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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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중심으로 글의 스타일에 관해

 

 

  모임을 통해 처음으로 나는 이번에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접하게 되었다. 사실 오랫동안 문학을 등진 채 (특히, 한국문학을) 살아온 내가 뭔들 읽어봤을까, 스스로 한심스럽기 그지없지만, 여하튼 이번 계기를 통해 그동안 평소 귀에 익었으면서도 굳이 찾아보지 않았던 내 또래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요즘의 문학적인 유행을 나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비평은 개인적 소감을 중심으로 하되, 각 글의 스타일적인 면을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각각 짚어보고, 기호의 여부를 떠나, 개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고 싶다.

 

 

  먼저, 순차적으로 책을 읽기도 해서 그랬지만, 글을 다 읽고 나서도 단연 눈에 띄었던 작품은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였다. 하지만 이 표현은 다소 양가적인 측면이 있기에, 아마 내 비평도 내가 개인적으로 다소 싫어하는 양비론적 비평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사실, 읽기 전 작가 소개부터 눈에 띄었다. 후장사실주의자? 이름부터 조금 거시기한데, 그걸 왜 굳이 작가 소개에 썼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저 후기 사실주의자의 다른 말인가, 하는 정도로 넘겼다. 그런데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무언가 분명한 의도성이 다분히 느껴졌다. 일단, 글 자체가 거의 쉽게 읽히지 않는 글이었다. 물론,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숱하게 열거되고, 나열되는 건축가의 이름들과 건축기법 그리고 미술기법에 대해 공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문제는 ‘숱하게 열거되고, 나열되었다.’는 그 방식 자체에 있었다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보통 소설은 가령 그것이 과할지라도 자신이 쏟아낸 지식의 열정을 어떻게든 주워 담아, 수습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예가, 아마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책을 통해서 평범한 우리들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지식의 해저 속으로 빠져들어, 다시는 떠오를 수 없거나, 아예 미리 발을 대보고 발밑을 헤아리기 어려워 다가가길 포기해버린다. 그것은 그의 지적인 열거방식이 단순히 열거에서 끝나지 않고, 그 격하게 뿜어낸 지적인 배경들을 그의 글속에서 그가 어떻게든 수습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처음 그 광대한 넓이에 혹해 다가서보려 하지만, 그 깊이에 질색해 슬며시 발을 빼게 된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렇기 때문에 에코의 세계는 중세라는 철저하게 마술적이고, 종교적인 시대로 국한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은 분명히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 이미 중세라는 시대를 ‘암흑’으로 규정짓는 것을 넘어서, 현대가 현대후기를 말하고 있는 시대이다. 왜 모던을 살고 있는 우리가 모더니즘이 아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왜 예술이 예술을 부정하고, 그 부정한 예술을 다시 부정하는 이런 시대에서 우리가 말하는 예술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런 시대에서 문학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이러한 질문이 배경이 된 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이구라는 포스트 모더니스트가 되지 못한, 마지막 모더니스트를 통해 ‘벙커’ 속에 들어간 우리의 자화상을 풍자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김중업과 고든이란 인물을 통해 도시개발로 대변되는 모던주의 건축을 비판하고(김중업), 자르고, 대항하려(고든) 했는지도 모르겠다. 또 여기에 박정희 시대의 김현옥이란 인물을 통해 서울의 공간과 이구의 제자 김원을 통해 뉴욕이란 공간의 비교를 통해 또 하나의 극명한 대척점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정말 ‘모르겠다.’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결국 전적으로 이 글이 취한 구성방식 때문이다. 겨우겨우 이 글을 다 읽고서 나는 처음에 작가가 일종의 ‘콜라주 기법’을 소설 속에 적용하고 싶었나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내 눈에 거슬렸던 ‘후장사실주의’란 용어가 번뜩 떠올랐다. 그래서 이제껏 거의 잘 보지 않았던 작가 후기와 작가 인터뷰까지 찾아보면서, ‘후장사실주의’가 뭔지 알아봐야만 했다. 그렇지만 허세 가득한 (개인적인 느낌에 정말로 자뻑과 후까시로 일관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후장사실주의’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영어버전의 위키백과를 뒤적거리며, 대충 파악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요지는 ‘후장사실주의’가 일종의 ‘Neo-Dadaism'이란 결론이었다. 뭐, 사실 남미에서 초현실주의에 반대해서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동아시아로 넘어와 후장사실주의가 됐다느니, 하는 정의가 있긴 했지만, 별로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다. 물론, ‘새로운 다다이즘’에 대해서도 내가 제대로 이해하는 바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그 맥락을 따라 나온 백남준의 작품들과 비틀즈의 존 레논의 아내였던 요코의 전위예술에 대한 어설픈 기억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도 20대 때 이후로 거의 소실해버린 기억의 편린일 터이다. 하지만 결국엔 그 모든 예술적 행위들이 상업적으로 변질해가는 예술에 대해 반대하는 일환의 운동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하기에 수백 대의 TV를 (이 게 더 상업적이라 개인적 생각도 있지만)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TV에 갇혀버린 현대인을 풍자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았을 때,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분명히 새로운 시도였다는 점에서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예술이 반예술을 추구하면서 대중들에게 고립되어가고, 오히려 일부 향유층을 위한 예술로 전락해버린 것처럼, 문학이 반문학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달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글의 소재는 이구라는 설정 상 한국인도 이방인도 아닌 대상을 씀으로써, 무언가 아시아적 정서를 배양하려했음은 분명하지만, 그 놀음방식 자체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를 외면한 서구적인 예술론에서 출발해서 끝났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과정이라면, (작가가 충분히 젊기에) 그래서 작가가 조금 더 아시아적인 한국적인 정서 하에서 새로운 형식을 추구해나갈 수 있다면, 우리도 세계에 우리만의 문학형식이란 걸 하나쯤 내놓을 수 있겠다는 기대도 품어보게 된다. 마치 일본의 오에겐자부로처럼, 서구의 기독교 사상을 철저히 일본의 신화로 재해석한 그의 방식처럼. 혹은 미시마 유키오의 아시아적인 미적 의식처럼. 하지만 저자가 계속 지금과 같이 허세 가득한 ‘후장사실주의자’란 트레이드마크를 붙잡고서, 대중을 외면하려고 한다면, 실제 ‘후장사실주의자’의 모태가 된 비현실주의의 책들처럼 어느 농부들의 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지돈의 글을 읽고서, 바로 이장욱의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읽고 느낀 점은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평이한 문장과 평이한 구성으로 글을 써서, 읽기는 쉬웠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별로 가슴에 남는 문장이 없었다. 윤이형의 ‘루카’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이 책속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다. 소재는 ‘퀴어’라는 특수한 소재를 담고 있었지만, 근래 유행하는 소재주의 소설과 달리, 철저하게 연애소설이었다는 점이 아마 내 정서와 맞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초주의로 가득한데다 사랑에 다소 냉소적인 정서가 팽배한 내 개인이, 정반대급부인 순정적인 여자정서와 오직 순수한 사랑에 대한 열정 때문에 누군가를 증오할 수 있는 정서의 이 글을 읽었을 때 대비되는 감정선에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누군가를 증오할 만큼 사랑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기존에 윤이형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열정을 이 작품을 통해서 느꼈던 것 같다. 최은미의 ‘근린’의 경우 매우 구성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여러 인물의 배치를 통해 감정을 배제한 문장으로도 묘한 긴장을 일으키는 능력은 애초에 이 소설이 얼마나 구성에 공을 들였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들이었다. 하지만 대개 구성에 초점을 맞춘 글들이 그러하듯이, 이 글이 독자에게 저자가 의도한 빈 벤치에 대한 감동이나 여운을 얼마나 남겼을 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김금희의 ‘조중균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분명 진부한 설정과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 지나간 세계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름 재밌게 읽혔다. 그 이유는 캐릭터에 대해 생명력을 작가가 잘 부여한 까닭이라고 여겨본다. 손보미의 ‘임시교사’의 경우도 ‘조중균의 세계’와 같이 캐릭터가 잘 살아있는 작품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보다 풍자적인 요소를 갖춘 세련된 소설이란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조중균의 세계’처럼 직접적으로 감정에 호소하기보다는 P부인의 내밀하고 섬세한 감정선을 담담하게 표현함으로써 뒷맛의 씁쓸한 풍미를 남기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소재적으로도 지나간 세계가 아닌, 지금의 세계, 그리고 앞으로의 세계에 대한 풍자가 그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본다. 마지막으로, 백수린의 ‘여름의 정오’는 가장 잘 쓰인 전형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지나친 전형성을 싫어하지만, 이 글에서의 전형성은 전혀 그러한 느낌은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아귀가 잘 들어맞으면서도, 내내 흥미를 유발시키는 구석이 있다는 전형적^^; 표현이 좋을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소설이 내 가슴에 와 닿았던 점은 누군가의 생의 안부를 묻는 방식이었다. 우연히 닮은 이름을 뉴스에서 보고서 혹은 갑자기 911테러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형체를 보면서, 죽어간 이를 추모하고, 위태로웠던 이에 대해 걱정하는, 보통 우리네들의 안부를 묻는 방식이 글속에 표현되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독자를 공감하고, 동시에 독자에게 공감 받을 수 있는 글쓰기 방식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이제 대강 정리를 해봐야 할 거 같다. 처음 의도와 달리 다소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에 대한 평에 치우치다보니, (다소 예감은 했지만) 다른 소설들의 전체적인 글쓰기 방식을 면밀하게 살펴보지 못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렇지만 근래 내 또래의 젊은 작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글쓰기를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음에는 분명한 것 같다. 각자의 방식으로 기존의 틀에 대항하면서, 때론 융화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 비록 여전히 아마추어지만,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내내 아마추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도 주어진 하나의 숙제일 거란 생각을 해보며, 부족한 평을 이만 줄여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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