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
다니구치 에리야 엮음, 구스타브 도레 그림, 양억관 옮김 / 황금부엉이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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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에 대해 들어보지 않은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대서사시를 읽어본 이도 드물 것입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찬사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실체에 다가가기는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굳이 단테의 신곡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하는 '고전'을 두루 망라한 교양인이 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서울대에서 선정한 '필독서'에도 포함되어 있으나, 그 '필독서' 목록 200권 중 제가 읽은 것은 극히 일부이며, 앞으로도 읽지 못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평생 '필독서'를 읽지 못한 '낙제생'으로 살아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번 기회에 단테의 신곡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완역본은 아닙니다. 다니구치 에리야가 현대의 독자를 위해 작품의 본질을 쉽고 간결하게 엮어 다시 쓴 글입니다. 원본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작품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알 길은 없으나 묵직한 완역본을 읽을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일러스트레이션입이 압권입니다. 19세기의 천재 화가 구스타브 도레가 그린 이 그림은 텍스트의 모든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실제 이 그림(판화)는 1861년 구스타브 도레가 자비로 출판을 하여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도레라는 이름을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 유럽으로 알리게 한 걸작입니다. 텍스트도 텍스트이지만 이 그림만으로도 책은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 있습니다.

신곡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네이버에서 "신곡"을 검색해보면 많은 요약본을 찾을 수 있는데, 저는 그것보다 더 잘 요약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느낌을 표현할 방법도 마땅치 않습니다. 사실 텍스트를 읽으면서 '감동'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기독교, 그리고 단테가 살았던 당시의 이탈리아·유럽의 현실을 뒤섞어 표현한 단테의 상상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익숙하지 않은 저로서는 단테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받아안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저의 취약한 인문학적 지식과 토대로부터 기인한 것일뿐, 섣불리 고전의 무용성을 얘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행히 엮은이가 간간히 써놓은 주석과 구스타브 도레의 일러스트가 있어 신곡의 얼개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림을 제외하고 텍스트 분량도 많지 않아 출퇴근길에 오며가며 가볍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지하철에서 누군가 제 옆에서 이 책을 힐끗 보았다면 아마도 만화책을 읽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책에서 일러스트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저의 일천한 지식과 경험으로 인해 영혼의 구원을 갈망하는 감동을 느낄 수는 없었으나 흥미로는 경험이었습니다. 단테와 신곡, 구스타브 도레에 대해 조금이나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다들 아시다시피 신곡은 <지옥편><연옥편><천국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옥편>에는 생전에 죄를 지은 사람들이 그 죄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영역,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받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 지옥의 제삼 영역은 '게걸스럽게 음식을 탐한 자들이 떨어지는' 지옥입니다. 이곳에 떨어진 망자들을 케르베로스라는 괴물이 발톱으로 몸을 갈갈이 찢어발겨 먹습니다.
교훈) 식탐한 자는 현세에서는 비만과 성인병으로 고생하며 죽어서도 지옥에 떨어져 케르베로스의 먹이가 된다.
**
'케르베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문을 지키는 머리 3개에 뱀꼬리 모양의 개를 말합니다. 이 외에도 신곡에는 수많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신화속 인물들은 지옥이나 연옥에서는 보이는데 천국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못찾은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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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만든 환경의 역습
박정훈 지음 / 김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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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잘먹고 잘사는 법》을 읽으면서 수도 없이 밑줄 그어가며 '그래~그래~'하며 공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자에게 감사하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그 프로그램의 연출가인 박정훈 PD입니다.

이 책은 올해 초  3부작 다큐멘터리 《환경의 역습》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이미 TV를 통해 인기가 검증된 내용이라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매우 관심을 가지는 주제일 것입니다. <잘먹고 잘사는 법>도 TV에서 보지 못하고 책으로 사서 읽었습니다. 그래서 <환경의 역습> 예고편을 보면서 꼭 봐야지,하고 생각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3편 중 단 한 편도 보질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은하철도 999> 이래 TV 앞에서 시간 맞춰 프로그램을 보려고 대기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ㅎㅎ 얘기가 딴 데로 샜습니다.

얼마 전 다른 책에서 우리나라의 웰빙 열풍이 미국의 LOHAS(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 건강과 지속성장성을 추구하는 생활방식)로 옮겨가기는 다소 힘들 것이라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웰빙은 개인적인, 그래서 어쩌면 다소 이기적인 '잘먹고 잘살기'인 반면 LOHAS는 개인의 건강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문제까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웰빙'인 셈입니다.
이 책에서 LOHAS라는 말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지만,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LOHAS에 다름 아닙니다.
"제가 이 책을 쓴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 책의 주장에 공감하는 독자들께서 분별없이 마구 화학물질을 배출하고 소비하는 도시 생활의 반호나경적 실태를 개선하는 데 앞장서는 전도사의 역하릉 래주셨으면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많이도 말고 조금씩, 내가 실천할 수 있는 행동 하나하나부터 아주 조금씩 바꾸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p.326)

책에서 H군으로 언급된 아이의 사진입니다. 아주 잘 생긴 아이이지요, 그 옆의 사진은 H군이 강남에 살 때 온 몸에 아토피 증세가 나타난 모습입니다. 아이의 아토피 때문에 피곤에 지친 H군의 가족은 보통 사람들이 엄두내기 힘든 이사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치솟고 있는 강남의 집값을 포기한 채 관악산 밑 동네로 이사를 갔지요. 그리고 집 내부의 소재를 친환경적인 소재로 바꾸었습니다. 창 밖으로는 관악산의 숲이 시원스레 펼쳐지구요(아~ 이게 제가 꿈꾸는 환경입니다^^). 그로부터 4달 후 아이는 예전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CF 모델 뺨치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강남에 살 때는 강남에 산다는 약간 우쭐한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가 아프니까 그런 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죠. 제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었으요. 아이가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건강한 것이 영어를 잘하고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제1부 <집이 사람을 공격한다>에서는 새집증후군, 빌딩증후군, 화학물질과민증 환자등을 다루면서 주거 환경의 중요성과 화학물질의 폐해에 대해 역설합니다. 많은 사례를 통해 현대 주거환경과 화학물질의 폐해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2부 <우리는 왜 자동차를 용서하는가>에서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자동차 문화의 폐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가용의 도심 진입을 금지한 네델란드 유틀레히트 시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요, 따로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참 살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3부 <보이지 않는 괴물들>에서는 지난 150여년간 사용된 치과용 충전제 아말감의 폐해, 덩치 큰 생선 속의 수은의 폐해, 그리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환경호르몬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즐겨 먹는 생선 속 수은 때문에 두 아이를 잃은 레베카 리딩턴 씨의 모습을 보며 정말 '환경의 역습'을 실감하였습니다. 그것도 청정 바다로 유명한 호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4부 <기본으로 돌아가자>에서 가장 흥미있는 내용은, 최근 위헌 판결을 받은 수도 이전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산업화의 물결이 일면서 이런 중앙 집중은 가속화하여 30년만에 대한민국 국민의 4분의 1이 서울로 몰려들게 되었다. (…) 이런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친환경적인 삶의 질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인해 땅이나 집이 없는 서민들만 대를 물려가며 어렵게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 이러한 수도권의 불합리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사람들이 다시 지방으로 흩어져 국토의 한 부분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게 하는 정책을 쓰는 방법 외에는 없다.(p.313)" 그러면서 그는, 서울에 몰려있는 교육기관의 이전과 지방 분권, 친환경 농업과 어업으로 지방을 살려내고, 행정도시를 연결하는 사통팔달의 도로망보다는 친환경적인 철도망을 연결하고 시내 교통망은 지상 전철위주로 만들고 자가용의 통행을 엄격히 제한하는 등의 세밀한 그림을 그린 다음, 서울에서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관습헌법'에 의해 헌법을 개정하지 아니하고서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따로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이야기하며, 이 당연한 것을 설득하기 위해 그와 제작팀은 1년 간이나 심층 취재를 했던 것입니다. 눈으로 보여주기 전까지 사람들은 믿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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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어 - 홍사중의 고전 다시 읽기
홍사중 지음 / 이다미디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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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일 동안 홍사중의 《나의 논어》를 읽었습니다. 선배의 칼럼을 보고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이 재미있다고 해서 마음이 쉽게 동(動)하지는 않는데, 일전에 비록 문고판이기는 하지만 《맹자》와 《순자》를 읽고서 재미를 넘어 신선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어 주저없이 샀습니다.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지하철에서 오며 가며 읽기에는 녹록하지 않았습니다만 책값이 후회되지 않을만큼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홍사중의 글을 신문이 아닌 책으로 본 것은 처음입니다. 신문으로 봐도 직접 내돈 주고 산 적이 없는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니 거의 접한 적도 없고, 보더라도 처음부터 삐딱한 눈으로 봤던 게 사실입니다. 이 책 한 권으로 인해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예전에 3당 야합을 할 때에도 '역사에 어느 일이나 그것이 일어날만한 까닭이 반드시 있다. 아무리 보수 합당이 불합리하고 엉뚱하게 보여도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고 얘기하면서 그 합당으로 득을 보는 건 결국 국민이라는 논조를 보고 끼워맞추기식 궤변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 이후에 그가 어떤 글을 썼는지 잘은 모르지만 여전히 김대중, 류근일과 함께 조선일보 트로이카로 불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떠나 이 책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홍사중의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홍사중의 글쓰기에서 '지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압권은 단연 제1장 <공자를 말한다>입니다. 성인 공자가 아닌 '인간 공자'에 대해 이토록 실감있게 표현한 글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이런 표현은 책 좀 많이 본 분들이 쓰는 말이지만 딱히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두루 잡기를 익히며 생활을 해나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세속적인 모습들 - 특히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가 없어 안절부절 못하다가 자로로부터 쓴소리를 듣는 장면들을 보면서, 공자에 대해 논어에 대한 보이지 않는 벽이 한꺼번에 허물어짐을 느꼈습니다.
2장에서 7장까지는 '지식, 군자와 소인, 처세술, 리더십, 천명과 부귀, 공자 학원과 제자들'이라는 주제로 논어와 여러 고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흔히 "공자 曰 …" 이렇게 시작되는 여느 고전 해석본과는 많이 다릅니다. 저자가 이해하는 공자와 논어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하면서 <논어>를 인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공자와 논어, 나아가 중국 고전에 대한 전반적인 모습을 꿰뚫고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글은 재미있습니다. 어쩌다 길바닥에서 엿들은 것을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남에게 말하는(道聽途說) 얼치기의 허투룬 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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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소비 트렌드
김상일 지음 / 원앤원북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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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려면 무엇이든 팔아야 합니다. 그것이 상품이든, 서비스든, 아니면 하나밖에 없는 몸뚱아리든 무엇이든.
회사에서의 고민의 대부분은 '무엇을 팔까'입니다. 무엇을 팔까라는 고민에는 반드시 '무엇이 잘 팔릴까'라는 질문이 선행됩니다. '무엇이 잘 팔릴까' 나아가 이왕 파는 거 '어떻게 하면 잘 팔릴까' - 이는 '트렌드'를 제대로 알아야만 해결 가능한 문제들입니다.

한국 시장은 참 독특하다고 합니다. 인구당 휴대폰 보유량 세계1위, 화장품 소비량 세계1위, 인구 대비 성형 수술 비율 세계 1위,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타벅스 보유국, 사업 개시 10년도 안 되어 세계 2위 규모의 홈쇼핑 매출이 일어나는 나라, 자본주의 국가 중 유일하게 자국 영화 점유율이 50%를 넘는 나라. 그러면서도 세계 전역에서 승전고를 울리는 글로벌 초일류 기업 가운데 상당수가 유독 한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곳. 예를 들어 월마트나 네슬레나 허쉬나...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의 소비 지표들입니다.

저자는 한국의 소비 시장 구조를 12가지의 코드로 읽어내고, 마지막으로 현재 진행 중인 3가지 코드를 제시하며, 종국에는 "한국적인 특성을 찾아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그에 앞서 세계적인, 보편적인 소비 시장의 트렌드를 3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18가지 코드들은 대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며 직·간접적으로 이미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언뜻 쉬운 듯한 내용이나 결코 그냥 듣고 흘려버리기에는 뭔가 꺼림칙한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話頭는 말 그대로 '실마리'일뿐, 고민의 시작이지 종점은 아닙니다.

책에서 말하는 18가지의 코드를 일일이 언급하는 것은 다소 무모한 것 같습니다. 코드의 나열은 또 다른 혼란을 초래할 뿐입니다.

책을 덮고 생각을 했습니다.
OR로는 어렵다, AND여야만 한다(저자는 이 말을 상당히 강조합니다.) - 이 결론이 달갑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로는 안 된다, 모두여야 한다'는 것인데, 말이 쉽지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과제입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저자의 말에 희망을 얻습니다.

"꿈틀대는 잠재 소비 욕구들의 길목에 물꼬를 터줄 궁리에 몰두하자. 우리 앞에 허다한 성공 신화들이 있지 않은가. 굳이 새로운 제품, 새로운 서비스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어딘가 소비 욕구와 대상 제품의 연결을 가로막는 허들을 깨는 과정에 금맥이 기다리고 있다."(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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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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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깐수로 알려진 정수일 교수의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마지막 책장을 덮었습니다. 한동안 우보천리(牛步千里)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수일 교수는 이미 알려진 대로, 만주 북간도(현재의 옌볜(延邊)) 출신으로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평양외국어대학, 말레이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다 북한 공작원 신분이면서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의 아랍계 필리핀인으로 위장해 국내에 들어와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다 1996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5년간 옥살이를 하고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세상에 다시 나왔습니다. 복역중에 <이븐 바투타 여행기1,2>, <중국으로 가는 길> 등을 완역했고, 출옥 후에도 <고대문명교류사>, <이슬람 문명>, <문명교류사 연구> 등의 저서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등의 역주서를 펴냈습니다. 비록 간첩 혐의로 복역하고 나왔지만, 그 사상의 좌우를 떠나 ‘동서문명교류사’와 ‘아랍 이슬람학’의 개척자임은 누구나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가 5년간의 옥살이를 하는 동안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펴낸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당국에 붙잡히는 그 순간까지도 그를 외국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5년 간의 옥중 편지 시작을 그의 소설같은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엽니다. 그러나 5년 간의 지리한 옥살이임에도 그의 편지 어디에도 유약한 표현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40년을 학자로서 매진해온 그의 학문적 열정과 집념이 그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저에게 채찍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문명교류학을 통해 민족사를 복원하겠다는 '순수한' 그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게 되었습니다. 제 표현의 한계로 인해 그의 열정과 바람, 학문적 깊이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입발린 소리가 아니라 정말 '순수한' 민족에 대한 그의 애정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는 편지 곳곳에서 자신의 의지를 가다듬고, 옥중에서 그의 염원인 민족사 복원을 위한 문명교류학 관련 저술에 매진합니다. 그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 '소 걸음으로 천리를 가고(牛步千里)', '소가 밟아도 깨지지 않게(牛踏不破)', '언 붓을 입김으로 녹이며', '새끼줄을 톱 삼아 나무를 베는' 과 같은 표현이 있는데, 한 번 눈으로 들어온 문장이 머릿속을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참으로 두고두고 나를 단련하기 위해 되새겨야 할 문장들입니다. 이 외에도 동서고금의 고전과 다양한 문헌들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그의 편지를 보노라면 경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433일 동안 국어대사전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단어 한단어 빠짐없이 보고 익혔다는 그의 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으며 참 많이 반성했고, 더불어 많은 어휘를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1996년 9월 14일자 편지를 시작으로 출옥하기 하루 전인 2000년 8월 14일자 편지로 끝이 납니다. 400 여 페이지의 짧지 않은 글을 읽으면서 저는 시종일관 그의 학문적 열정과 지식의 깊이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한국어를 포함해 동양어 7종과 서양어 5종, 모두 12종의 언어를 익힌 이야기, 때마다 반복되는 한·중간의 역사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민족사를 복원하겠다는 이야기, 그리하여 학문의 총림(叢林)에서 무위(無爲)의 낙과(落果)가 되지 않으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학문과 더불어 살겠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어줍잖게 책 좀 읽고 어룽더룽 아는 바를 글로 쓰는 제가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저 저의 게으름이나 느즈러짐을 새삼 경계하기 위해 천협(淺狹)하게 아는 바라도 애써 쓰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할 뿐입니다.

잊지 말아야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5년의 옥살이를 우보천리(牛步千里)하면서 호보(虎步)로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한결같이 그를 옥바라지한 그의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인지, 아니 실정법상 간첩인지도 모르고 지냈던 그의 아내의 절대적인 뒷바라지가 없었던들 이 모든 것이 불가했을 것입니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인고의 쓰라림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 '나를 잊어주오'라고 단장(斷腸)의 절규를 한 바 있었지. 그러나 당신은 '기다림'으로 '잊음'을 멀리하겠다고, 정녕 기담(奇譚)같은 큰 사랑으로 화답해왔소." 가슴이 아프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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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적 2004-12-14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고 싶은 책 중에 하나랍니다. 님의 리뷰를 읽고 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