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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
윤영무 지음 / 명진출판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제 아내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 합니다. "장남과 지방 사람, 학창 시절에 공부 안하고 딴 짓 한 사람, 그리고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과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저와 결혼을 했습니다. 아직도 가끔씩 아내는 제게 왜 이런 남자랑 결혼했을까 반문하곤 합니다. 물론 제가 그 모든 단점을 뛰어넘을 만큼 완벽한 남자이기 때문이겠죠.^^
위에서 열거한 아내가 싫어하는 결혼 상대 남자의 종류는, 그 상세한 내용에서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장남'을 첫째 항목으로 꼽는 데에는 대개 비슷합니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장남'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여전히 긍정보다는 부정의 의미가 강합니다.
이런 장남에 대한 얘기를, 장남의 입장에서 아주 사실적으로, 직설적으로 풀어놓은 책입니다. 49년차 장남인 MBC 기자 윤영무의 '장남 이야기'이자, 못난 장남이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바치는 '사부곡(思父曲)'입니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에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책을 읽으며 한번쯤은 울먹거릴 그런 이야기입니다.
장남이 아닌 사람 또는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공감(共感)보다는 쓴 웃음을 지을만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마지막 책장을 넘겨도, 결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장남의 운명을 바꿀만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장남은 여전히 심적으로 힘들고 부담스러우며, 특히 그의 아내 입장에서는 여전히 장남인 남편과 살아야하는 힘든 운명을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이 책은 '장남의 눈'으로 씌어 있으며, 장남이 가지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 부담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저자의 경험을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자의 말마따나 "사실 엄밀히 따져 보면 장남의 자리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장남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장남이기 때문에 받았던 특혜가, 커갈수록 점점 힘겹게 느껴지는 것은, 장남만이 느끼는 부담감일 것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그런 부담감이 사명감으로 바뀌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내가 부정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 맨 마지막에 "못난 장남 곁에서 고생이 많았던 아내에게 미안하고도 고맙다는 말을 덧붙인다"고 적고는 있지만, 그러나 이 책은 장남의 이야기이지 장남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절대 아님을 미리 알고 읽으셔야겠습니다. 결혼 후 몇 번이나 편지 한장 달랑 남기고 집을 나가버리고, 고부 갈등으로 남편에게 뺨이나 후려맞는 그런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양념처럼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나... 혹시 장남의 아내로서 힘겨운 삶을 살고 계실지라도, 중간에 책을 덮어버리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장남이든 아니든 이 땅의 모든 남편의 바람은 한결같습니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인용한 다음의 시가 그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의 낙은
처자가 한 자리에 모여
화목하게 머리를 맞대고
음식을 먹을 때
- 다치바나 아케미
추석 연휴 기간, 대구와 안동과 인천을 오가며 정신없이 보냈지만 틈틈히 이 책을 읽었습니다. 아버지의 거친 얼굴을 보면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큰 아들 성적표에 조금이라도 성적이 내려갔나 싶으면 이유 불문하고 몽둥이부터 들었던 어린 시절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자상하신 어머니와 대비되어 늘 생각 밖에 나 있던,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의 늙어가는 모습이 서글프게 다가왔습니다. "애 낳아서 다 기를 때까지 니는 정말 모른다"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 아주 조금씩 느껴지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그리고 내 동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던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되돌아보며 가슴 뭉클한 수많은 이야기 중에, 책을 덮고 유독 생각나는 말은 전혀 엉뚱하게도 이런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마흔 몇 해의 아침이 가고, 그때의 아버지처럼 나도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시절이 좋아 지금은 차가운 우물물 대신 따스한 수돗물로 세수를 하지만, 가족들 가운데 맨 먼저 일어나는 것은 역시 나다.
나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난다. (...)
방송기자 생활 22년, 결코 게으름을 피워 본 적이 없다."(p.24~25)
제가 생각하는 장남은 모든 일에 부지런하며, 마음 씀씀이가 넓어야 하며, 되도록이면 가족들을 위해 먼저 지갑을 열 줄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맏며느리인 아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굳이 장남으로서라기보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로서, 나보다 나이 어린 동생의 형으로서, 부담스러운 장남에게 시집 온 아내에 대한 도리를 지켜야하는 남편으로서 제 역할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겠습니다. 이래 저래 고민할 것이 많은 장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