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가능성의 거리 문예중앙시선 6
박정대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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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능성의 거리 - 감정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내 감정 공산주의에 대해

 

 

 

 인은 이미지 자체가 한 편의 시다. 나는 솔직히 파르동, 박정대의 (미한지만, 박정대) 시가 좋은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의 시를 읽는 동안 내내 그가 분명한 시인이며, 집시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시가 마치 격렬한 쿠바 음악 같고, 때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의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의 음악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알고 있다. 시가 본질적으로 현재형이며, 앞으로도 내내 우리의 피에 흐르고 있는 미래지향적 음률이라는 측면에서. 그렇지만 지금 내가 그의 시를 빌어 쓸 이야기는 그의 시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에 대한 무한한 내 동경이거나, 동시에 그로부터 비롯된 깊은 좌절감일 터이다. 파르동, 여전히 시를 꿈꾸기만 시인이 되지 못한 이여.

 

 

  감정이 확장되어 감정의 무한에 당도할 때도 감정 공

산주의는 태동하지 않는다, 해상의 수평선과 지상의 지

평선에 당도했을 때 나의 생각이 그러했다

 

 

  어느 꿈결에 시가 물결처럼 내게 밀려들었을까? 고등학교 적 일기를 시의 형식으로 빌려 쓰기 시작한 그때부터? 아니면 혼자 룰루 여행을 떠나, 길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부르고, 길에서 잠들고 싶으면 잠들었던 그때? 그 어느 때 나의 감정이 무한에 당도하여, 해상의 수평선과 지상의 지평선에 당도해 보았을까? 공간을 한정 없이 떠돌았을 때 나는 홍길동이 되어, 축지법을 쓰고 있다,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공간이동 속에서 오히려 내가 느낀 것은 중력의 축복이었다. 결국 어딘가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그곳에서 감정은 무한하게 피어오른다. 무거운 중력으로 애련히 끓어오르는 감정의 확산, 세상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 대한 애도의 일기, 나의 생각이 그러했다.

 

 

  나는 자생적 감정 공산주의자

 

 

  감정의 무한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려는 것은 나의 본

질적 욕망일 뿐 소립자의 세계사 그 어느 페이지에도 감

정 공산주의는 기록된 바 없다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중력이 축복이라 말한들, 누군가의 표현으로 확장하여 중력이 은총이 된다고 한들, 세상 그 누구 하나 나와 공감해줄 이 없다는 그 사실을. 오래된 일기장 같은 곳에 볼펜을 휘휘 휘갈기며, 누군가를 위한 시를 쓴들,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기 위한 고결한 시를 써본다 한들, 그 누구도 나의 휘휘 휘갈겨 날려 쓴, 그래서 휘휘 날아 가버린 글씨를 알아볼 길이 없으며, 그 어느 누구의 배고픔도 결코 중력이 축복이 될 수 없으며, 중력이 내린 고통일 뿐이라는 그 사실을. 그렇게 나의 시는 의미 없이 사라져버릴 나의 욕망일 뿐이라는 그 사실을.

 

 

  담배를 피워 물고 저녁마다 감정의 확산을 꿈꾸는 나

는 자생적 감정 빨치산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마다 온 세계를 나의 감정으로

물들이려는 나는 극렬 감정분자

 

 

  그래도 갖은 욕망으로 쉬 잠들지 못하는 밤들, 피어오르는 것이 욕망인지 감정인지 구분할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밤들, 나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그대라는 타자인 대상에 나의 욕망을 투사하여, 나의 생명이 되지 못한 정액들로, 때론 쓸데없이 붉게 미처 날뛰는 나의 심장의 피로 그대라는 온 세계를 물들일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그렇게 단 한 밤, 단 한 밤, 그대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모든 날들이 그대의 날이 되어, 타자인 그대에게 투사된 내 모든 욕망들이 완벽히 소멸해버릴 수 있기를, 얼마나 꿈꿨는지. 불꽃처럼 피어올라 덧없이 사라지는 담배연기처럼, 그렇게 얼마나 나와 그대의 간격의 생멸을 꿈꿨는지.

 

 

  확장된 감정이 끝내 무한의 감정에 당도했을 때에도

나의 감정 공산주의가 한 일은 별을 향해 센티멘털 로켓

을 발사한 것

 

 

  그러니 언젠가 그 로켓이 또 다른 별에서 감정의 동무

들을 데리고 지구로 귀환하리라는 것을 안다

 

 

  꿈을 꿈꾸며, 존재하지 않는 그대를, 나의 누이를, 꿈꾸던 그 밤, 그 밤 내 꿈속에 홀연히 나타난 그대는 내가 밤새 뿌리쳐 내지 못해 뿌리내린 그대라는 환영, 잔상, 사념들, 그 모든 허튼 망상에 나는 ‘몽원’이란 이름을 붙여, 꿈속에서만의 바람이거나, 꿈속에서도의 바람이라고, 혹은 꿈의 근원이라고, 여전히 꿈동산에 머물러 그대에게 무한의 텔레파시를 보낸다. 그대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까? 그때 내가 부끄럽게 건넸던 그 편지를, 수줍게 띄웠던 엷은 미소를, 도망치듯 흘렸던 말들을, 시간이 지나도, 한 세월이 지나 꿈을 깨어도, 여전히 그대는 늙지 않고 그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는 그 사실을, 그대는 알고 있을까? 영원히 고착해버린 내 감정의 센티멘털을.

 

 

  본질적 고독이 세계를 물들이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파르동, 먼저 이렇게 인사를 할 수밖에, 그대여! 한 낮의 꿈을 꾸고서 깨어나 보니, 한 세월이 지나고도 또 한 세월, 더 이상 그 어느 누구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세월의 시대, 이제 그대를 향한 내 모든 시에, 나의 열정에, 그렇게 꼿꼿했던 내 고개에, 내 허리에 만성 통증이 생기고, 더 이상 잘라지지 않는 흰 수염이 자라나, 이제 그대는 나의 애도의 대상, 하지만 누군가의 말을 빌어 말할게요. <내가 뭘 잘못 했길래?> 그리고 이 말도 빌어 말할게요. <뭐 그래도 안녕> 더 이상 날 찾지 말아요. 어차피 난 혼자인 걸요. 그래도 혼자인 날 위해, 그대를 위해,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미루어두었던 시 하나는 여기에 남기고 싶어요.

 

 

  만약에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매일 동네 어귀에 트럭 한 대 대놓고서

  20년 동안 한결같이 회를 팔아온 아저씨의

  파닥파닥 물차 오르는 생선 대가리에

  탕탕 칼을 쏘고 쓱싹쓱싹 배 가르는 소리를

  시에 담아

  다리에 실금이 가 입원한 어느 어머님의

  못난 아들을 위해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병원에서 몰래 나와

  둔탁둔탁 걸어오는 석고붕대의 저린 발자국 소리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인 그대와 나의

  엷디 엷은 층층 사이 사이에 긴 다리를 놓아

  그대와 나의 체온 사이로 영혼의 습도를 녹여서

  겨울에 성에 낀 버스 창가에 그대 입김으로

  한여름 하염없이 창밖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 숨을 내쉬는 어느 아픈 소년의 숨결을 섞어

  시를 적어 놓을 수 있을 텐데

  만약에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그렇게 세상의 모든 고통의 멍에와 슬픔의 결들 사이에서

  한 마리 날아오르는 새가 되어 꿈이 되어

  차창 밖 갇혀버린 풍경들 속에 풍경화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잃어버린 표정들을 환하게 비추어

  되살려 놓을 수 있을 텐데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P.S.

 

 

  굵은 글씨는 시인 박정대의 시집 ‘모든 가능성의 거리’와 ‘체 게바라 만세’에서 인용한 글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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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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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중심으로 글의 스타일에 관해

 

 

  모임을 통해 처음으로 나는 이번에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접하게 되었다. 사실 오랫동안 문학을 등진 채 (특히, 한국문학을) 살아온 내가 뭔들 읽어봤을까, 스스로 한심스럽기 그지없지만, 여하튼 이번 계기를 통해 그동안 평소 귀에 익었으면서도 굳이 찾아보지 않았던 내 또래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요즘의 문학적인 유행을 나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비평은 개인적 소감을 중심으로 하되, 각 글의 스타일적인 면을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각각 짚어보고, 기호의 여부를 떠나, 개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고 싶다.

 

 

  먼저, 순차적으로 책을 읽기도 해서 그랬지만, 글을 다 읽고 나서도 단연 눈에 띄었던 작품은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였다. 하지만 이 표현은 다소 양가적인 측면이 있기에, 아마 내 비평도 내가 개인적으로 다소 싫어하는 양비론적 비평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사실, 읽기 전 작가 소개부터 눈에 띄었다. 후장사실주의자? 이름부터 조금 거시기한데, 그걸 왜 굳이 작가 소개에 썼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저 후기 사실주의자의 다른 말인가, 하는 정도로 넘겼다. 그런데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무언가 분명한 의도성이 다분히 느껴졌다. 일단, 글 자체가 거의 쉽게 읽히지 않는 글이었다. 물론,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숱하게 열거되고, 나열되는 건축가의 이름들과 건축기법 그리고 미술기법에 대해 공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문제는 ‘숱하게 열거되고, 나열되었다.’는 그 방식 자체에 있었다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보통 소설은 가령 그것이 과할지라도 자신이 쏟아낸 지식의 열정을 어떻게든 주워 담아, 수습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예가, 아마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책을 통해서 평범한 우리들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지식의 해저 속으로 빠져들어, 다시는 떠오를 수 없거나, 아예 미리 발을 대보고 발밑을 헤아리기 어려워 다가가길 포기해버린다. 그것은 그의 지적인 열거방식이 단순히 열거에서 끝나지 않고, 그 격하게 뿜어낸 지적인 배경들을 그의 글속에서 그가 어떻게든 수습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처음 그 광대한 넓이에 혹해 다가서보려 하지만, 그 깊이에 질색해 슬며시 발을 빼게 된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렇기 때문에 에코의 세계는 중세라는 철저하게 마술적이고, 종교적인 시대로 국한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은 분명히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 이미 중세라는 시대를 ‘암흑’으로 규정짓는 것을 넘어서, 현대가 현대후기를 말하고 있는 시대이다. 왜 모던을 살고 있는 우리가 모더니즘이 아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왜 예술이 예술을 부정하고, 그 부정한 예술을 다시 부정하는 이런 시대에서 우리가 말하는 예술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런 시대에서 문학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이러한 질문이 배경이 된 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이구라는 포스트 모더니스트가 되지 못한, 마지막 모더니스트를 통해 ‘벙커’ 속에 들어간 우리의 자화상을 풍자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김중업과 고든이란 인물을 통해 도시개발로 대변되는 모던주의 건축을 비판하고(김중업), 자르고, 대항하려(고든) 했는지도 모르겠다. 또 여기에 박정희 시대의 김현옥이란 인물을 통해 서울의 공간과 이구의 제자 김원을 통해 뉴욕이란 공간의 비교를 통해 또 하나의 극명한 대척점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정말 ‘모르겠다.’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결국 전적으로 이 글이 취한 구성방식 때문이다. 겨우겨우 이 글을 다 읽고서 나는 처음에 작가가 일종의 ‘콜라주 기법’을 소설 속에 적용하고 싶었나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내 눈에 거슬렸던 ‘후장사실주의’란 용어가 번뜩 떠올랐다. 그래서 이제껏 거의 잘 보지 않았던 작가 후기와 작가 인터뷰까지 찾아보면서, ‘후장사실주의’가 뭔지 알아봐야만 했다. 그렇지만 허세 가득한 (개인적인 느낌에 정말로 자뻑과 후까시로 일관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후장사실주의’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영어버전의 위키백과를 뒤적거리며, 대충 파악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요지는 ‘후장사실주의’가 일종의 ‘Neo-Dadaism'이란 결론이었다. 뭐, 사실 남미에서 초현실주의에 반대해서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동아시아로 넘어와 후장사실주의가 됐다느니, 하는 정의가 있긴 했지만, 별로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다. 물론, ‘새로운 다다이즘’에 대해서도 내가 제대로 이해하는 바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그 맥락을 따라 나온 백남준의 작품들과 비틀즈의 존 레논의 아내였던 요코의 전위예술에 대한 어설픈 기억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도 20대 때 이후로 거의 소실해버린 기억의 편린일 터이다. 하지만 결국엔 그 모든 예술적 행위들이 상업적으로 변질해가는 예술에 대해 반대하는 일환의 운동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하기에 수백 대의 TV를 (이 게 더 상업적이라 개인적 생각도 있지만)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TV에 갇혀버린 현대인을 풍자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았을 때,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분명히 새로운 시도였다는 점에서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예술이 반예술을 추구하면서 대중들에게 고립되어가고, 오히려 일부 향유층을 위한 예술로 전락해버린 것처럼, 문학이 반문학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달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글의 소재는 이구라는 설정 상 한국인도 이방인도 아닌 대상을 씀으로써, 무언가 아시아적 정서를 배양하려했음은 분명하지만, 그 놀음방식 자체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를 외면한 서구적인 예술론에서 출발해서 끝났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과정이라면, (작가가 충분히 젊기에) 그래서 작가가 조금 더 아시아적인 한국적인 정서 하에서 새로운 형식을 추구해나갈 수 있다면, 우리도 세계에 우리만의 문학형식이란 걸 하나쯤 내놓을 수 있겠다는 기대도 품어보게 된다. 마치 일본의 오에겐자부로처럼, 서구의 기독교 사상을 철저히 일본의 신화로 재해석한 그의 방식처럼. 혹은 미시마 유키오의 아시아적인 미적 의식처럼. 하지만 저자가 계속 지금과 같이 허세 가득한 ‘후장사실주의자’란 트레이드마크를 붙잡고서, 대중을 외면하려고 한다면, 실제 ‘후장사실주의자’의 모태가 된 비현실주의의 책들처럼 어느 농부들의 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지돈의 글을 읽고서, 바로 이장욱의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읽고 느낀 점은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평이한 문장과 평이한 구성으로 글을 써서, 읽기는 쉬웠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별로 가슴에 남는 문장이 없었다. 윤이형의 ‘루카’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이 책속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다. 소재는 ‘퀴어’라는 특수한 소재를 담고 있었지만, 근래 유행하는 소재주의 소설과 달리, 철저하게 연애소설이었다는 점이 아마 내 정서와 맞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초주의로 가득한데다 사랑에 다소 냉소적인 정서가 팽배한 내 개인이, 정반대급부인 순정적인 여자정서와 오직 순수한 사랑에 대한 열정 때문에 누군가를 증오할 수 있는 정서의 이 글을 읽었을 때 대비되는 감정선에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누군가를 증오할 만큼 사랑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기존에 윤이형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열정을 이 작품을 통해서 느꼈던 것 같다. 최은미의 ‘근린’의 경우 매우 구성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여러 인물의 배치를 통해 감정을 배제한 문장으로도 묘한 긴장을 일으키는 능력은 애초에 이 소설이 얼마나 구성에 공을 들였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들이었다. 하지만 대개 구성에 초점을 맞춘 글들이 그러하듯이, 이 글이 독자에게 저자가 의도한 빈 벤치에 대한 감동이나 여운을 얼마나 남겼을 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김금희의 ‘조중균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분명 진부한 설정과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 지나간 세계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름 재밌게 읽혔다. 그 이유는 캐릭터에 대해 생명력을 작가가 잘 부여한 까닭이라고 여겨본다. 손보미의 ‘임시교사’의 경우도 ‘조중균의 세계’와 같이 캐릭터가 잘 살아있는 작품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보다 풍자적인 요소를 갖춘 세련된 소설이란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조중균의 세계’처럼 직접적으로 감정에 호소하기보다는 P부인의 내밀하고 섬세한 감정선을 담담하게 표현함으로써 뒷맛의 씁쓸한 풍미를 남기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소재적으로도 지나간 세계가 아닌, 지금의 세계, 그리고 앞으로의 세계에 대한 풍자가 그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본다. 마지막으로, 백수린의 ‘여름의 정오’는 가장 잘 쓰인 전형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지나친 전형성을 싫어하지만, 이 글에서의 전형성은 전혀 그러한 느낌은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아귀가 잘 들어맞으면서도, 내내 흥미를 유발시키는 구석이 있다는 전형적^^; 표현이 좋을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소설이 내 가슴에 와 닿았던 점은 누군가의 생의 안부를 묻는 방식이었다. 우연히 닮은 이름을 뉴스에서 보고서 혹은 갑자기 911테러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형체를 보면서, 죽어간 이를 추모하고, 위태로웠던 이에 대해 걱정하는, 보통 우리네들의 안부를 묻는 방식이 글속에 표현되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독자를 공감하고, 동시에 독자에게 공감 받을 수 있는 글쓰기 방식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이제 대강 정리를 해봐야 할 거 같다. 처음 의도와 달리 다소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에 대한 평에 치우치다보니, (다소 예감은 했지만) 다른 소설들의 전체적인 글쓰기 방식을 면밀하게 살펴보지 못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렇지만 근래 내 또래의 젊은 작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글쓰기를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음에는 분명한 것 같다. 각자의 방식으로 기존의 틀에 대항하면서, 때론 융화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 비록 여전히 아마추어지만,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내내 아마추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도 주어진 하나의 숙제일 거란 생각을 해보며, 부족한 평을 이만 줄여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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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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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종교적, 철학적, 문학적 배경과 의미를 중심으로

 

 

 

  내 삶의 시기에서 여러 가지 굴곡이 많았지만, 그 모든 굴곡의 계기를 마련해준 결정적인 시기는 아마 신학교 1학년 때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특히, 신학교 1학년 2학기 때에 나는 여러 가지 방면으로 내 생각의 기반들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방황의 전조를 스스로 예감하게 되었다. 1학년 들어서자마자 한 달도 채 안 되어 모든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들어간 소위 운동권 동아리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1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 나와야만 했다. 그리고 2학기 때 들어간 동아리도 사실은 그 나물의 그 밥이었다. ‘새날을 사는 사람들’이란 동아리에서 ‘평화의 일꾼들’이란 동아리로의 방향 전환? 이름만 들었을 때는 역시 같은 운동권 동아리였고, 추구하는 바도 1학기 때 들어갔던 ‘새날을 사는 사람들’이란 동아리와 거의 방향성이 같았다. 다만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구멍이 숭숭 뚫린 여백투성이의 동아리였다고 하면 표현이 딱 맞을까? 선배들은 그 전의 동아리 선배들과 같이 신학, 역사, 철학을 위주로 하는 여러 가지 커리큘럼으로 우리들을 학습시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학습의 내용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거의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의 주도하에 학습하기를 바랐다. 아니, 실상은 선배들에겐 우리들을 자기들의 생각으로 물들일 만큼 강한 카리스마와 열정이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나와 동기들은 그 아래서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 경우에는 오히려 1학기 때 선배들에 의해 타의에 의해 혹독하게 학습했던 때보다 더 많은 공부를 스스로 해나갈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공부내용이 소위 자유주의라 불리는 현대신학과 포스트모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철학이어서, 지금에 돌이켜봤을 땐 다소 고대와 중세라는 뿌리를 잘라내고서 건너뛴 감이 없지 않아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때문에 스스로 여러 생각의 갈래들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하튼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아래에서 동아리 안에 함께 하던 우리 동기들은 끈끈하게 뭉쳤다. 사실, 다른 동기들이 나만큼 열정을 갖고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 어느 누구라도 어떤 열정과 꿈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동아리 내에 우리 스스로 ‘Holy Club'이라는 모임을 따로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유치하지만, 당시에 우리는 자유로운 학문을 추구하면서도 경건함을 유지하자는 의도로, 감리교도의 뿌리가 되었던 웨슬리 형제의 ‘Holy Club'이라는 모임에서 그 이름을 따와, 그런 모임을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라서인지, 같은 동기들끼리만 모여서 그런지, 처음의 의도와 달리 나중엔 모임에서 여자 얘기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다. 여하튼 그럼에도 처음에는 나름 매 주 책 한 권씩을 정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는 했다. 그리고 그 첫 모임에서 우리가 다루었던 책이 ‘장미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너무 길고 어려웠기 때문이었을까? 거의 제대로 읽어온 사람이 없었다. 내 경우에도 읽어보려 했지만 처음부터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우리는 종교개혁에서부터 갈래를 둔 장로교파의 신학생들이었기에 가톨릭 역사에 대해 거의 피상적으로만 접했을 뿐, 제대로 배워본 적조차 없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가톨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많은 수도원을 전전해온 현재의 나조차도 너무나 국소적인 가톨릭의 역사와 철학을 다룬 이 책을 다시금 이해하는데 꽤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니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가 이 책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저 피상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염불 외우듯 이야기하며, 소설의 구성의 특이함에 대해 흥미를 나타냈던 것으로 기억될 뿐이다. 어리긴 했지만 신학생이었던 우리가 이 정도였는데, 다른 사람은 어떨까? 과연 이 책에 대해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을까? 이 책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는 할까? 아니, 굳이 이해해야 하는 걸까? 종교도 없고, 철학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문학적으로 단순히 풀기에도 이 책은 너무나 종교와 철학이라는 비문학적인 요소가 많다. 그러하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 방대한 책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잘 감이 잡히질 않는다. 분명히 종교, 철학, 문학적으로 그 의미를 나누어서 살펴봐야할 것은 분명하지만, 따로 때어놓고 설명하다보면 그 밀접한 관련성을 놓치게 될 것이고, 같이 엮어서 설명하기엔 너무 방대한데다 내 역량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어쩔 수 없이, 일단 내 개인적 역량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종교적, 철학적, 문학적으로 나누어 설명하되, 나름 밀접하게 관련시켜가면서 이 책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배경은 책에서도 나와 있듯이 교황 요한 22세가 재위했던 14세기 초로 보아야할 것이다. 이 시기는 두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 먼저 시기적으로 이 시기는 15세기 중엽 르네상스가 발흥하기 전, 그 태동기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인 아비뇽 유수 이후 쇠약해진 교황 권력에 대해 교황들은 큰 위기감을 느낀다. 이 책에서도 잘 소개되어 있지만, 그 대표적인 예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청빈 사상의 대두이다. 사실 어느 시대나 수도사상은 청빈사상과 관련이 있어왔다. 로마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억압을 끝으로 순교라는 종교적으로 자기 생명을 바친다는 가장 위대한 개인적 헌신이 사라지게 되자,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을 바친다는 의미로 사막에 몰려들게 들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개인적 극기와 청빈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려 하였다. 다만, 초반에는 각자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려던 것이, 여러 사람이 모이면서 공동체를 이루게 되어, 수도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수도회 초기 역사는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기도가 노동이며, 노동이 기도다.’라는 격언과 함께 자급자족을 유지해가면서 자신들의 기도의 삶과 성서읽기의 삶을 실천해나가려고 했던, 청빈 그 자체의 삶을 유지해나갔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거룩한 성직자들의 노동을 만류하면서, 수도원 스스로 노동을 포기해가면서 부패해갔다. 물론, 주변의 농민들의 성직자에 대한 헌신은 아마도 로마의 멸망 이후 5-6세기부터 지나치게 확대된 교회 권력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유럽이 봉건제도의 사회가 되면서, 종교에 대한 권력이 황권에서 교권으로 넘어간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교회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그 고유의 기능을 넘어서 변질되어지게 된다.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먼저는 교황권력의 확대로 인해 일종의 각 지역대표의 세계종교회의였던 공의회의 성격이 변하게 된다. 그전까지 교회는 교회의 교리적이거나 역사적으로나 문제가 있을 때마다 공의회 소집을 통해 문제를 회의하고, 해결해나갔다. 그런데 교황권력의 확대로 인해 교황무오설이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교리가 등장하면서, 민주적인 공의회의 권력이 무색해져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종교재판의 성격도 변하게 되었다. 그전까지 종교재판은 다소 틀린 교리에 대해 이단으로 파문을 할지라도, 그것이 말 그대로 파문일 뿐이지, 실제적인 형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그전까지는 어떤 지역의 대표가 교리적 문제가 있으면, 그 지역에서 목회를 못하게 하는 것으로 끝이었지만, 교황권력이 무소불위가 되면서 한 번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면, 그것은 이제 극심한 고문 끝에 화형이라는 죽음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교황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11세기에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면죄부를 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발언을 했더라도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었겠는가? 왜냐하면 교황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였던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성서에서 이르길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그가 지상에서 축복하면 하늘에서도 축복할 것이고, 지상에서 저주하면 하늘에서도 저주할 것이라는 특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에 대해 내가 앞에서 ‘교황무오설’이 전혀 출처도 없는 사상이라고 비아냥거리기는 했지만, 실제 그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고, 지금도 가톨릭에서 ‘교황무오설’의 근거는 이러한 성서의 글귀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찌됐든 이러한 모든 교황의 절대적인 권력도 십자군 전쟁의 연이은 패배와 함께 점점 퇴색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비뇽유수라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출발한다. 아울러 여기에는 지금까지 언급된 두 가지 내용이 엇물려,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먼저는 이러한 교황의 절대 권력에 반대하여 등장하게 된 프란체스코회의 극단파에 대한 내용이고, 여기서 꼬리를 잇게 되는 중세 말기의 뜨겁게 논의된 그리스도의 ‘사용권’과 ‘소유권’에 대한 문제, 그리고 ‘교황무오설’과 ‘공의회우위설’에 대한 논쟁이다.

 

 

  소설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그리스도의 ‘사용권’과 ‘소유권’에 대한 문제는 프란체스코회의 극단적 청빈파에서부터 문제가 비롯되었다. 그렇지만 이미 말한 대로 모든 수도회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삶을 온전히 따른다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하기에 ‘청빈’이라는 것은 너무나 그들에게 당연한 교리였고, 특히 탁발수도회였던 ‘프란체스코’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명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의 교권이 썩을 대로 썩어있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극단적 청빈파의 경우 기존 사제의 성찬례를 인정하지 않는 사례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로선 쉬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성찬례’라는 자체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대신해 포도주와 떡을 나눔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예배의 중심이다. 그런데 사제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그 성찬례를 거부한다는 것은 기존의 교회와 결별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성찬례를 집전하는 사제를 공격하고, 교회를 점거한다면, 어떻게 기존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명백하게 교황에 대한 도전이며, 나아가 그리스도에 대한 불경죄가 성립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요한 22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자신의 교권을 확립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청빈 사상을 실천하는 프란체스코회 25명을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그 중에 4명을 화형시키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이 책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프란체스코의 청빈파에서도 극단파는 소수였을 뿐이고, 대부분은 온건파였다. 그래서 이에 대해 당시 프란체스코회의 총장이었던 미켈레는 교황과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아비뇽으로 향하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 교황을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이탈리아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요한 22세를 ‘공의회우위설’을 근거로 공의회에 고발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후 프란체스코의 청빈파의 지도적인 노수도자였던 카잘레의 우베르티노는 1329년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요한 22세의 나름의 사정이 있기는 했다. 당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교황권으로 인해 아비뇽에서의 교황청은 재정이 바닥이었다. 때문에 요한 22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교권확립과 더불어 교황청의 재정을 복원시킬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더욱 프란체스코회의 청빈파가 눈에 가시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요한 22세는 가톨릭 교회사적으로도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다. 때문에 요한이라는 교황의 이름이 그 이후에 사용되는 요한 23세가 등극하기까지 약 7세기의 시간이 필요했다.

 

 

  종교적인 배경은 이쯤으로 하고, 철학적인 배경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어찌됐든 이 책의 키워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그것도 존재하지 않는 ‘시학’ 2장 ‘희극’에서의 ‘웃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실 이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이라는 가설이 있기 때문에, 철학이라기보다는 문학적으로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하기에 이 부분에 관해선 차후에 더 다루어보기로 하고, 먼저 중세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정리해보는 것이 책을 이해하는데 한결 도움이 되리라 믿어보며,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사실 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중세는 말 그대로 ‘암흑의 시대’이다. 그러하기에 철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굳이 중세를 공부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된다. 너무 종교적인데다가, 그냥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로저 베이컨(물론 중세 사람이지만), 데카르트로 넘어가도 철학을 이해하는데 하등의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라는 시대는 유럽의 6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약 1000년의 시간이다. 이 긴 시간을 역사 속에서 지운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며, 때문에 의미 없다고 말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 말이 안 되는 의미일 것이다. 즉, 어찌됐든 간에, 중세에서도 철학은 지속되어져 왔다. 물론, 그 중심에는 ‘플라톤’ 사상이 축을 이루고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개념은 보이지 않는 ‘천국’과 ‘진리’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할 수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초기 기독교의 사도 시대가 끝난 후 교부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성 어거스틴’의 경우 플라톤의 이러한 사상을 엮어 그리스도의 사상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유독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의 경우는 교회와 줄곧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 10-11세기 유대 철학자들과 이슬람 철학자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 책들이 대거 유입되어 들어오기 전까지, 거의 금서에 가까웠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중세시대의 학자들이 전혀 접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강한 ‘플라톤주의’의 색으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배격했다는 것뿐이다. 실제로 10-11세기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들이 대거 유입된 이후에도 교회는 그와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그래서 13세기에 모든 신학과 철학 사상의 중심이었던 파리대학과 옥스퍼드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공연하게 강의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이미 파리를 중심으로 한 대학에서의 지적인 열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열망에 가닿아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들이 하는 토론의 중심엔 늘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근거로 하는 논증법이 공공연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철학의 기저를 이루는 ‘형이상학’의 문제였다. 플라톤만 해도 자연보다는 자연 우위에 있는 ‘이데아’라는 개념을 상정하여, 기독교 형이상학과 원만하게 병행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플라톤 철학에 반대하여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그러한 ‘이데아’를 부정하고, 자연 개체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었다. 때문에 모든 자연의 사물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분류를 묶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근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자연과 만물에 초월한 신에 대한 개념과 대립되게 된다. 때문에 교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것은 어떤 면에서 쉬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미 공공연하게 퍼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언제까지 금기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등장한 것이 중세의 스콜라 철학이다. 스콜라 철학은 간단하게 말해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란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철학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의미한다. 즉, 언제까지 철학을 금기시할 수 없던 교회에서 입장을 바꾸어 철학과 신학의 종합을 시도했던 것이 ‘스콜라 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스콜라 철학’의 대표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리고 그가 당시 모든 학문의 중심지였던 파리 대학의 철학교수라 활동했던 시기가 13세기 말엽이었다. 물론 그곳에서의 그의 삶은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그의 노력으로 인해 철학과 신학의 타협은 13세기 말엽에 극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철학과 신학을 따로따로 분리시켜서 자연에 대해선 철학, 나머지 영역에 대해선 신학이라고 설명하고서, 종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책의 배경이 되는 14세기에 이르면 철학적으로 신을 입증하려는 모든 시도 자체를 거부하는 ‘유명론’이 등장하기도 하고, 동시에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연과학적으로 신을 입증하려는 영국의 ‘경험주의’ 사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주인공의 스승인 윌리엄이 영국의 경험주의를 대표하는 ‘로저 베이컨’의 제자란 사실은 이 책이 실제적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논외로 하더라도,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주인공의 스승을 통해 투영한 이 책의 사상의 근저가 철학적인 이성보다는 입증 가능한 경험 하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당시의 종교적인 현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우리와 가장 흡사한 시각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부터 사실상 거의 결론과 다름없는 본론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왜 하필 이 책은 많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중 ‘시학’에 대해서 다룬 것일까? 그리고 그것도 존재하지도 않는 ‘시학’의 2부 ‘희극’편 ‘웃음’에 관해서 다룬 것일까? 사실, 시학을 읽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본격적으로 ‘비극’에 관해서 말하기 전, 서두에 시학이 다른 문학과 달리 운율을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소재를 다룬 측면에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자연을 모방하여 나타낸다는 측면에서,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비극’과 동시에 ‘희극’에 대해 비교하여 다루고 있다. 그리고 ‘희극’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웃음’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비극’과 달리 어떻게 이야기 구성과 담화로 발전했는지는 모른다고 나오며, 다만 고대 아테네에서 집정관들의 허락 하에 희극이 성행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아테네의 희극은 아마도 메가라라는 지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을 남근사상과 함께 디오니소스 축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즉, 일종의 열광과 도취 상태의 의식인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온 것으로 유추함으로써 희극을 비극보다 다소간 덜 발전된 형태의 극적인 형식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실제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을 그때까지 가면을 쓰는 방식으로 인간의 왜곡된 형태와 추악한 형태를 웃음이라는 가벼운 형식으로만 다루었을 뿐, 진지하게 발전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진정으로 인간의 본질을 다루기 위한 복합적인 서사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비극이었다고 그는 생각한 듯싶다. 실제로 당시 고대 그리스의 희극엔 일종의 이솝우화와 같은 이야기는 존재했지만, 3대 비극 작가와 같은 쟁쟁한 작가들이 등장하지는 않았다. 즉, 이 소설에서 가정하고 있는 ‘시학’ 제 2장에 나오는 ‘웃음’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소설적인 상상력이라는 말이다. 사실 이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먼저는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적인 철학사상이 중세시대에 ‘스콜라 철학’이라는 종합의 형태로 타협가능 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키가 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순히 자연의 사물 개체를 분석하고 분류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서열을 나눔으로써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대상인 자연이라는 가장 최상위 그 위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소설의 핵심에 대한 이해이다. 사실, 지금 이 소설에 대해 역량이 되지 않아, 평론이 아닌 배경 소개를 하고 있지만, 그렇게 된 이유는 이 소설이 소설적 가치를 스스로 드러내기보다는 너무나 많은 종교적 철학적 관심을 열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 소설을 읽다보면 이게 정말 소설책인지, 아니면 중세철학책인지, 실제와 허구 사이에서 길을 잃게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 존재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장 ‘희극’편의 ‘웃음’에 관한 이야기는 말 그대로 어디까지나 가정이며, 상상이기에, 이 책이 문학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왜 하필 ‘웃음’에 관한 이야기였을까?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잡설들을 열거하였지만, 이 글의 핵심은 ‘웃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이 책에서 말하는 그리스도가 진짜로 웃었느냐, 웃지 않았느냐, 뭐 이런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사실 그 이야기는 교회 종탑 꼭대기에 천사가 몇 명 서있을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소비적인 논쟁일 뿐이다. 그러하기에 이 책의 핵심은 왜 저자가 존재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부 ‘희극’편에서 ‘웃음’에 관해서 다루고, 이야기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사실, 많이 돌아왔지만,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엔 금욕과 정절 등으로 점철된 중세에 대해 ‘웃음’으로 풍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즉, 이 글에서 ‘웃음’이란 ‘금욕’이란 키워드로 대변되는 중세시대의 종말에 대한 예견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대한 새로운 키워드로써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끝으로 장미라고 불리는 이름도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결국 책에서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로 국한시키는 것보다는 ‘웃음’이라는 더 큰 키워드로 풀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P.S.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과 관계없이 종교적 측면에서도 이 글은 내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 있었다. 특히, 프란체스코의 청빈파와 세속적인 교황의 대립이라는 측면이 내 개인적인 맥락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아마도 나는 스무 살 적 방황을 시작할 때 프란체스코의 청빈파가 주장하는 그러한 맥락 하에 있었던 것으로 회고해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청빈파의 맥락은 ‘진리’와 ‘전통’이라는 맥락보다는 ‘진실’과 ‘개혁’이라는 맥락에 늘 서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또 다시 아이러니한 것은 결국 프란체스코회는 여전히 존속하고 그 ‘청빈’의 사상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지만, 결국 청빈파의 극단세력은 사라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결국 교황이라는 다소 세속적인 종교집단이 진리라는 명목 하에 자신의 ‘전통’을 고수해왔고, 그로인해 결국엔 지금의 온건한 프란체스코회를 포용하여 그 청빈사상을 존속시켜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내 개인이 종교로부터 돌아서게 된 것은 내 극단적 성격으로 인해 ‘진리’와 ‘전통’에 대해 어느 정도 타협하려는 의지를 갖지 못하고, 모든 ‘진리’와 ‘전통’을 세속화되었다는 시각으로 싸잡아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세속화 된 것은 인간이지 ‘진리’와 ‘전통’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청빈파의 극단적인 무리들은 사제들을 교단에서 몰아세웠고, 나는 교회를 떠나버렸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종교의 속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사람들이 끊임없이 목말라하고, 동시에 고뇌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의문부호를 달아보며, 길고 길었던 잡설을 마쳐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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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6-18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오랫만에 장미의 이름˝과 재회 군요. 며칠째 밤을 계속 새워 멍..한 상태라..마지막 즈음, 웃음에 왜 희극이냐- 를 나름
답해야 겠다, 했는데 정리가 안되는 군요.대충 말하자면 비극은 지옥과 현실을 웃음은 희망,스스로 구원이기 때문에 교회
가 힘을 발휘 할 능력 상실을 상징. 장미란 여성과 행복, 스스로 찾는자유 질서 .있어서는 교회에 반하는(수도원에서 특히)
때문에 [장미 의 이름]이란 제목 이 된 것이 아닐까...강제하기 위해 비극과 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필요악 인 셈이죠. 희
극이야 말로 선한 힘, 뭐,그래서 피니스아프리카에 (세상 끝의 도서관 온갖 세계의 책은 전부 다 있다는 수도원의 장서각)
는 불꽃을 피우리라~ 로 그럼 범인은? ...안 알랴줌....ㅎㅎㅎ 이미 아실테죠?!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오래되어
이 얘기가 맞는지도 자신없는데..최근 절대지식 세계고전 을 읽어둔 것도 조금 이랑, 몽원님의 페이퍼글을 읽어 조합해서
결론 끌어내기..해본..것에 불과..^^ 그럼 곧 이 번 주도 끝나가는 군요..마지막 월말까지 마무리 잘하시고 장마,메르스 에
건강 잘 챙기시길..또 정신 좀 차리면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은하루 되세요~

몽원 2015-06-22 03:55   좋아요 0 | URL
좋은 댓글로 깔끔한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글을 쓰느라, 여기 자주 들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젊은작가상 받은 작품들과 시집 읽고 서평 쓸 생각이라.. (젊은 작가상 작품집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 님 서재에도 있어서 어차피 말씀드리려 했지만^^;) 여하튼 금방 찾아뵙겠습니다. 꾸벅~
 

 

 

 

봄시

 

 

봄소식을 알리고 싶어요.

꽃시로 꽃씨를 뿌려

연두빛 싹을 틔우고

하얗게 연붉게 수줍은 꽃잎들을

거리에 마구마구 흩뿌리며

미친년처럼 동네바보 형처럼

봄소식을 알리고 싶어요.

누가 들어줄 것도 아닌데

봄이 온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봄이 왔다고

봄, 봄, 봄이 왔다고

아가들에게 살짝 윙크를 하고

아가씨들에겐 잿빛 재킷 대신

새하얀 블라우스에 꽃주름 치마를

아저씨들에겐 검은 양복 대신

푸른 셔츠에 연보랏빛 청바지를

입혀주며 봄을 알리고 싶어요.

바람이 아직 시리다하면

정오에 따사로운 햇발에

눈을 감고서 녹아내리는 꿈꾸며

살며시 스며드는 셔츠 사이

바람의 애무를 느껴보라고 싶어요.

그렇게 야한 농담처럼 진담처럼

봄이 왔다고

봄, 봄, 봄이 왔다고

설레발치며 온 동네 온 세상에

봄소식을 마구마구 알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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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3-26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이르다.고
춘분이 지났을 뿐
꽃샘은 아직아직 남았으니
서둘지말라고
말간 유리창 너머 로야 따사로울 듯
신발을 끌고 나가고 싶어지지만
이제 겨우 태양은 적도를 따라 걷기를
반 접어 주었을 뿐...
하루 만큼씩 낮이 길어지겠고
태양이 머뭄이 적도위에서 부터 예열을
해 댈 것이니 바람은 사납겠죠..
성질 급한 꽃이 먼저 바람 맞는건..
별 수없겠고.

몽원 2015-03-26 17:55   좋아요 1 | URL
^^ 댓글이 더 멋진 시라 제가 덧붙일 말이 없네요~. 조금 성질 급한 꽃쯤으로 여겨주시길. 그래서 설레발 치는 ㅎㅎ

[그장소] 2015-03-26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랄것 은 아닌데..^^;
오늘 알았는데..꽃샘이..꽃을 샘내서 꽃샘이..아니고..꽃을 세움 이어서..꽃세움추위 ..랍니다.

춘분만 알고..꽃샘을 몰랐던..반쪽만.안.

몽원 2015-03-27 22:58   좋아요 1 | URL
몇 년 전 저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쓴 글을 댓글로 달아봅니다.^^;


꽃샘

그대, 모든 꽃들을 시샘하여
꽃밭에 불 지르려고
아직도 가시지 않은 서슬 퍼런 바람으로
앙칼지게 몰아세우고
눈 섞인 빗방울들로 된서리 칠 듯
너무 무서워
꽃은 피고 지는지 봄은 오긴 오는지
꽁꽁 숨어 심겨져 있었더니
아니, 이 게 웬걸!
그대, 모든 꽃들을 詩샘으로하여
꽃들로 온통 불 질러 놓았구나!
사방에 온통 꽃, 꽃, 꽃, 나도 너도 꽃, 꽃, 꽃
실은 그대도 꽃이었구나!

[그장소] 2015-03-27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먼저 아셨군요..저는 어제 알았는데..^^
신영복님의 글에서 보았네요.
한참. 양지 바른 곳 너도 바람꽃 .들 바람꽃
들이 피더라고요. 아직 봄도 이른데..뭘 벌써..했더니..이 여린것들이 살려고..다른 싹들이 피면 해를 가려 이 애들이 살수가 없으니 그나마 작은 것들이 해를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이 맘 때 잎도 없이 지들끼리
피는 거였더라고...살아 보겠다는 그 몸 부림....그러니 봄꽃은 다 처연하고 아름다운
애조가 띠는 듯..하다고..

 

 

 

 

몰래 피는 꽃

 

 

그냥 어둑해질 무렵

그제야 거리를 나선 나는

벌써 여기저기 꽃피어

온통 행복한 사람들, 아이들

나려진 꿈을 보고선

나의 죽음을 그리고 살인자의 독수를

문득 떠올려 본다.

왜 모든 꽃들은 저토록 화사하게 피어나

길가에 번져 있을까?

꽃잎을 밟지 않아도

걸음걸음마다 시가 툭툭 터져 나오고

번져 흐르건만

어데 발길 둘 곳 없는 내 걸음은

당당히 놀이터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 행복한 아이들에게

떠밀려

모르는 골목, 골목 사이사이로

몰래 핀 꽃 한 송이를 찾아 숨어들어 간다.

왜 어스름한 골목

어둠, 쓰레기 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꽃은 없는 걸까?

온통 밟혀지고 시들어버린 꽃들

한껏 찌들어버린 내 미소

고개를 저으며 도저히 어이할 수 없는

이 시 하나를 차마 찢어발길 수 없어

더 이상 시원하게 뱉어낼 수 없어

어스름한 골목

어둠, 쓰레기 더미 속에서

몰래 꽃 피는 꿈

피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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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3-25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깝네요.시가..안타까운지...숨은꽃이 .그런지..뭣모르고 당당한 놀이터의 그들이 안타까운지..
시속의 화자가 안타까운지...

몽원 2015-03-25 16:09   좋아요 1 | URL
이십대 초반에 쓴 끄적거림에 가까운 글인데.. 이런 글도 시로 봐주시고 공감해주시니...
그저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장소] 2015-03-25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어슷 ..자신을 괴롭히는 ..혹은 탕진하는..기분이 들어서..알것도 같고..모를것도같고..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