표들을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지?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하는거지? 하며 끝도 없이 나를 힘겹게 했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다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난무하는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로 아니 천당으로 가기 위한 길이 너무 많은 것이다. 하기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지옥이라 생각한다면 그 정도의 교회만으로는 천당가기 너무 힘들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 교회 한번 안가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성가대 생활도 오래 했을 뿐 아니라 학생시절에는 학생부 임원을 할 정도로 정말 열심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을까? 

종교라는 의미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왜 저렇게 형식적이어야 하는지, 왜 저토록 문자주의 혹은 율법주의라는 것에 얽매여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마음도 없이 그저 '믿음'이라는 글자 앞에서 벌벌 기다시피하는 그들의 모습이 나는 싫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인정한 것만이 옳다고 떠들어대는 그들이 모습이 나는 싫었다. 종교라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져 종내는 나의 마음을 편하게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너무도 많이 했었다. 또하나의 구속으로 존재하는 종교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다. 또하나의 구속이라는 말이 잘못된 것일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구속이란 의미로밖에는 보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종교, 과연 그것이 무엇이건데 이토록 나를 힘겹게 하는가!

큰 맘 먹고 책장을 펼쳤다.  모태신앙이었던 기독교인이 왜 불교에 관한 책을 써야 했는지, 왜 불교에 관한 공부를 해야 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기독교와 불교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종교관은 이런 모습을 해야 한다는 작가의 노력과 자부심이 가득하여 나도 함께 묻어가기에 너무 좋았다. 불교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동양의 불교, 서양의 불교 그리고 각 나라마다의 불교에 관하여 들려주시던 말들이 너무 편하게 다가왔다. 불교를 아는 것은 더 이상 불교 신자들만의 의무가 아니라는 말, 하나의 종교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와의 비교를 통한 분석과 이해가 필수라는 말('하나의 종교를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 많은 불교 서적이 출간되고 있지만 불교 이론을 설명하는 책의 대부분이 주로 불교 지도자들이 쓰고 있어 어려운 불교 용어와 사상을 쉽게 풀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것이 대부분이라 일반적인 (바로 나와같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 특히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넘나들면서 예로 들어주는 여러가지 해설은 평소 내가 했던 의문점에 대한 마침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경험하고 생각했었던 것들이 모두 이 안에 들어있었다.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두가지를 서로 어울려가며 같은 맥락으로써 읽을 줄 알았던 작가의 그 커다란 마음씀씀이에 나는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는데 하물며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커다란 일을 함에 있어서 외골수적인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가르침앞에서는 정말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오래 된 연못
개구리 뛰어든다
물소리 퐁당
- 일본의 가장 유명한 하이쿠 시인 바쇼의 작품(269쪽)

이름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장미라고 하는 그것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향기는 마찬가지
- 셰익스피어

저 두가지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점은 아마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아무 꾸밈없는 그 처음의 세계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속에서 모든 것을 찾으려고 하는 마음, 우리가 한번 건너뛴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곳의 진리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다는 느낌이었다. 어느샌가 내 손에는 볼펜이 들려져 있다. 그리고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과 같은 마음이 되어 있었다. 공감하며 읽어갈 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 편하고 좋았던 까닭이다. 그야말로 글자만 읽는 책읽기가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해가며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넓혀가고 싶은 욕심이었을 게다. 오로지 불교라는 종교의 배경과 특징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종교인이 되기 위해서 혹은 진정한 종교를 받아들이는 마음자세를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많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우리도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염원했던 부분은 바로 동야의 불교가 서양으로 넘어가서 자리를 잡게 되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정말 너무도 욕심이 나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왜 저렇게 될 수 없는 것일까?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하나, 기복적이거나 의례 중심에서 참선 혹은 명상 중심으로
둘, 스님 중심에서 재가 불자 중심으로
셋, 남녀 차별에서 남녀 평등으로
넷, 수직적  권위주의에서 수평적 대등관계로 (지도자와 불자의 위계적 차별도 적다)
다섯,가족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각자 개인의 종교를 인정해야 한다)
여섯, 종파주의에서 연합주의로
일곱, 종교적 고립에서 종교간 대화로
여덟, 사회 고립에서 사회 참여로

책의 307쪽에 나와있는 이 여덟가지는 서양 불교의 특징과 동향에 관한 이야기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서양불교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종교적인 입장을 대변하여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하고..  베트남의 유명한 틱낫한 스님께서 수행중에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나만 이렇게 수행을 해야 하는가 하여 참여불교를 말씀하셨다는 말을 보면서 참으로 놀라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의 세상속을 떠돌고 있는 모든 종교는 변해야 하며 또한 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일전에 TV를 통해 보여지던 광고가 생각난다. 성탄절에 스님들이 교회를 찾아가 함께 기뻐하고 석탄일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해주던 그 광고...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말이다.

개인적으로 산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산에 오를 때마다 수학공식처럼 따라다니는 산사에 머무를 때가 많았다. 잿빛 가사를 걸치고 하얀 고무신을 신은 스님들의 그 조용한 움직임, 지붕 한 귀퉁이에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아주 맑은 소리로 내게 다가오던 풍경의 속삭임이 너무 좋았다. 종교적인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 산사가 안고 있던 느낌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어느날 문득 불교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점을 찾았지만 그 딱딱함으로 다가오던 문자들이 내게는 너무 생소했다. 몇권을 책을 들춰보고 읽어보고 하기를 반복하다가 끝내는 빈손으로 나오기 일쑤였다. 왜지? 이래가지고 대중적인 종교라고 할 수가 있겠나?  참 바보같은 질문이었겠지만 왠지 내 가슴 한켠에 남아 나를 느끼고 있는 산사의 이미지와 불교라는 종교를 같이 묶어버렸던 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 어느 틈엔가 대웅전의 불상앞에서 절을 올리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실 어떻게 절을 해야하는지도 몰랐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옆의 아주머니가 하시는 모양대로 따라했을 뿐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 한쪽에 바람이라도 들어온 양 그렇게 시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인연이었을까? 그 뒤로도 나는 산사를 자주 찾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불교인이라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한다. 종교적인 면에서보다는 모든 형식을 떠나서 그저 나를 한번 더 돌이켜 생각할 수 있는 그 시간을 허락해주는 공간이 너무 좋았고 조용하게 주변을 위해 마음을 모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니 그저 좋을 뿐이다. 이런 내가 어찌 종교의 유무를 따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나에게는 정말 크나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었다. 메모를 시작하며 읽었는데 어느새 몇장의 메모가 생겼다. 책속에는 작가가 추천해주기도 했고 참고했다던 책들이 참 많다. 서점에 갈 기회가 있다면 메모를 들고 가 한번 더 찾아볼 요량이다. 그러고보니 어느샌가 인터넷 서점에 익숙해져버린 내 모습이 보인다. 발품파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종교인이라면 꼭 한번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 굳이 종교를 갖지 않아도 좋다. 읽어본다면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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